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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잔디광장에서 열린 기념식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잔디광장에서 열린 기념식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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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기념식 및 재현행사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다채롭게 거행됐다. 전북 군산에서도 기념식을 비롯해 평화시민대행진, 독립만세운동 재현 퍼포먼스, 역사사진전시회, 백일장, 미술대회, 연극공연 등이 열렸다. 이번 기념식은 지난해 6월 개관한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에서 개최되어 의미를 더했다.

거국적으로 저항했던 기미년 삼일독립만세운동. 군산 지역은 그해(1919) 3월 5일 처음 봉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 만세 시위는 서래장날(6일) 궐기하기로 계획됐으나 주모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바람에 하루 전날(5일) 시위에 들어가 '설애장터 만세운동(서래장터 만세운동)' 혹은 '3·5만세운동'으로 불린다.
 
눈 덮인 군산 월명공원 삼일운동 기념비와 만세상
 눈 덮인 군산 월명공원 삼일운동 기념비와 만세상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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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3·1운동은 1919년 3월 6일 설애 장날을 기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 그리고 예수병원(구암병원) 직원들이 주동이 되어 벌였다. (아래 줄임)"
 

위는 1986년 12월 당시 행정당국의 보조금과 군산시민, 학생들의 성금으로 월명공원에 세워진 '삼일운동기념비/만세상' 안내문이다.

안내문은 "이날 시위에서는 그 전날까지 영명학교 숙직실에서 밤을 지새며 만든 선언문 3천5백 장과 태극기 5백 장을 나누어 들고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이 밖에 군산 보통학교 수백 명이 합세, 애국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500명으로 늘어 독립만세 소리는 시 전역에 메아리쳤으며, 30일 밤에는 시민 1천여 명이 횃불 시위를 벌여 일본 관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적고 있다.

이어 안내문은 "31일에는 투옥된 애국자들의 공판 중인 법원 군산지원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는 등 독립운동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나라를 찾고 자존과 자주, 자립, 자유와 평화를 누리려는 최선의 길이요, 방법이었으며 마땅하고 엄숙한 주장이었다"고 덧붙인다.

군산 3·5만세운동은 한강 이남 최초 3·1운동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그런지 군산에는 3·1운동 관련 기념관, 기념탑, 기념비, 동상 등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현충시설인 기념관을 비롯한 여러 안내판 역시 월명공원 삼일운동기념비 및 3·1운동 기념관 안내문과 같은 내용으로 군산의 3·1만세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군산 외곽 주민들도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
 
전북지역 삼일운동 전개 상황
 전북지역 삼일운동 전개 상황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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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지역 독립운동사>(1994) 통계에 따르면 군산(옥구 포함) 지역의 기미 만세운동은 2개월 동안 총 28회에 걸쳐 이어졌다. 만세 시위에 참여한 학생 및 시민은 연인원 3만 명이 넘었으며, 피해자는 모두 195명(사망 53명, 실종 72명)으로 순국자도 전북에서 가장 많았다.

군산의 3·1운동은 외곽인 옥구, 대야(지경), 임피 등지에서도 일어났다. 대야에서는 이 지역 출신 노춘만(盧春滿) 지사가 천도교 교인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4월 17일 대구 복심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물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대야는 군산지역 천도교 중심지였다. 1893년 장경화(張景化)가 대접주로 활약하였고 이듬해(1894) 허공집(許公執) 김현창(金賢彰) 등이 천도교(동학)에 입교하여 두목(頭目)이 되었다. 그 외 많은 주민이 입교하여 교세 확장에 나섰다. 1904년 갑진개화운동 때도 많은 교도가 참가했으며, 1917년 지경리 우덕실(우덕마을)에 천도교 옥구지구가 설치되고, 노춘만 강문주(姜文周) 등이 입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97년 군산문화원이 발행한 <日帝下 群山·沃溝地域의 民族·社會運動史:일제하 군산·옥구지역의 민족·사회운동사>에 따르면 3월 4일 임피 장터에서 읍내가 들썩할 정도로 큰 시위가 있었다. 옥구 주민들은 일제가 조선 강제병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일한병합기념비'에 쇠똥을 바르고 길바닥에 '독립만세'를 크게 새기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하였다.

사태가 이쯤 되자 일본 경찰은 경무부에 급히 알리고 이리 헌병 분대와 전주경찰서에 응원을 요청하였다. 동시에 재향군인회 2백여 명과 소방대를 소집하여 철야 경비를 서게 하였다. 또 기독교, 천도교 신도들 집을 수색하는가 하면, 조선 학생이나 시민이 무리지어 시내를 돌아다니기만 해도 검거하여 심문하는 등 엄중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전북 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 1919년 그해에도 수많은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군산·옥구 지역은 2월 하순부터 준비하여 주도적으로 운동을 전개했으며 타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그중 3·5만세운동, 군산공립보통학교 방화사건, 임피장터 만세 시위는 규모나 파급 효과 면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3·1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임피 시장 만세시위'
 
군산 구암동산에 조성된 ‘한강이남 최초 3·1운동 발상지’ 상징탑
 군산 구암동산에 조성된 ‘한강이남 최초 3·1운동 발상지’ 상징탑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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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일제하 군산·옥구지역의 민족·사회운동사> 제2부의 '임피시장(임피장터) 만세시위' 대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전북 지역 3·1운동은 3월 3일 독립선언서가 일반인에게 돌려지면서 시작됐다. 이는 2월 28일 서울 보성사에서 인쇄된 선언서 2천 장을 간사인 인종익(印宗益)이 가지고 내려와 이리에서 이중달(李仲達)에게 일부를 전하고 나머지는 천도교 조직망을 통해 전주, 김제, 이리, 금마, 용안, 여산, 함열 등의 지방으로 나눠줬다.

한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金炳洙)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장을 건네받아 군산으로 내려와 영명학교 은사인 이두열, 박연세, 김수영, 고석주, 김윤실 등을 만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천 500장을 더 인쇄해서 기독교 신자들에게 돌렸다.

그리하여 3월 4일 옥구(임피), 3월 5일 군산, 3월 6일 김제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어 도내에 일제히 파급되었다. 임피읍내(임피장터) 제1차 만세 시위는 주민과 주동자 숫자가 적어 큰 규모로 발전할 수 없었지만, 읍내가 들썩할 정도의 운동이었다.

임피장터 만세 시위는 진장권(陳壯權), 황봉규(黃琫奎) 김홍열(金洪烈) 김석종(金錫宗), 최한례(崔翰澧) 등 다섯 사람이 주도하였다. 당시 진장권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었고, 김홍열은 천도교 대표인 손병희 선생의 지명을 받아 2월 28일 독립선언문 3000매를 평안도에 전달하는 중책을 완수하고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다섯 사람은 태극기와 선언문을 가지고 김석종 집에 집결하여 29일 정오를 기해 의거할 준비를 하다가 정보가 누설되어 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들이 끌려가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동참했다. 당황한 일본 경찰은 공중에 총을 난사하고 그들을 구타하여 꼼짝 못 하게 하였다.

사전 연락을 받고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대기하고 있던 청년들은 일시 흩어졌지만, 재집결하여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때 장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합세, 한 덩어리가 되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다섯 사람은 임피에서 군산경찰서로 이송되었고, 심한 고문에 시달린 후 기소되었다.

그해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서 진장권은 징역 1년, 김홍열, 김석종은 징역 8개월, 황봉규, 최한례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는다. 그들은 항소하여 6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진장권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나머지 네 명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만약 김홍열의 독립선언문 전달 사실이 탄로 났더라면 중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다섯 사람 중 진장권, 김홍열은 1990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애국장을 받았다.
 
군산 구암동산 앞 거리에서 열린 3·5만세 재현행사
 군산 구암동산 앞 거리에서 열린 3·5만세 재현행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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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3·1만세운동 , #군산 3·5만세운동, #설애장터 만세운동, #군산 영명학교, #군산 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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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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