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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9일 고 장자연씨의 영정이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을 떠나고 있다.
 2009년 3월 9일 고 장자연씨의 영정이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을 떠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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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7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오늘 29살 여성 배우가 유명을 달리했다. KBS <꽃보다 남자> 등에 출연한 장자연이었다. 이 신인 연기자는 자필 형식의 문건에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며 자신을 술자리로 부른 이들의 이름과 악행을 나열한 채 안타깝게 사망했다.

즉각 사회적 파문이 일었다.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라 불린 그 문건에는 소속사 대표의 폭언과 폭행, 협박과 함께 강요에 의해 술자리에 나가 접대를 하고 심지어 성상납을 강요받은 상황이 4쪽에 걸쳐 명시돼 있었다.

"2008년 9월경 조선일보 방 사장이라는 사람과 룸싸롱 접대에 저를 불러서 사장님이 방 사장님이 잠자리 요구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 몇 개월 후 김성훈(기획사 대표 김종승의 가명) 사장이 조선일보 방 사장님 아들인 스포츠조선 사장님과 술자리를 만들어 저에게 룸싸롱에서 술접대를 시켰습니다." (고 장자연씨가 남긴 자필 문건 중, <시사인> 인용)

문건엔 특히 당시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던 보수 일간지 사주를 비롯해 기업인, 방송인 등 유력인사 수십 명의 이름이 포함돼 있어 그 충격은 더했다. 하지만 사회적 논란과 여성계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수사는 더디고 무디기만 했다. 같은 달, 당시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고 장자연이 죽은 지 16일째가 됐지만, 경찰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경찰의 말 바꾸기 시간끌기를 통해 수사의지가 없음이 드러났고, 관련자들이 권력층이기 때문에 이 사건이 용두사미가 되지 않겠나 하는 걱정이 있다. 그래서 하루 빨리 권력형 범죄인 이번 사건을 검찰이 나서 수사를 진행하고 그 수사 과정과 결과를 분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부실했던 수사, 커갔던 의혹
     
이미 '장자연 사건'은 한 연예인의 단순 자살로 그칠 문제가 아니었다. 연예계가 결부된 한국사회 권력층의 추악한 접대 문화와 남녀 간 권력관계, 그로 인해 온갖 폭력과 강요, 협박에 노출돼 결국 성 착취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린 여성 연예인의 인권 문제가 부각됐고, 이를 덮으려는 수사기관의 권력유착 및 부정부패 의혹으로까지 비화됐다.

10년이 흐른 지금, 일각에서 장자연 사건을 사실상 '최초의 미투'로 평가하는 이유다. 10주기인 오늘, 이 사건의 경과를 꼼꼼하게 되짚고 진행 중인 의혹을 환기시키는 것은 역시 유족들과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달래기 위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최초의 미투'이자 권력층이 수사에 개입한 정황이 의심되는 장자연 사건에 대한 의혹을 말끔히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미투 운동'과 수많은 또 다른 '장자연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일이 될 것이다.

다시 시계를 돌려보자. "성역은 없다"며 40여 명의 수사 인력을 투입하고 118명의 참고인을 조사한 경찰은 장자연씨의 죽음 이후 무려 4개월이 지난 2009년 7월, 문건 속 20여 명을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당시 경찰은 술 접대 강요 등의 혐의로 전 소속사 대표 등 총 7명을 입건하고 검찰에 송치했지만, 검찰은 전 소속사 대표의 강요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 '강요죄'가 인정되지 않으면서, 애초 성상납이나 술자리 강요 등으로 문건에 언급된 유력인사들에 대한 '강요방조죄' 혐의도 구성조차 될 수 없었다. 당연히 '봐주기 수사'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소속사 대표 김종승씨와 전 매니저 유장호씨만 처벌 받았을 뿐이다.

김씨는 '폭행죄'가 인정돼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을, '장자연 리스트'를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세상에 공개한 유씨는 김모씨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과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받았다. 반면 리스트에 거론됐거나 유족이 사자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고소한 유력인사들은 경찰이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넘겼으나 결국 '혐의없음' 처분을 받았다. 접대를 받았다고 폭로된 이는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2009년 4월 8일 서울 중구 태평로 코리아나 호텔 조선일보사 현판 앞에서 여성·언론·인권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고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2009년 4월 8일 서울 중구 태평로 코리아나 호텔 조선일보사 현판 앞에서 여성·언론·인권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고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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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역시나 유력 일간지 사주와 관련된 의혹이었다. 작년 1월, '고 장자연 사건 재수사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던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성명을 통해 이 논란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 바 있다.

"그 일간지는 2009년 당시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 사건을 언급한 이종걸 당시 민주당 의원과 방송사 토론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이정희 전 민주노동당 의원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항소심 끝에 모두 패소한 바 있다. 또한 '장자연 리스트'에 대해 보도한 KBS, MBC 소속 기자 5명에 대해서도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기자회견에 참여한 활동가도 기나긴 소송에 휘말렸다."

문건에 등장하고 수사선상에 올랐던 이가 도리어 정당하게 의혹을 제기한 이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 했던 것이다. 현직 국회의원을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그 일간지'는 물론 <조선일보>였다. 이후 2년이 지난 2011년 3월, SBS가 이른바 '장자연 편지'와 그 안에 적힌 31명의 명단을 보도하며 논란에 다시 불이 붙었다. 하지만 경찰은 국과수 감정 결과를 토대로 조작이라 판명했다.

이후 여성단체들의 문제제기가 이어졌고, 인권위가 실태조사를 벌이는 등 여성 연예인들이 당면해야 하는 부당한 처우와 악습에 대한 공론화가 이뤄졌다. 여성 연예인들이 관련된 연예계 사건과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고 장자연'이란 이름이 소환됐지만, 사건의 진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9년여가 흘렀고, 진실 역시 묻히는 듯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검찰개혁의 일환으로 발족한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기 전까지.

검찰 진상조사단의 과제
 
2018년 4월 5일 언론시민사회단체와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이 서울 종로구 <조선일보> 인근 코리아나호텔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우 고 장자연씨 성상납 강요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2018년 4월 5일 언론시민사회단체와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이 서울 종로구 <조선일보> 인근 코리아나호텔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우 고 장자연씨 성상납 강요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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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헤쳐야 할 의혹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앞서 살펴본 사건의 경과에서 드러나듯, 검경의 부실 수사 의혹이 한 축이라면 그 과정에서 당시 수사기관을 뒤흔들었으리라 의심되는 외압의 실체를 밝히는 일이 더 큰 줄기라 할 수 있다. 특기할 점은 재조사를 추동한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진상 규명을 촉구해 온 국민여론이라는 사실이다.

정권교체가 이뤄진 지난 2017년, 그해 12월 발족한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장자연 사건 재조사를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듬해 1월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섰고, 이어 3월 재조사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23만을 돌파하며 여론이 폭발했다. 결국 과거사위원회의 권고를 받은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이 6월부터 재수사에 착수했다.

부실수사 의혹은 사실로 드러났다. 진상조사단에 따르면, 경찰이 검찰에 수사 자료를 넘기는 과정에서 장씨의 휴대전화 통화기록과 디지털 포렌식 결과 등 핵심 증거들이 빠진 것으로 드러났다. 압수수색 과정 역시 주요 증거들이 빠진 채 허술하게 진행됐다. 장씨가 즐겨 사용했다던 미니홈피 내용을 들여다볼 영장조차 청구되지 않았다.

2009년 40명을 투입했다던 경찰은 과연 무엇을 수사했던 것일까. 아울러 검찰 역시 추가 수사를 지시하지도, 실행하지도 않았다. 진상조사단은 검경 모두 축소수사나 은폐 의혹의 책임 소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시인했다.

고 장자연씨의 소속사 동료였던 배우 윤지오씨 역시 이러한 부실수사를 뒷받침하듯 최근 한 인터뷰에서 "당시 21살인 제가 느끼기에도 수사가 굉장히 부실하게 이루어졌다"고 말해 관심을 모았다. 사건 수사의 핵심 참고인이었던 윤씨는 "수박 겉핥기"식의 경찰 조사를 13차례 받는 동안 <조선일보>로부터 미행을 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선일보>에 대한 고백은 또 있었다. 사건 당시 경기지방경찰청장이던 조현오씨는 작년 7월 MBC < PD수첩 >과의 인터뷰에서 <조선일보> 핵심 관계자가 두 번이나 찾아와 "'우리 조선일보는 정권을 창출시킬 수도 있고 정권을 퇴출시킬 수도 있다'며 협박을 해댔다"며 "이명박 정부가 우리(조선일보)하고 한 번 붙겠다는 거냐, 라는 이야기까지도 했다"며 외압설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진상조사단은 외압설과 더불어 핵심 참고인까지 미행하며 사건 수사에 촉각을 세웠던 <조선일보> 사주 일가에 대한 조사도 병행 중이다. 조사단은 문건 속 '조선일보 방 사장'으로 의심되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동생 방용훈 코리아나 호텔 사장과 방상훈 사장의 차남인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이사를 작년 연말 소환 조사했다. 장자연씨와의 만남 여부와 함께 외압 등 <조선일보> 관련 의혹이 조사됐을 것이란 중평이다.

애초 '조선일보 방 사장'으로 알려졌던 당시 <스포츠조선> 사장 하아무개씨는 이미 용의 선상에서 제외된 바 있다. 또 2008년 5월 당시 김종승 대표의 생일 파티 자리에서 장자연씨를 강제 성추행했지만 2009년 무혐의 처리됐던 조희천 전 <조선일보> 기자는 공소시효 두 달 전인 작년 6월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이밖에 <청춘의 덫> 등을 연출한 정세호 PD나 하이트진로 박문덕 회장 역시 < PD 수첩 > 등을 통해 장씨에게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 진상조사단에 따르면,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 역시 장씨와 무려 35차례나 통화한 기록이 새로 조사됐고, 권재진 전 법무부 장관 역시 방 사장이 동석한 술자리에 참석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2009년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시사인> 주진우 기자는 6일 윤씨가 인터뷰한 방송에 나와 "수사는 많이 했지만 경찰들이 선을 그었다, 다 <조선일보>가 뒤에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 또 주 기자는 "조선일보 주변 사람들, 그리고 또 권력자 주변, 청와대 주변 사람이 있었다"며 "권재진 전 장관이 관련되어 있었다"고도 했다.

당시 권 전 장관은 검찰 내 이인자로 평가받는 대검 차장이었다. 사건 수사에 <조선일보> 측이나 검찰 내부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일각에선 2008년 광우병 집회 등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이명박 정부가 국면 전환을 위해 장자연 사건을 활용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그만큼 장자연 사건이 아직 풀리지 않은 의혹과 더불어 권력층의 유착을 암시하는 정황과 의혹들로 가득 차 있다는 방증일 수 있다.

그리고 10년, 세상의 '장자연들'과 미투

"인터뷰를 보며 2009년을 떠올렸습니다. 2009년 봄, 저는 배우 장자연씨의 죽음 속에서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위계와 권력이 작동한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섧디 설운 죽음을 그대로 보낼 수는 없어 진실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습니다. 그러나 결국 가해자들이 또 이겼습니다. 망자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권력의 힘으로 또다시 희롱당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부끄럽고 여성이기에 더욱 서러웠던 봄으로 기억합니다."

10년이 흘렀다. 작년 1월, 서지현 검사의 미투 폭로가 나온 직후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남긴 글이다. 10년 전 사건의 의혹을 풀고자 동분서주했던 이 여성 국회의원은 다시금 미투 운동을 맞닥뜨리면서 참담함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미투 폭로의 당사자인 서지현 검사 역시 한 인터뷰에서 "장자연 사건을 보면서 오히려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진실을 밝히려면 죽지 않고 살아서 끝까지 증언해야 겠다는 생각에 버틸 수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렇게, '최초의 미투'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고 장자연씨는 한국인들의, 한국 여성들의 뇌리에 각인돼 왔다. 누구에게는 살게 해준 버팀목으로, 누구에게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안겨준 대상으로 말이다.

하지만, 장자연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에게 사법적 단죄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멈춰 버렸다. 강요·성매매 알선·성매수·강제추행 등 2009년 당시 검찰이 불기소한 성접대 당사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혐의 모두 공소시효가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오는 3월 말로 예정된 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주목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사법적 단죄가 어렵다면, 그간의 의혹을 말끔히 해소하고 가해자들에 대한 사회적 단죄와 국민적 지탄이 이뤄져야 마땅하다. 그러기 위해선 검경의 수사 축소·은폐 의혹은 물론 <조선일보>를 꼭짓점으로 한 언론·재계·법조계 등의 커넥션 등 그간의 의혹이 낱낱이 그리고 철저히 파헤쳐지고 해소돼야 할 것이다. 한없이 실추된 검찰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윤지오씨의 모습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윤지오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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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죄의식 속에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피해자가 책임감과 죄의식을 갖고 사는 현실이 한탄스러워 용기를 냈다."

윤지오씨는 처음으로 실명과 얼굴을 공개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마치 장자연씨의 심경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지난 10년간 제2의 피해자로 숨죽여 살았다는 윤씨의 이 말은 다수의 성폭력 피해자들이나 '미투 폭로'에 나선 여성들의 심경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10년이나 지나도록 의혹과 논란이 종식되지 않은 이 장자연 사건의 진상이 규명될 때, 윤씨를 비롯한 세상의 또 다른 '장자연들'이 다시금 살아갈 희망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서지현 검사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은 고 장자연씨의 10주기 기일이다.

태그:#장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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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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