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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횡령 등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6일 항소심에서 보석(보증금 등 조건을 내건 석방)으로 풀려나 서울 동부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2019.3.6
 뇌물·횡령 등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6일 항소심에서 보석(보증금 등 조건을 내건 석방)으로 풀려나 서울 동부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2019.3.6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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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태산이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 보기에 대한민국 사법부가 그러하다. 지난해 3월 22일에 수감됐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6일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정준영)에 의해 보석으로 풀려났다. 구속된 지 349일 만이다. 구속 상태로 재판받던 전직 대통령이 보석을 통해 풀려난 것은 이 전 대통령이 처음이다.

앞서 이 전 대통령은 지난 1월 29일 건강 등을 이유로 불구속 재판을 받게 해달라며 항소심 재판부에 보석을 청구했다. 당시 변호인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뇨 외에도 수면무호흡증, 기관지확장증, 식도염·위염, 탈모·피부염 등 9가지 병명을 진단받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고 재판부에 의견서를 적어냈다.

하지만 보석을 허가한 재판부는 "구치소에서도 피고인의 건강문제를 관리할 수 있다는 검찰 주장을 인정한다"며 병보석을 사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43일밖에 남지 않은 구속 만기일과 증인신문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석 허가 사유로 들었다.

재판부는 또 석방을 위해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주거·접견·통신 제한과 보증금 10억 원 납부를 붙여 이 전 대통령의 보석을 허가했다. 꽤 장황한 설명 역시 덧붙여졌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보석이 결정되자,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은 "법원이 안팎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아직은 법치가 살아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며 환영했다. 

당장 이 전 대통령의 걸음걸이부터 달라졌다. 보석 결정 직전까지만 해도 바닥을 보며 벽을 짚고 걷던 그가, 보석 허가가 결정된 이후 빠른 걸음으로 차량에 탑승했다.

빨라진 MB 걸음... '유전무죄 무전유죄' 떠올려
  
국민의 하나로서 이번 결정은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가 많다. 우선 '법 앞의 만민평등'이라는 우리 사회의 암묵적 합의가 깨졌다는 인상이다.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피의자의 자택 구금이 가능하다면, 애초에 감옥과 구속제도가 필요한 이유가 있을까. 

재판부가 보석 보증금 10억 원을 조건으로 내건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검찰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곧장 보석금을 냈다. 그런데 보증보험사에 보석금 10억 원의 1%인 천만 원만 내고, 보석보증보험을 든 뒤 그 보증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재판부가 현금 완납 대신 보증보험증권으로 대체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보증금은 피고인의 전과나 성격뿐 아니라 환경, 자산 등도 고려해 부담 가능한 수준으로 정해진다. 그렇다해도 1천만 원은 적은 금액이 아니다.

지난해 고용부는 2018년 적용되는 최저임금을 시급 7530원으로 정했다. 월급으로 환산하면, 주 40시간(유급 주휴 포함·월 209시간 기준)일 경우 157만 3770원이다. 자신의 월급 중 절반 이상을, 거의 1년간 적금해야 마련 가능한 목돈이다. 만일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시민이 이 전 대통령처럼 보석을 신청했을 때, 보증금을 감당할 여력이 있을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보석 자체의 허점은 과연 없을까. 재판부는 변호인, 배우자, 직계혈통 외에 접견 및 통신 금지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또 매주 한 차례 재판부에 일주일 동안 시간별로 활동 내역 등을 작성해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자택 구금이 실효성 없다고 지적한다. 이 전 대통령 본인이 피의 사실과 관련된 인사 또는 증인들과 직접 접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직계존속, 변호인 등을 통해 얼마든지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 전 대통령 자택을 실시간 감청하거나, 주변을 포위해 진을 치고 있지 않은 이상,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재판부는 이 전 대통령의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들었다. 그런데 이 전 대통령 측은 1심과 달리 측근들을 대거 항소심 증인으로 신청했으나 이들이 출석하지 않아 증인신문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재판 지연 전술'이라는 지적이 나오던 부분이다.

사법부는 '절대 존중'을 받아야 하는가
 
구속 349일만에 보석으로 석방된 이명박 전 대통령을 태운 승용차가 6일 오후 서울 논현동 자택으로 들어가고 있다.
▲ 보석 석방된 이명박 자택 도착 구속 349일만에 보석으로 석방된 이명박 전 대통령을 태운 승용차가 6일 오후 서울 논현동 자택으로 들어가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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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결과만 보면, 이번 보석 허가는 재판부가 이 전 대통령 측의 지연 전술을 공식 인정해준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좋지 않은 선례를 한 번 남겨두게 되면, 그다음부터 계속 이와 관련된 문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사법부와 재판부의 판단은 한 번 이루어지면 뒤집을 수 없는 불가역성 또는 절대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3심 제도'라는 제도적 장치가 있지만, 이 장치 하나를 제외하면 판사의 판결은 절대적 권위를 지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정당들은 '구속 만기까지 재판을 마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법원의 보석 허가 사유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공통 전제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였다.

우리 정치권에서 사법부의 판단은 그 자체로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지 않으면 사회 질서가 붕괴할 거라는, '미지의 두려움'이 깔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판 없는 존중이 바람직할까? 더욱이 사법농단 사태를 거치며 사법부의 신뢰도가 크게 실추된 상황에서도 사법부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것은 바람직할까? 그것은 존중이 아니다. 삼권분립도 아니다.

사법부가 진정으로 사회의 존중을 받으려면, 사회가 사법부를 존중할 만한 토대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 그런 토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단적으로 일반 국민은 판사들이 어떤 합의와 과정을 거쳐 판결하는지 알 수 없다. 이번 보석 허가 역시 마찬가지다. 대체 판사가 어떤 사고와 의도, 협의와 과정을 거쳐 이 같은 판단을 했는지, 재판장의 '공식 설명'을 제외하면 알 수 없다. 

무의미한 토론, '촛불혁명' 이후엔 멈추자

어쩌면 이 불투명한 과정이 바로 사법부의 '절대 권위성'을 뒷받침하는지 원천일지 모른다. 결론만 두고 이뤄지는 비평과 토론은 효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사법부의 판단을 두고 '무의미한 토론'만 할 수 있는 권한뿐이다.

무엇보다 판사도 사람이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욕망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사법농단 사태에서 판사 역시 승진과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로 인해 판단이 왜곡될 수 있음을 목격했다.

그런 판사들에게, 소수 엘리트의 결정에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의존해온 것 아닌가. 결국 사법농단은 엘리트에게 일체를 위임해온 한국 사회의 관습과 사고, 구조가 만들어낸 사태다.

이제 대한민국 사법부는 사법의 민주화, 사법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당장 3부 중 행정부·입법부만 하더라도 행정부의 수장과 국회의원은 국민에게서 선출되는 과정을 거쳐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어 있다. 물론 선거 역시 민주주의를 완벽하게 반영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국민의 의사를 그런 식으로나마 반영하려는 장치는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유독 사법부는 국민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통로가 부재하다. 이러한 현행 시스템이 전직 대통령, 재벌 총수 같은 한국 사회 상류층들에게 오히려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되돌아봐야 할 때다.

더는 판사에게만 전부 맡길 수 없다. 법관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되, 어떤 판결이 판사 개인의 욕망으로 왜곡되지 않도록 견제·감시를 가능케 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판결문 공개는 물론 범죄 사실이 사회 전반에 끼치는 피해가 막대한 사건이나 전·현직 고위 공직자, 재벌 총수, 유력 언론사 사주가 재판을 받을 경우, 국민참여재판을 의무 적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2년 전, 우리는 촛불을 들었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촛불혁명 이후의 시대는 달라야 한다. 그 달라진 시대의 완성은 사법의 민주화다.

태그:#이명박 보석 허가, #재판장 정준영, #3권 분립, #사법 민주주의,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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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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