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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장자를 읽다>라는 책을 접했다. 저자 양자오. 이름이 좀 이상하다 했더니 중국인이다. 대만계 중국인. 서론부터 아주 현란하다. 장자가 정말 노자보다 더 후대 사람인가. 이렇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장자의 문체, 그리고 노자의 서술방식 등을 종합해 봤을 때, 장자가 노자보다 더 전시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냥 조금 이른 정도가 아니고, 장자는 춘추 시대, 노자는 전국 시대 사람이라고 한다.

시작부터 노장을 구분하고 시대를 논하더니, 장자 본편은 소요유와 제물론, 딱 두 개만 읽어준다. 장자를 '읽다'였는데, 대담하다. 무릇 장자 내편 소요유, 제물론, 양생주, 외편 추수, 잡편 설검 정도가 읽을 만하다는 것이다. 읽을 '만'하다라니? 다소 거만하게 느껴지는 주장이지만, 양자오에게 장자는 국문학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보자. 근거가 충분한 자신감이다. 고어라서 읽기 어렵지 않느냐고? 책 도입부에서 양자오는 말한다. 한자는 5천 년 전 글자나 지금 글자나 뜻이 거의 같은, 아주 희귀한 글자라고. 과연 그렇지 않은가. 표음문자가 아니라 표의문자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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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읽다> 표지
 <장자를 읽다> 표지
ⓒ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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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오가 말하는 노장의 차이는 이렇다. 세상은 이토록 광활한데, 인간은 자신들만의 편협한 개미굴 속에서 산다. 노자나 장자나 우리가 사는 개미굴의 편협함을 설파하는 것은 같다. 하지만 결론이 다르다. 노자는 개미굴 바깥에 존재하는 거대한 세계의 진리를 깨쳐, 그 깨달음을 인간 세계에 적용하려 한다. 우주의 비밀을 혼자 간직한 현인의 모습이다.

반면, 장자는 개미굴 밖의 세상을 알았다면 개미굴 바깥으로 나가라고 가르친다. 우주의 비밀을 깨쳤다면, 그 우주로 날아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신선의 모습이다.

나 같은 범인에게도 보이는 노자와 장자의 차이는 표현 방법에 있다. 노자는 아름답지만 불친절하다. 마치 싯구 같다. 아니, 정말로 시의 형태로 쓰여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같은 느낌이다. 반면 장자는 구구절절 장황하기는 해도, 친절하다. 하이데거 느낌이다. 양자오는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장자는 흘러넘치도록 현상을 설명하고 또 묘사한 뒤, 그 이치를 설명해준다. 노자는 그 이치에만 관심을 두고 간략하게 서술한다. 양자오는 <묵자를 읽다>에서 묵자와 공자의 서술 방식상 차이점을 설명하는데, 장자는 묵자와, 노자는 공자와 비슷하다.

논어에서 보이는 공자의 서술방식이 '논'이라면, 묵자의 서술 방식은 '변'이라 한다. 예컨대 묵자는 '겸애(상)'에서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군신간에 신뢰가 없고, 부자간에 믿음이 없고, 서로 자신의 것만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다양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기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결론을 덧붙인다. 겸애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공자라면, 단순히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사랑이 없어서다"라고 서술하고 끝냈을 것이다.

한비자의 <현학>은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에 이름 높은 학파로 유가와 묵가가 있다. 유가의 으뜸은 공구, 묵가의 으뜸은 묵적이다." 소위 제자백가라고 불리는 수많은 사상가들의 필두가 공자와 묵자, 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불과 백여 년이 지나 사정은 많이 바뀐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공자세가>가 나온다. 공자를 제후의 반열에 올린 것이다. 그러나 묵자에 대해서는 열전조차 없다. <맹자순경열전>에서 스물 네자로 짧게 언급만 할 뿐이다. 그것조차 부정적인 평이다.

묵가는 왜 그렇게 빠르게 몰락했을까? 양자오는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왠지 알 것 같다. 겸애란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 아닐까? 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은 한비자와 공자, 그리고 그들의 제자들이 어느 정도 수습했다. 더 이상 전란이 거듭되고 제후가 이합집산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러니 묵가의 겸애, 아니 '비공', 즉 방어술이 절실하지 않은 세상이 온 것이다.​

종의 기원을 읽다
 
<종의 기원을 읽다> 표지
 <종의 기원을 읽다> 표지
ⓒ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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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오는 <읽다> 시리즈를 많이 썼다. 미국 헌법도, 종의 기원도, 자본론도 읽는다. 그래서 일단은 비교적 말랑말랑해 보이는 <종의 기원을 읽다>를 골랐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양자오의 전공은 역사학이다. 그것도 19세기. 바로 다윈과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의 시대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다윈이 인간을, 프로이트가 인간 자아를 세계의 중심에서 밀어냈다고 말하고는 한다. 뉴턴이 근대 물리학을 정립하고도 종교 재판을 받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이미 시련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뉴턴에게 가장 중요한 자기 정체성은 신학자였다. 그가 남긴 신학 저술은 물리학과 수학을 합친 분량보다도 많다고 한다.

양자오는 여기에 한 가지 재미있는 설명을 더한다. 뉴턴 물리학은 신이 존재하는 세계관과 상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분노를 사지 않았다는 것이다. 뉴턴 물리학은 우주가 움직이는 정교한 법칙을 발견했지만, 그 법칙은 애초에 신이 만든 것이다. 인간은 신이 만든 그 법칙을 거스르지 못한다. 그래서 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나 다윈은 달랐다. 신이 자신의 뜻대로 만든 생명체라면, 인간이 그 모습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신이 만든 생명체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활용해 왔다. <종의 기원> 제1장에서부터 나오는 집비둘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가축과 반려동물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손에 의해 모습과 습성이 바뀐 동물이 어디 한둘인가. 생물을 신이 창조했다면, 인간이 그 섭리를 바꿀 수 있을 리가 없다. 다윈의 반증은 신의 섭리를 정면으로 거스른다는 점에서 뉴턴 물리학과 다르다.

나는 <종의 기원>을 읽지 않았다. 그 대신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제이 굴드, 그리고 에드워드 윌슨을 읽었다. 유전자와 돌연변이의 기제를 모르던 다윈의 진화론을 지금 와서 새삼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다윈의 책을 읽게 된다면, 양자오가 말하는 그의 '생각의 깊이'를 느끼고 싶어서일 것이다.

프로이트도 마찬가지지만, 다윈의 위대함은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 스펙트럼적 사고를 도입했다는 데 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의 무지개를 관찰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숭이는 원숭이, 사람은 사람이라는 범주라는 틀에 묶여 자연을 관찰하면 그 중간 어디쯤에 속한 생물은 보이지 않는다. 기존 개념에 묶이지 않은 관찰이 다윈을 위대하게 했다.​

꿈의 해석을 읽다

양자오는 프로이트 역시 스펙트럼적 사고를 도입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 이전, 정신과에 들어간 사람은 정상 아니면 정신병, 둘 중 하나의 딱지를 달고 나왔다. 이에 반해,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진단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양자오가 19세기의 두 거인에 대해 스펙트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류 문화 발전에 있어서, 이분법이란 언젠가는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물리학도 결국 이분법을 극복하고 양자물리학으로 나아가지 않았던가? 비슷한 시기에, 생물학과 정신분석에서 이분법이 극복된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프로이트에게 꿈은 억압의 결과다. 억압되었던 소망이 뒤틀리고 변형되어 표현된 것이 꿈이다. 그 억압은 유년기의 절망이다. 유년기의 인간은 무력하기에, 그 시절 경험한 공포에는 희망도 구원도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의 자아는 그 공포를 정신 깊은 곳으로 감춘다. 감춰진 곳의 이름은 무의식이다. 그것이 전의식을 거쳐 의식에 그림자처럼 비치는 것, 그것이 꿈이다.

프로이트의 꿈 이론은 기괴하기는 해도 다가가기에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양자오는 프로이트의 꿈 이론보다는 프로이트 사상의 출현 배경과 영향에 초점을 맞춘다. 19세기가 바로 그 배경이다. 서양 문명이 더 이상 올라갈 데 없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절정기를 맞이한 때. 양자오는 그러나 19세기의 찬란함은 억압된 자아와 같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세계 제1차 대전의 발발 원인이 억압과 왜곡이라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성적 욕망을 극단적으로 억누르고 공부만 열심히 하다가 정신분열에 이른 사람, 그것이 세계 대전에 이른 유럽이다.
 
자아마저도 확실한 것이 아님을 주장한 프로이트
 자아마저도 확실한 것이 아님을 주장한 프로이트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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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통해 초현실주의 예술과 프로이트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선을 볼 수 있었다. 양자오가 말하듯 초현실주의 회화는 추상화가 아니다. 달리의 그림에는 분명히 시계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물건이 그려져 있다. 단지 그것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다. 현실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현실이 왜곡된 것. 그래서 초현실주의 미술은 꿈과 같다.

초현실주의 문학도 마찬가지다. 19세기까지 작가는 자신이 확실히 이해하는 것만 쓸 수 있었다. 독자가 작품의 의미에 관해 물어오면, 언제든 대답을 줄 수 있어야 했다. 작품은 작가의 소유였고, 그가 지배하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프로이트는 해방시켰다. 작가는 이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특권이 독자의 손에 떨어졌다.

프로이트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텍스트성의 근본적 변화 역시 프로이트가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쉬르, 후설, 하이데거, 데리다는 잠이라도 자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양자오의 견해는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새로운 생각을 접하고 배우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장자를 읽다>로 시작해서 단숨에 양자오의 책 네 권을 읽었다. 그의 속깊은 독서에 귀 기울여 더 많이 배우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나도 속으로 여물어 가을에는 고개를 숙이는 지혜를 배우고 싶다.

장자를 읽다 - 쓸모없음의 쓸모를 생각하는 법

양자오 지음, 문현선 옮김, 유유(2015)


태그:#잡식성 책사냥꾼, #양자오, #장자, #묵자, #종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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