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다룬 세 편의 영화를 보고 쓴 글에서, 나는 감히 시와 시인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했다. "시는 시인이 아니라, 시가 쓰는 게 아닐까. 단지, 시인의 손을, 그의 삶을 빌릴 뿐이라고. 시는 시를 쓰고, 시인은 시로 산다." 이 정의가 못마땅하진 않다. 그러나, 어딘가 막연하단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좀 더 적확할 수 없을까. 그러니까, 시는 '어떻게' 시를 쓰고, 시인은 '어떻게' 시로 사는 걸까. 이 대목에서 영화 <패터슨>은 흥미로운 장면을 보여준다.
 
 영화 <패터슨>

영화 <패터슨> ⓒ 그린나래미디어(주)

  
'시가 시를 쓴다'는 것

영화 <패터슨>은 어떤 의미로, '시론'일 수 있다. 그러니까, 시는 어떻게 쓰이는가에 대한 대답. 영화에서 패터슨은 총 6편의 시를 쓰는데, 여느 시가 그렇게 탄생하듯 그는 먼저 대상을 관찰한다. 그가 관찰하는 대상의 목록은 이렇다.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 맥주잔, 시, 빛, 버스 운행, 호박파이, 폭포'.

그는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을 통해 사랑하는 아내와의 불붙는 사랑의 시를(Love Poem), 맥주잔에서 집 외의 또 다른 공간(Another one)을, 창가 너머로 새어 들어온 빛(Glow)과 아내가 만들어준 호박 파이(Pumpkin)에서 날카롭고 달콤한 사랑을, 매일마다 버스를 운행(The Run)하면서 일상의 특별함을, 폭포에서 한 소절(The Line)을 그는 발견한다(괄호는 전부 그가 쓴 시의 제목이다).

그는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관찰하여, 그 속에서 다른 존재의 '의미'를 건져낸다. 그러면, 시는 대상을 잘 관찰한 결과로 탄생하는 것일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순서가 역전되는 경우도 있으니. 월요일, 아침을 먹던 그는 식탁 위에 있던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을 발견한다. 얼마간 들여다봤을까. 쇼트는 몸을 돌려 다른 것을 담는다. 그의 목소리로 써 내려가는 '사랑 시'를. 

"차분하고도 격렬하게 / 나는 담배 당신은 성냥 / 키스로 함께 타올라 / 천국을 향해 피어오르리라"(사랑 시, Love Poem) 그는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대상)에게서 '사랑'이라는 시를 길어 올렸다. 그런데, '사랑'이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 자체에 있는 속성이 맞는가. 그건 패터슨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사랑은 확실히 성냥보다 '패터슨'에게 더 가깝다.
 
 영화 <패터슨> 스틸컷

영화 <패터슨>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그러니까 시는 대상을 잘 관찰하고 나서야 비로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자신 안에 존재하는 어떤 '언어'(의미)가 대상이라는 그물망을 통과해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이 '사랑 시(Love Poem)'일 수 있는 이유는, 패터슨에게 이미 내재하는 언어(사랑)가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대상)을 뚫고 나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는 '나의 언어'가 '너의 대상'을 만나, 몸을 섞어 수정된 끝에 탄생한다. 그리고 시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나'(언어)와 '너'(대상)를 또 하나의 '시'로 만든다. 그러므로 '언어'와 '대상'은 언제나 시의 가능태다. 그렇다면, 조심스럽게 말하건대, 이 문장이 성립할 수 있지 않을까. "시(언어)가 시(대상)를 바라보니, '시'가 되었다."

'시인이 시로 산다'는 것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장면에서 가슴 철렁하지 않았을까. 반려견 마빈이 그만 패터슨의 시 노트를 갈기갈기 조각내버린 것. 지금까지 연필로 꾹꾹 눌러쓴 시가 단번에 종이조각이 되어 버렸다니.

그런데 우리의 패터슨, 성질도 잘 못 낸다. 한참을 지켜보다가 그제서야 입을 열어 말한다. "난 네가 밉다, 마빈" 아, 패터슨은 왜 이리 착한 걸까. 처음으로 마빈 없이 간 산책의 끝에서, 패터슨은 한 폭포를 마주 보고 앉는다. 시를 써야 할 타이밍이지만, 그에겐 노트가 없다. 그때, 일본인 여행객이 다가온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인 <패터슨>을 들고.

이 영화를 이루는 몇 가지 모티프가 있지만, 이중 인상 깊은 것은 '쌍둥이' 모티프다.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은 '패터슨 시'에 산다. 그 도시엔 유난히 쌍둥이가 많이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속 패터슨의 8일을 지나가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쌍둥이와 만난다.

토요일의 경우는 우습기까지 하다. 하루 종일 집에서 시만 썼던 그날 밤, 아내와 함께 영화 보러 극장에 갔는데 그는 영화를 보다가 깜짝 놀란다. 영화 속 여성 주인공이 흡사 아내와 쌍둥이처럼 닮았기 때문이다(패터슨은 영화를 보다 말고, 돌연 옆 자리 아내를 빤히 본다).
 
 영화 <패터슨>

영화 <패터슨> ⓒ 그린나래미디어(주)

  
쌍둥이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끈 이유는 따로 있다. 그 도시에 쌍둥이가 그렇게 많은데, 패터슨의 쌍둥이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일본인 여행객이 그의 쌍둥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그도 시를 쓰는 사람이며 둘째, 그도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셋째, 그가 패터슨에게 다가오며 들고 있던 책의 이름은 '패터슨'이었다. 마지막으로 둘은 동시에 합창한다. '아하'. 따라서, 노트를 잃어버린 패터슨에게, 일본인 여행객이 '빈 노트'를 선물로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의 귀결이다.

일본인 여행객이 들고 있던 책,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패터슨> 역시 의미심장하다. 오른쪽 면은 일본어가, 왼쪽 면은 영어가 마치 쌍둥이처럼 나란히 적힌 책이다. 그리고 그는 패터슨에게 자신의 책을 선물한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텅 빈 노트를. 아하. 나는 패터슨이 선물로 받은 이 책을,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책 <패터슨>의 쌍둥이로 본다.
 
 영화 <패터슨> 스틸컷

영화 <패터슨>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영어-일본어의 번역 합본인 책과 텅 빈 책. 이 둘이 쌍둥이라면, 텅 빈 책 역시 <패터슨>처럼 번역본이어야 한다. 무엇의 번역본인가. 나는 그걸, 삶이라고 읽는다. 그러니까, 삶을 고스란히 번역한 언어로 시를 쓰라고. "때로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물하죠." 이 말에, 삶을 집어넣어도 똑같은 의미가 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시를 쓴다는 건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번역해나가는 일이다. 시는 소설과는 달리, 작품에서 발화하는 사람은 1인칭 저자 자신이다. 즉, 시는 나 자신이라는 것. 시는 '내 삶의 쌍둥이'면서, 동시에 삶의 '번역본'이다. 삶을 번역하는 것이 시를 쓰는 것이고, 시를 쓰는 일이 삶을 번역하는 일이다. 단어 하나하나 고르고 골라, 조심스럽고도, 애틋한 언어로, 어쩌면 영원히 같은 의미에 도달할 수 없어도, 그렇게 더듬거리며 간신히. 때로, 아하, 아하 하며.
 
 영화 <패터슨> 스틸컷

영화 <패터슨>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는 일주일이 아니라, 8일의 시간을 담는다. 마지막의 월요일은 첫째 날 월요일을 닮은 8일째 월요일. 우리의 패터슨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누워있다.

창 밖으로 해가 환하게 떴네요, 패터슨씨. 일어나세요. 이제, 시로 살아갈 시간이랍니다. 패터슨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면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화면에 어둠이 덮이고. 캄캄한 화면 안에, 언뜻 내 모습이 비쳤다.
패터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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