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침마다 일어날 때 좀 놀라. 하루가 다르다는 게 이런 거구나."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아빠를 위해 시간을 돌린 대가로 한순간에 늙어버린 '혜자(김혜자 분)'는 70대 할머니의 삶이 낯설다. 뛰어가면 금방이었던 거리도 조금만 걸으면 숨이 차고, 방금 했던 얘기도 돌아서면 까먹기 일쑤다. 하나씩 고장 나는 몸처럼 마음도 나이를 먹는 것인지, 스물다섯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이었던 '꿈'도 더 이상 얘기하지 않는다. 혜자는 "나도 좀 더 차례차례로 늙었으면 받아들이는 게 쉬웠을까" 생각하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나이듦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기란 영 어색하고 두려운 법이다.
 
그런 혜자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면, 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2리에 사는 일곱 명의 사랑스러운 '가시나들'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으며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살아낸 이들은 과거가 현재의 삶을 지배하도록 결코 내버려 두지 않는다. '가시나'(여자 아이의 방언)라는 이유로 평생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던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다.
 
할머니들이 서툰 글씨로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글은 한 편의 '시'가 되었고, 이제는 그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세상에 나왔다. 시에 인생을 담아낸 이 80대 여성들은 그렇게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자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관객들을 만난다. 지난 27일 개봉한 영화 <칠곡 가시나들>은 1930년대생 여자들의 오롯한 자기 서사이면서 가부장적 세상에 던지는 가장 유쾌하고 호탕한 방식의 반란이다.
  
"오지게 재미있게" 나이든다는 것
 
 영화 <칠곡 가시나들> 스틸컷

영화 <칠곡 가시나들> 스틸컷 ⓒ 단유필름

 
카메라는 시골 할머니들의 평범한 일상을 따라간다. 마을회관에 모여 도란도란 음식을 나눠먹는다거나 빨래를 끝내고 빨래터에서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고, 동네 노래자랑 예선전에 나가는 할머니를 응원하기 위해 모두가 총출동하기도 한다. 아주 특별하거나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별로일 것도 없는 하루하루다.
 
박금분 할머니는 이런 심정을 '내 마음'이라는 시에 담았다. 맞춤법은 좀 틀릴지언정 생생한 사투리와 솔직한 표현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빨리 죽어야 데는데/십게 죽지도 아나고 참 죽겐네/
몸이 아푸마/ 빨리 주거야지 시프고/
재매끼 놀 때는/좀 사라야지 시푸다/
내 마음이 이래/와따가따 한다"
- 박금분, '내 마음'

 
할머니들의 일상에 활력을 보태는 또 하나의 요소는 '한글 수업'이다. 받아쓰기를 할 때면 '포도'를 '표도'나 '보도'로 잘못 쓰기도 하고, 없는 글자를 새롭게 지어내기도 하지만 배우는 즐거움에 수업 시간엔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글자를 아니까 사는 기 재미지다"는 할머니들은 시내에 나가서도 물건보다 간판 구경하느라 바쁘다.
 
이들이 한글을 배운다는 것은 단지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다는 차원을 넘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글'로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할머니들은 지난 사랑에 대한 추억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썼다. 생애 처음으로 자식에게 편지를 쓰고, 글자를 모르는 게 부끄러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쳤다. 그렇게 한글을 배우면서 80대에 이르러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있다.
  
노년의 삶을 바라보는 유쾌한 시선
 
 영화 <칠곡 가시나들> 스틸컷

영화 <칠곡 가시나들> 스틸컷 ⓒ 단유필름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밝은 시선을 유지하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흔히 봐 왔던 전형적인 '노인'의 이미지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가난하고 못 배웠던 지난 시절에 대한 후회나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평범하지만 재밌는 '지금'에 집중하는 것이다. 덕분에 대단한 에피소드나 의도된 설정 없이도 영화는 100분 내내 웬만한 코미디 못지않은 재미를 준다. 할머니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웃음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웃음 너머에서 당연하지만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칠곡 할머니들은 쓸쓸하고 외롭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재의 삶을 즐겁게 살고 싶은 욕망과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서 오는 설렘이 있는,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존재였다는 것.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전국에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상영관이 얼마 없다는 점이다. CGV와 메가박스가 극히 적은 수의 상영관을, 그마저도 퐁당퐁당식으로 배정하자 김재환 감독은 보이콧을 결정했다. 현재 롯데시네마와 몇몇 일반극장에서만 영화를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저예산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이유로 관객들에게 선보일 기회조차 없어졌다는 점은 안타깝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상영관을 찾아 '칠곡 가시나들'을 꼭 만나길 바란다. 우리의 미래이기도 한 이들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나이를 먹는다는 게 그리 두려운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콘텐츠 리뷰 미디어 <치키>(http://cheeky.co.kr/2809)에도 실렸습니다.
칠곡가시나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세상의 변화는 우리네 일상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 파도 앞에서 조개를 줍는 사람.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