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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 산텔모 벼룩시장에서 만난 마푸체족 민속품 상인 나후엘 팜 Nahuel Pam 씨. 아르헨티나가 유럽 백인 이민자의 나라로 만들어지는 동안, 안데스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아마존과 파타고니아 지역 원주민들도 급격히 사라져갔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텔모 벼룩시장에서 만난 마푸체족 민속품 상인 나후엘 팜 Nahuel Pam 씨. 아르헨티나가 유럽 백인 이민자의 나라로 만들어지는 동안, 안데스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아마존과 파타고니아 지역 원주민들도 급격히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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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광산의 배수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남부는 칠레 남부 파타고니아 보다 더욱 거대하고 황량하다. 위성지도로 언뜻 보아도 초록색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아서 최남단 우수아이아로부터 대륙을 가로질러 올라가는 버스나 기차가 없다. 이미 지나온 파타고니아의 관광지들을 다시 거쳐 북쪽으로 가는 방법 뿐이라, 하는 수 없이 비행기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동했다.

여행은 다양한 첫경험,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해준다. 지구의 남반구에서 맞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도 나에게는 평생 처음이었다. 파타고니아의 거센 바람 속에서 야영을 하고 식빵을 먹으며 연말연시를 지내기는 싫었다. '남미의 문화 수도' 라고 불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저가 항공들은 대부분 늦은 밤 공항에 도착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숙소를 구하기도 애매한 시간. 그런 날엔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공항 한구석에서 잠을 잔다. 지붕 없는 낯선 곳에서의 야영 보다는 안전한 편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온도도 자기에 적당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 곳곳에도 담요나 침낭을 덮고 자는 여행자와 홈리스들이 많았다.

대여섯 시간 푹 자고 일어나 창 밖을 보니, 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강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흐르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라플라타강이었다. '은의 강', 리오 데 라 플라타. 스페인 식민지 시절, 이 강은 볼리비아 포토시 광산에서 채굴한 은을 유럽으로 빼가던 배수로였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서의 노숙. <겨울왕국> 공주들이 그려진 담요를 덮고 자는 사람 옆자리에 매트와 침낭을 펼쳤다. 아침에 눈을 뜨자 창 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라플라타강이 보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서의 노숙. <겨울왕국> 공주들이 그려진 담요를 덮고 자는 사람 옆자리에 매트와 침낭을 펼쳤다. 아침에 눈을 뜨자 창 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라플라타강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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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거대한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총독부를, 곧이어 대규모 부왕령을 설치했다. 1492년 대륙 발견 이후, 1535년 설립된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은 멕시코, 중미, 카리브 지역을, 1542년 설립된 페루 부왕령은 남미 대부분 지역을 통치했다. 1776년 지금의 아르헨티나 지역에 리오 데 라플라타 부왕령이 설립됐다.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며 바꾼 이름, '아르헨티나' 역시 라틴어로 '은' 을 의미한다. 대륙의 이름 '아메리카' 를 비롯해, 아메리카 각지의 주요 지명은 식민주의의 지배와 구획에 의해 이름붙여졌다.

아르헨티나가 유럽 백인 이민자의 나라로 만들어지는 동안, 페루 안데스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아마존과 파타고니아 지역 원주민들도 착취당하고, 죽고, 사라져갔다.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는 동안, 과거 이 땅에 살았던 원주민 과라니족, 마푸체족, 떼우엘체족은 거의 만날 수 없었다. 관광지의 서점과 기념품 가게에서 사라진 그들의 흔적이 판매되고 있을 뿐이었다. 현재 약 4300만 명인 아르헨티나의 인구 중, 남은 원주민은 1.6 퍼센트, 60만 명정도라고 한다.
 
?파타고니아에 살던 원주민들은 이제 관광지의 사진과 기념품으로만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다.
 ?파타고니아에 살던 원주민들은 이제 관광지의 사진과 기념품으로만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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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파리'와 '동양의 나폴리'

침략과 착취를 바탕으로 성장한 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남미의 파리', '남미의 문화 수도'로 칭송된다. 유럽은 식민의 역사를 거치며 '문명'의 표준이 되었으므로, 파리를 '유럽의 쿠스코' 라고 하거나, '동양의 나폴리, 통영' 을 뒤집어 '서양의 통영, 나폴리' 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파리 보다 아름다운 도시나, 나폴리 보다 아름다운 바다가 셀 수 없이 많다. 저마다 다르게 느끼는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지만, 제2세계, 제3세계, 저개발국가들에게, 부유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유럽과 유럽 문명은 그렇게라도 쫓아가고 싶은 것이었나보다.

폭압의 역사는 아프지만, 오랜 세월 도시와 사람들 속에서 자라나고 회자되는 그 '문화' 라는 것은, 인류와 사회와 지구에게 이로운 것일까. 다인종, 다문화의 땅. 이주와 혼혈과 융합의 땅 라틴아메리카. 그러나 특히 더 많은 원주민이 희생되고 사라진 아르헨티나에서, 다시금 다인종, 다문화의 공존과 평화를 기원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역사를 돌아보고 비판하기보다 먼저, 나의 작은 삶, 하루 하루의 일상에서부터 차별과 폭력을 늘 경계하고 조심하자고 거듭 되뇌며 다짐했다. 나의 기도는 아무런 힘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도와 함께하는 다짐은 나의 삶과 행동에 한 줄기의 힘이 될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 곳곳에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벽화가 많다. 위 사진의 벽화에는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독재 정권을 상징하는 콘도르에 반대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모습과 'Nunca mas olvidamos 절대 망각하지 말자' 는 문장이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 곳곳에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벽화가 많다. 위 사진의 벽화에는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독재 정권을 상징하는 콘도르에 반대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모습과 "Nunca mas olvidamos 절대 망각하지 말자" 는 문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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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의 새해맞이

추운 파타고니아에서 순식간에 무더운 곳으로 이동해서인지, 며칠 동안 몸이 무겁고 머리가 아팠다. 장기간 여행 중에 갑작스런 고도 변화나 기온 변화로 아픈 것은, 천천히 쉬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라는 몸의 신호인 것 같다. 그래서 아픔은, 여행의 과정이기도 하다. 여행 100일째에 불현듯 찾아왔던 대상포진을 기억하며, 아플 땐 하염없이 쉬면서 몸을 돌본다.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장 저렴한 숙소는 280페소(한화 8000원). 널찍한 12인실 도미토리는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고 조용한 편이었다. 늦잠과 낮잠을 자고, 끼니마다 요리를 해먹고, 멍하니 한국 드라마와 연예방송을 보며 며칠을 보냈다.

아파서인지, 처음 걷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골목들이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새로운 장소에서 매일 새로운 길을 걸어도 그게 전혀 새롭게 느껴지지 않고 재미도 없는, 여행의 시간들이 있다. 가족도 친구도 만날 수 없는 외로운 여행자의 연말연시이기에 조금 우울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12월 31일 밤에는 호스텔 직원들이 친구들과 마련한 옥상 파티에 초대받아, 술과 음식을 함께 먹으며 들뜬 분위기로 2019년 새해를 맞았다. "펠리즈 아뇨 누에보! Feliz año nuevo!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베트남, 일본, 콜롬비아, 브라질 여행자들, 처음 만난 아르헨티나 친구들과 서로의 행복을 기원했다. 한 명 한 명 돌아가며 와락 와락, 어색하지만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 스쳐가는 여행자들에게 아낌없이 기쁨을 나누어준 호스텔 직원들과 친구들에게 고마웠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저가 호스텔에서의 새해맞이. 베트남, 일본, 콜롬비아, 브라질 여행자들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 저가 호스텔에서의 새해맞이. 베트남, 일본, 콜롬비아, 브라질 여행자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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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를 만나는 비용

독특한 대자연, 다양한 문화유산과 함께, 세계인을 라틴아메리카로 이끄는 또 하나의 매력은 음악이다. 쿠바의 룸바와 맘보, 멕시코의 마리아치 악단, 브라질의 삼바와 보사노바,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탱고.

여러 책과 미디어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정열적이고 일상적으로 음악을 즐긴다고 소개했다. 여행을 하면서 그 음악들을 마주할 수 있어서 행복했지만, 상상했던 것만큼 그 기회가 많은 것은 아니어서 아쉽기도 했다. 그저 좋아서 음악을 즐기는 현지인을 만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대부분의 라틴음악은 주로 이름난 관광지의 공연장과 식당에서 직업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되고 공연되고 있었기에, 입장료나 음식값, 팁 등의 음악 소비 비용이 필요했다. 나는 주머니가 가벼운 장기여행자라서, 자주, 오래 라틴음악을 즐기기에는 부담이 따랐다.

탱고의 발상지, 시민들이 저녁마다 광장에 모여 탱고를 출 것만 같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거리의 탱고를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세계 최대 벼룩시장이 열리는 산텔모 지구의 도레고 광장, 알록달록 화려하게 색칠된 라보카 항구의 카미니토 거리에서, 그나마 탱고의 명성을 조금씩 확인할 수 있었다. 탱고를 대표하는 악기인 반도네온의 처연한 선율을 듣고 역동적인 춤을 보며 숨막히는 긴장감을 느꼈다.

레스토랑과 중앙광장에서 정식 공연이 펼쳐지는 한편, 탱고 복장을 멋지게 차려입고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는 일로 돈을 버는 거리의 댄서들이 있었다. 길에서 즉석으로 탱고를 가르쳐주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아쉽게도 그런 모습은 마주치지 못했다.

"쉘 위 댄스? 저와 춤추시겠어요? 저와 탱고 사진을 찍으시겠어요?" 수많은 관광객들 중에 댄서와 함께 사진을 찍고 돈을 지불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분주한 길목에 서서 몇 시간씩, 매일 매일 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하는 댄서들의 모습이 조금은 슬퍼 보였다. 가난한 예술가들의 삶은 세계 어느 곳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텔모 지구 도레고 광장의 탱고 거리 공연
 산텔모 지구 도레고 광장의 탱고 거리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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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장 어머니회의 목요집회

이과수로 가는 일정을 며칠 미루고 5월 광장 어머니회의 목요집회에 참여했다. 5월 광장 어머니회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지속된 군사정부에 의해 실종된 사람들의 어머니들이 만든 모임이다. 1977년 4월 13일, 열네 명의 어머니들이 대통령궁 앞 5월 광장에 모여, 하얀 머릿수건을 두르고 묵묵히 원을 그리며 걷는 침묵 시위를 시작했다. 이후 41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은 매주 이곳에 모여, 결코 잊을 수 없는 자녀들을 "산 채로 돌려달라" 고 외친다.
 
5월 광장 어머니회의 목요집회
 5월 광장 어머니회의 목요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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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장 어머니회의 목요집회
 5월 광장 어머니회의 목요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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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대부분 나라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그 독립은 전체 민중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 후손들인 크리오요, 군벌세력인 카우디요가 새로운 권력층이 되었고 원주민들에 대한 약탈은 식민지 때보다 더 심해진 곳이 많았다.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멕시코 영토의 절반을 빼앗았고,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필리핀과 괌을 차지했다. 스페인이 떠난 라틴아메리카에는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고, 새로운 강대국 미국의 영향역이 커져갔다.

식민지 시대는 저물어갔지만, 식민지를 가졌던 나라들, 소위 '선진국' 들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독립국들은 '저개발국'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었다. 대부분의 저개발국가에서, 절대적인 과제가 된 '개발' 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군부 독재가 벌어졌다.

냉전 시기인 1975년, 남미 전역을 아우르는 첩보 작전인 '콘도르 작전' 이 시행된다. 인구의 다수가 백인인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를 중심으로 브라질, 파라과이, 페루, 에콰도르까지 연관된 작전으로, 각국 정부 공작원들에 의해 암살과 탄압이 벌어졌다. 미국의 협조와 승인이 있었다고 알려졌으며, 남미에 반공, 친미 정권을 수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3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무너지면서 콘도르 작전은 끝을 맺는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 시기를 '더러운 전쟁 Guerra Sucia' 이라고 부른다. 실종되거나 살해된 사람은 3만 명으로 추정된다.

냉전과 이념 대립, 독재 정권은 세계 곳곳에 깊은 상흔을 남겼고 그 아픔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집회의 행렬에는,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어머니회 회원들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청년들이 많았다. 그들과 함께 나도 한 걸음 한 걸음 뒤따라 걸으며,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생각했다.
 
목요집회에 참가한 여행자들. 이탈리아 여행자 마르타 카지토 Marta Cazzato 씨와 브라질 여행자 자이르 수비야가 Jair Icaro Zubillaga 씨
 목요집회에 참가한 여행자들. 이탈리아 여행자 마르타 카지토 Marta Cazzato 씨와 브라질 여행자 자이르 수비야가 Jair Icaro Zubillaga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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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모이, #세계여행, #남미여행, #아르헨티나, #5월광장어머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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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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