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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역사가 도다 이쿠코 관동갤러리 관장이 28일 슬라이드에 비친 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이 사진은 도다 관장이 중국 당안국 창고에서 발굴한 기록물이다.
 일제강점기 역사가 도다 이쿠코 관동갤러리 관장이 28일 슬라이드에 비친 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이 사진은 도다 관장이 중국 당안국 창고에서 발굴한 기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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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이 찾아가 보라고 쪽지에 이름들을 적어줬어요. 여기서 누구를 찾아라. 그렇게 어떤 할아버지를 찾아갔는데, 너무 놀라는 겁니다.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찾아오니까. '아 실은 그게 아니라... 연변대에서 역사 공부하는 일본 학생이다'라고 해도, 할아버지는 내가 한국 사람인 줄 알고 하소연을 시작했어요.

독립운동을 직접 하신 분이었습니다. 정말 못 사는 집이었어요. 신발도 달랑 하나 밖에 없고 그마저도 천으로 된 것이었는데 구멍 숭숭 나 있고. 손님이 왔다고 방석을 내줬는데, 앉으라고 방석을 두드리니 먼지가 막 나고... 그리 살더라고요.  자식한테도 하지 못하는 말을, 한문으로 써서 벽지처럼 사방에 붙여뒀더랬습니다. 충격적이었어요."


한중수교 전인 1989년, 전화도 없는 중국 연변의 외딴 시골 마을. 박창욱 연변대 역사학부 교수가 써준 소개서를 들고 조선족 항일 운동가 인터뷰에 나선 일본인 유학생 도다 이쿠코는 '한국말을 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반기던 노쇠한 항일 운동가의 얼굴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했다. 조선혁명군 소속 사령 비서를 지낸 박윤골 선생.

분단과 함께 이념으로 단절된 항일 역사. 그가 지금까지 남편 류은규 사진가와 함께 하얼빈과 연변 각지에서 수집하고 기록한 것은 한국도 외면한 항일 운동의 역사였다. 지난 2월 27일 인천 아트플랫폼 전시장에서 3.1절 100주년 기념 사진전의 기획자로 인터뷰에 응한 그가 풀어낸 이야기는 마냥 간단치 않았다.

모든 게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 이후 심문을 받던 당시 찍은 사진. 의거 당시의 의복을 그대로 갖춰 입고 있다. 이 사진은 도다 관장이 중국 당안국 창고에서 발굴한 기록물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 이후 심문을 받던 당시 찍은 사진. 의거 당시의 의복을 그대로 갖춰 입고 있다. 이 사진은 도다 관장이 중국 당안국 창고에서 발굴한 기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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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일제의 악행'에 관한 이야기를 듣거나 '쪽발이' '왜놈'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바늘 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가해자인 일본의 모습'을 접할 때마다 한국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 도다 이쿠코 <한 이불속의 두 나라 5p.>

일본 아이치 현에서 태어난 역사가 도다 이쿠코 관동갤러리 관장은 일본사를 전공하다가 1979년 한일 학생 교류로 처음 한국을 찾았다.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생각해?" 한국 학생들이 자신을 만날 때마다 던지는 질문에 도다는 되물었다. "그게 뭔데?" 이토 히로부미를 영웅으로 알았던 그가 처음 일제강점기 역사를 접한 계기였다. "너무 창피했다"고 떠올릴 만큼 그 순간의 충격은 컸다.

"왜 나는 몰랐을까"라는 궁금증이 발길을 붙잡았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강만길 교수가 있는 고려대 사학과로 편입했다. 일본인이 한국 근현대사를 학습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시절. 늘 혼자 점심을 먹고 수군거림을 견뎌야 했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면 주변에서 친일파 소리를 듣는다"는 수군거림도 들었다. 그는 88올림픽 통역과 <아사히신문> 칼럼니스트를 학업과 병행하면서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89년 3월에 하얼빈으로 갔어요.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의거한 곳이기도 하잖아요. 근데 마침 그 때 천안문사태가 일어난 겁니다. 학교 수업도 없어지고 학생들도 다 내쫓았어요. 중국말도 못하는데... 한국말이 통하는 곳이 어딜까 생각하다가 조선족이 생각났어요. 연변으로 가자. 야간 기차를 타고 무작정 갔습니다. 학교마다 학생들을 재워주던 초대소라는 곳이 있어요. 연변대 역사계(학부)를 찾아가 조선말로 '저는 일본에서 왔는데 조선족 역사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더니 '내가 가르쳐 줄게!'라고 누군가 답하셨어요. 박창욱 교수였습니다. 한 달 동안 혼자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김좌진 장군 딸이 "한국에 못 간다"고 한 이유
 
 1994년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만난 김좌진 장군의 딸 김산조 선생(왼쪽에서 두번째).
 1994년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만난 김좌진 장군의 딸 김산조 선생(왼쪽에서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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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 관장은 학교 자전거를 빌려 박 교수가 '만나 보라'고 알려준 쪽지를 들고 한 달 동안 조선족 마을을 취재했다. 호기심에 시작한 공부가 평생의 일이 된 것은 이 때 만난 '숨은 영웅'들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일본에서도 배우지 못하고, 한국에서도 기록되지 못한 흔적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항일운동사는 분단 이후 이념적 기준에 의해 기록된 반쪽짜리 역사였다. 중국에 남은 항일운동가의 후손들이 이를 증명했다.

1994년 흑룡강성 목단강시. 김좌진 장군의 5번째 부인의 딸 김산조 선생을 만난 날, '왜 한국에 가지 않느냐' 질문을 하자 "우리 아버지를 죽인 친일파 정권이 아니냐, 박정희가 만주에서 어떤 일을 했나. 그런 사람이 세운 정권이면 친일파 정권이 아니냐. 그런 나라에 가면 그놈들이 나를 죽이지 않겠나"라는 답이 돌아왔다. 도다 관장은 "김산조 선생뿐 아니라, 수많은 조선족이 '박정희는 친일파'라고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1994년 흑룡강성 상지시에서 만난 김규식 장군의 딸 김현태 할머니.
 1994년 흑룡강성 상지시에서 만난 김규식 장군의 딸 김현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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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이후 조선인들은 일본의 간도 대토벌을 피해 러시아 국경지대로 갔습니다. 홍범도 장군도 마찬가지였어요. 강만 건너면 소련 땅. 연해주로 간 조선인들은 일찍이 공산주의 사상을 배웠습니다. 이쪽은 민족주의, 저쪽은 공산주의. 거기서 또 전투가 일어났지요. 그렇게 죽은 이들도 다 영웅입니다. 다 항일을 목적으로 한 사람들이었는데, 아까운 목숨들을 잃었습니다. 역사책에선 잘 안 나오는 이야기죠."

"한국에선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대해 연구나 교류가 없었어요. 조선의용군 연구도 부족했고. 중국에서도 소수민족의 역사는 굉장히 민감한 부분이었습니다. '역사는 정치(에 좌우된다)'라는 박 교수의 말을 절감했어요."


조선족으로 남은 항일 운동가들은 일제강점기부터 분단, 문화대혁명 등 굵직한 격동기를 거치며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영웅이 아닌 '조선 간첩' '일본 간첩' '소련 간첩' 등으로 낙인이 찍혔다.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공산당을 위한 항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문 당하거나 숙청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항일이라는 같은 목적 아래서도 국적, 이념적 차이로 박해를 당한 것이다.

조선혁명군을 이끈 양세봉 장군의 비서였던 김재산 선생이 그 당사자다. 통신원으로 양 장군을 보필하던 그는 해방 이후 '조선 특무(간첩)'로 찍혀 고문을 당해 평생 소화기관 장애를 겪었다. 15살부터 항일 유격대원으로 활약했고, 중국 공산당원으로 인정받았던 항일 투사 리민 흑룡강성위원회 전 부주석도 문화대혁명의 화를 피하진 못했다.
 
 1995년 요녕성 심양시에서 만난 조선혁명군 양세봉 장군의 비서 김재산 선생.
 1995년 요녕성 심양시에서 만난 조선혁명군 양세봉 장군의 비서 김재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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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흑룡강성 하얼빈시에서 만난 리민 전 중국인민정부 흑룡강서위원회 부주석.
 1995년 흑룡강성 하얼빈시에서 만난 리민 전 중국인민정부 흑룡강서위원회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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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영웅과 삭제된 영웅

항일운동 기록 자체가 중국 공산당 중심으로 관리돼 온 터라, 조선인과 조선족의 항일 기록은 창고 속 짐으로 묻혀 있기 마련이었다. 도다 관장은 당안국(기록보관소) 창고 한편에 쌓여 있던 자료를 뒤지다 여순감옥으로 가기 직전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발굴했다. 의거 당시 입은 옷 그대로 쇠사슬에 결박 된 모습이었다.

당시 일제가 기밀자료로 남긴 기록이었다. 발표 당시 독립기념관에서 찾아와 연구에 도움을 보태기도 했다. 안 의사가 심문을 당했던 당시 일본 영사관 지하 유치장은 여관으로 변해 있었다. 도다 관장은 남편 류은규 작가와 함께 그곳을 기록으로 남겼다. 지금은 사라진 곳이다. 그렇게 20년 간 기록하고 수집한 자료는 5만여 장에 달한다.

도다 관장은 인터뷰 내내 "역사는 정치다"라는 말을 강조했다. 정치적 이유로 흑과 백이 나뉘고 평가 받아야 마땅한 이들이 기억되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김원봉 의열단장의 독립유공자 지정 여부를 놓고 시끌시끌했던 최근 논란에 대해서도 "친일의 전통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봤다. 정치적 이유로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역사가 항일에 대한 평가까지 퇴색시키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20년간 만주 지역 항일운동사를 수집하고 기록한 류준규 사진작가와 도다 이쿠코 관동갤러리 관장
 20년간 만주 지역 항일운동사를 수집하고 기록한 류은규 사진작가와 도다 이쿠코 관동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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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급속도로 경색되고 있는 한일 문제 또한 정치적 맥락에서 분석했다. 그는 "정부가 뭐라고 하든, 서로 만나 물어보고 이해하면 된다. 아베 정부는 정부 발표를 100% 믿고 '한국 사람은 나쁘니 드라마도 보지 말라'고 하는데, 웃기는 이야기다"라면서 "일본이 과거나 지금이나 그렇게 반성하고 살고 있느냐"라고 되물었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정부 차원의 행사가 쏟아지는 이때, 도다 관장은 최대한 정치적 의미보다는 '사람들이 무엇을 알고 싶은지'를 기준으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다 관장은 지금까지 가장 뿌듯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박창욱 교수가 말년 작업으로 무명 열사의 기념비를 연변대 안에 세웠던 일을 언급했다. "정말 기뻤다"는 말 끝에 그는 울먹였다. "똑같이 서대문 형무소에 잡혀 있었어도"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두 사람의 이름만 기억되는 역사를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가 100년의 세월이 지난 2019년, 지금까지 외면 당한 숨은 영웅의 흔적을 쫓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천 중구 아트플랫폼에서 2월 28일부터 내달 31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의 이름은 '잊혀진 흔적'이다. 원래 원했던 제목은 '100년 민들레'. 민들레는 조선족을 뜻하는 말로, 일제강점기 흩어진 이주의 역사를 뜻한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또 다른 항일 역사가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번 전시에선 그간 공개되지 못했던 조선의용군의 사진도 등장한다.

"소개하지 못한 자료가 더 많습니다. 조금이라도 공개할 자리가 생겨 기쁩니다. 가지고만 있어서야 되나요. 공개해서 보여줘야지요. 그래야 새로운 발견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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