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임시정부 환국 기념 촬영 사진.(1945년 11월 3일) 맨 앞줄 백범 김구 왼쪽이 김규식이다.
 임시정부 환국 기념 촬영 사진.(1945년 11월 3일) 맨 앞줄 백범 김구 왼쪽이 김규식이다.
ⓒ 백범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임시정부 환영가

 1. 원수를 물리치고 
   맹군이 왔건만은
   우리의 오직 한 길
   아직도 멀었던가
   국토가 반쪽이 나고
   정당이 서로 분분
   통일업신 독립없다
   통일만세 통일만만세

 2. 30년 혁명투사
   유일의 임시정부
   그들이 돌아오니
   인민이 마지하여 
   인제는 바른 키를
   돌리자 자주독립
   독립업신 해방 없다
   통일만세 통일만만세.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11월 5일 장개석 정부가 내준 비행기를 타고 5시간만에 충칭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했던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국내 귀환을 위해 미국이 보내주기로 한 비행기는 상하이에 머문지 18일만인 11월 23일에야 도착했다.

이날 김구 등 1진 15명은 미군 C-47 중형 수송기편으로 3시간 만에 김포공항에 도착 환국하였다. 그나마 2진은 일주일 후 군산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국내에는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으나 미군정측은 이를 알리지 않아 공항에는 환영객 하나 없었다.
  
해방 직후, 여의도 비행장에 환국한 임정요인들과 장준하.
▲ 해방 환국 해방 직후, 여의도 비행장에 환국한 임정요인들과 장준하.
ⓒ (출처:복음동지회 20주년 앨범 스캔)

관련사진보기

미군정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개인자격으로 귀국케 하는 등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0월 16일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주선한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다.

미 육군 남조선 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존 하지 중장은 이승만이 일본 도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만나려 일본까지 가서 맥아더와 3인회담을 가진데 이어 대대적인 귀국환영 대회를 연 것과는 크게 대조되었다.

미국은 투철한 민족주의자인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보다 친미성향이 강한 이승만을 처음부터 점찍고 크게 우대하였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에 참석한 김구 주석, 김규식부주석, 엄항섭 선전부장 등(1945년 12월 19일)
▲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에 참석한 김구 주석, 김규식부주석, 엄항섭 선전부장 등(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에 참석한 김구 주석, 김규식부주석, 엄항섭 선전부장 등(1945년 12월 19일)
ⓒ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관련사진보기

임시정부 요인들은 환영준비위원회에서 마련한 경교장과 한미호텔에 머물면서 해방정국에 대처하였다. 12월 19일 대규모적인 임시정부 개선 환영식이 열렸다. 미군정은 냉대했지만 국민은 임정요인들을 뜨겁게 환영했다. 식장에는 조선음악가협회가 제정한 〈임시정부환영가〉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해방정국의 주역이 되지 못하였다.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 신탁통치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임정 요인들은 반탁운동에 앞장서고, 미군정과 친일세력으로부터 사사건건 견제를 받았다.

참다못한 김구 주석은 12월 31일 내무장 신익희에게 「국자(國字)」 제1호ㆍ2호의 임시정부 포고문을 발령케 했다. 미군정과 정면 대치하는 결단이었다.  

국자 제1호

①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한국인 직원은 전부 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케 함.
② 탁치 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ㆍ질서적으로 할 것. 
③ 돌격 행위와 파괴 행위를 절대 금함.
④ 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식량ㆍ연료ㆍ수도ㆍ전기ㆍ교통ㆍ금융ㆍ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함.
⑤ 불량상인들의 폭리 매점 등은 엄중 취체함.

 
임정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奉迎會)’ 식장에서 백범 김구가 연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임정은 뜻을 펴지 못했다.
▲ 임정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奉迎會)’ 식장에서 백범 김구가 연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임정은 뜻을 펴지 못했다. 임정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奉迎會)’ 식장에서 백범 김구가 연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임정은 뜻을 펴지 못했다.
ⓒ 권기봉

관련사진보기

미군정사령관 하지는 이와 같은 임시정부의 처사를 군정에 대한 쿠데타라고 비판하면서 김구를 구속하여 인천감옥에 수감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한국 민중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올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시정부(김구)와 미군정은 돌이키기 어려운 관계가 되었다. 

해방정국은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좌ㆍ우세력의 찬반투쟁으로 갈리고 통일정부 수립과 친일파 청산 등 민족적인 과제는 실종되었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이 비록 실체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정치적으로는 가장 활발하게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세대에 걸쳐 피어린 항일투쟁으로 독립된 나라가 또 다시 외국의 신탁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임시정부 측의 소신이었다.

김구는 미군정뿐 아니라 소련측으로부터도 배척되었다. 1946년 3월 20일 미ㆍ소공동위원회가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다. 소련 대표 스티코프가 김구를 '반동적ㆍ반민주주의적' 이라 비난하면서 "앞으로 수립된 민주주의임시정부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하는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한 대동단결의 토대 위에서 창설되어야 한다"고 하여 사실상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을 배제하는 발언을 하였다. 김구는 격노하여 하지와 만난 자리에서 이를 따졌다. 

김구 : 장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는데 당신들은 나라를 전략적으로 점령한데 불과하오. 자주독립 정부를 세워야 할 것이 절실한 당면 과제인데 미ㆍ소 양국이 한국에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겠소.

하지 : 김구 선생, 신탁통치안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조치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 역시 한국의 자주정부수립을 희망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김구 : 아니 잠정적인 조치일 뿐이라니, 물론 장군도 소련 스티코프란 자의 개회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 아닙니까. 분명히 말해두겠지만 이번에 열리는 미ㆍ소공위는 한민족 전체의 염원을 짓밟는 강대국의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소. 따라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당연하고도 엄숙한 의사표시인 것이오.(<백범김구전집>, 제5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면서 좌우합작을 이루고 광복군을 창설하여 본토진격 등을 준비하였다. 1919년 3ㆍ1혁명을 계기로 4월 11일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는 27년 동안 중국 관내를 돌아다니면서 일제와 싸운 한민족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기관이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28일 건국강령을 제정하여 해방 후 건설할 민족 국가의 성격과 강령을 마련하고, 12월 10일에는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는 한편 1944년 4월 약헌(헌법)을 개정하여 부주석제를 신설, 김규식을 부주석으로 영입하고 민족혁명당 등과 통합하여 좌우합작 정부를  출범시켰다. 

임시정부는 또 국무위원 장건상을 옌안에 특사로 파견하여 김두봉을 비롯한 독립동맹 간부들을 만나, 충칭에 모여 통합문제를 협의키로 하였다. 그러나 시국이 급진전하면서 김두봉의 충칭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것이 성사되었으면 해방 후 통일 과업을 논의하는 데도 큰 기여가 될 수 있었는데, 안타까운 일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임시정부의 당면 정책〉14가지를 제시했다.

1. 임시정부는 최속기간 내에 입국할 것. 2, 미ㆍ소ㆍ영 등 우방과 제휴하고 연합국 헌장의 준수,  3, 국내에 건립될 정식정권은 반드시 독립국가ㆍ민주정부ㆍ균등사회를 원칙으로, 4,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 처단 등이 담겼다.
  
백범 시해 직후 거실에 모신 모습.
 백범 시해 직후 거실에 모신 모습.
ⓒ 백범 기념관

관련사진보기

미ㆍ소공위가 결렬되고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 남한 단독선거가 결정되면서 김구는 김규식 등과 남북협상론을 제기, 평양에서 북한 지도자들과 만나 단선ㆍ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했으나, 결과적으로 남북한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의 존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1949년 김구 주석의 암살로 사실상 종료되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임시정부 요인, #임시정부환국, #미소공동위원회, #임시정부환영가, #하지중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