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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항쟁으로 희생된 제주시민의 유골들
▲ 제주4.3항쟁 제주4.3항쟁으로 희생된 제주시민의 유골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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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4월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 4ㆍ3항쟁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동북아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제주도는 제2차대전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했던 전략기지가 되었고, 전쟁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해방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친 데다,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경찰에 의한 3ㆍ1절 발포사건이 터져 민심을  크게 악화시켰다.

3ㆍ1절기념 행사 때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이 벌어졌다.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바로 이 사건이 4ㆍ3항쟁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4.3평화기념관 내부의 모습이다. 이 기념관에는 제주 4.3항쟁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학살의 현장을 그린 작품.
▲ 제주4.3평화기념관 4.3평화기념관 내부의 모습이다. 이 기념관에는 제주 4.3항쟁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학살의 현장을 그린 작품.
ⓒ 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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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反警) 활동을 전개했다. 제주도민들이 경찰발포에 항의한 '3ㆍ10 총파업'은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ㆍ관 합동의 총파업이었다.

미군정은 즉각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하여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사건'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하고, 지원경찰과 무장한 서북청년 단원들을 대거 제주에 보내 파업 주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 달만에 500여 명이 체포하고, 4ㆍ3항쟁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을 구금하였다. 이들에 대한 테러와 무자비한 고문이 잇따르면서 여론이 크게 악화되었다.

이때에 미군정과 이승만에 의한 단선ㆍ단정론이 제기되고,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주사회는 폭발직전의 위기상황으로 치달았다. 제주도 지도자들은 당면한 단선ㆍ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을 이슈로 내걸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관내 12개 지서와 서북청년단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ㆍ단정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주장하였다. 미군정은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대규모 국방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제주 4·3 평화공원 내에 있는 1948년 제주 4.3항쟁의 잔혹성을 형상화한 작품(김민수 자료사진)
 제주 4·3 평화공원 내에 있는 1948년 제주 4.3항쟁의 잔혹성을 형상화한 작품(김민수 자료사진)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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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악화된 가운데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의 '4ㆍ28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 등으로 무산되었다. 협상을 깨고자 하는 의도적인 방화였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 슈 중령의 제주파견, 경비대 9연대장 교체 등을 통해 제주에서 5ㆍ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다.

이에 대해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이 역시 실패했다. 5월 20일에는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해 무장대 측에 가담하는 사건이 생겼고, 6월 18일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 의해 암살 당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후 제주 사태는 한때 소강국면을 맞았다. 무장대는 김달삼 등 지도부의 '해주대회' 참가 등으로 조직 재편의 과정을 겪었다. 군경 토벌대는 8월 15일 정부 수립과정을 거치면서 느슨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소강상태는 잠시 뿐이었다.

남쪽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짐에 따라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렸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 있는 4.3 너분숭이 유적지다. 이곳에는 현기영 선생의 소설 <순이삼촌>을 묘사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애기무덤과 탑 등이 보전되어 있으며, 너분숭이기념관이 31일 개관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 있는 4.3 너분숭이 유적지다. 이곳에는 현기영 선생의 소설 <순이삼촌>을 묘사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애기무덤과 탑 등이 보전되어 있으며, 너분숭이기념관이 31일 개관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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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정부는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이승만이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할 때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산간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변 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육지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였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도 강경진압을 계속하였다.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하였다. 가장 인명피해가 많았던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1949년 3월 이승만 정부가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진압ㆍ선무 병행작전이 전개되었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하산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했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제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제주 오름의 권좌라고 불리는 '다랑쉬오름', 이 오름 근처에 있던 다랑쉬마을은 제주 4.3항쟁 기간동안 초토화되어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 다랑쉬오름 제주 오름의 권좌라고 불리는 "다랑쉬오름", 이 오름 근처에 있던 다랑쉬마을은 제주 4.3항쟁 기간동안 초토화되어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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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시작되었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엄청난 학살을 당하였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ㆍ3항쟁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한 상태이다.

잔여 무장대들의 공세도 있었으나 그 세력은 미미하였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해제되었다. 이로써 1947년 3ㆍ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ㆍ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ㆍ3항쟁은 실로 7년 7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주 4ㆍ3항쟁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ㆍ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제주도민들이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2만 5천명 내지 3만여 명이 희생되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4.3항쟁, #서북청년단, #제주4.3항쟁, #중산간마을, #오라리방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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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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