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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의 선사문화를 찾아서
 
강릉시립박물관의 토대가 된 향토민속관
 강릉시립박물관의 토대가 된 향토민속관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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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에는 율곡기념관 외에 강릉시립박물관이 있다. 강릉시립박물관에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강릉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는 대표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1992년 향토사료관(향토민속관)으로 개관되었고, 1997년 역사문화관이 준공되면서 박물관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1998년 오죽헌과 통합, 강릉시립박물관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2012년에는 율곡기념관이 새롭게 개관했고, 2016년에는 율곡인성교육관이 개관했다. 그러므로 오죽헌에는 모두 네 개의 전시․교육관이 운영되고 있다.

강릉시립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발굴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 불교유물과 도자기도 중요한 전시물이다. 조선시대 유물로는 유교문화와 관련된 것이 많다. 서화류로는 문집과 그림이 있다. 국보는 없지만 보물과 유형문화재가 있어 강릉의 역사와 문화를 아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 동안 명안공주 관련유물 전시회, 신사임당 특별전, 화폐인물 특별전 등을 열었다.
 
강릉의 선사문화
 강릉의 선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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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는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원전 60만 년 전 구석기시대 유적이 강동면 심곡리에서 발굴되었다. 주먹도끼, 찍개, 긁개 등 100여 점의 유물이 구석기시대를 대표한다. 신석기 유물로는 양양군 오산리, 지경리 유적이 대표적이다. 빗살무늬 토기가 발굴되었고, 강릉 초당동에서도 빗살무늬 토기가 발굴되었다. 한현동, 지변동, 강동면 안인리 유적도 신석기시대로 본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연곡면 방내리, 안현동, 교동에 있다. 방내리에서는 청동기시대 집터 유적이 발굴되었다. 움집으로 깊이가 16-68㎝ 정도라고 한다. 집안에서는 불땐 자리, 기둥 구멍, 저장용 구덩이 등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구멍무늬 토기, 돌도끼, 반달 돌칼, 가락바퀴, 화살촉, 갈돌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강문동 유적의 토기류
 강문동 유적의 토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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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 유적은 강문동에서 발굴되었다. 강문동 유적은 초기 철기시대 집터를 보여준다. 집터의 크기는 10.7×6.2m의 직사각형으로 움집의 깊이는 35㎝다. 다섯 개 기둥구멍이 있고, 바닥에서 화덕과 숯이 확인되었다. 집안에서 민무늬 토기와 가락바퀴도 나왔다. 강문동은 바다에 가까운 저습지로, 철기시대 문화층 위에 신라시대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이 시대 강릉지역은 임둔 또는 동예의 영역이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유물로는?
 
굴산사 당간지주
 굴산사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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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시대 들어 강릉은 하슬라(何瑟羅)로 불린다. 강동면 안인리 유적이 원삼국시대 대표적인 취락이다. 이곳에서는 여(呂)자형 집터 15기와 철(凸)자형 집터 20기가 발견되었다. 여자형 집터가 아래층이고, 철자형 집터가 위층이다. 이곳에서는 화덕, 무문토기, 가락바퀴, 쇠작살과 낚시, 쌀, 가래, 콩 같은 곡물류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고분 유적으로는 신라시대 초당동 고분이 모형으로 제작 전시되고 있다.

강릉의 불교유적으로는 사굴산문의 절들이 유명하다. 대표적인 절이 구정면 학산리에 있는 사굴산문의 본산 굴산사다. 신라 문성왕 13년(851)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에 의해 창건되어 신라말 고려초에 번성했다. 그러나 현재는 부도와 당간지주 그리고 돌우물만이 남아 있다. 1983년 발굴조사 때 굴산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토기, 청자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박물관 전시실에는 굴산사지에서 발굴된 명문기와, 비 조각, 연화문 수막새, 도깨비문 수막새 복제품이 있다.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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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곡동 신복사지에는 고려 초기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이 있다. 이들은 예술성이 뛰어나서 문화재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 이곳 박물관에는 신복사지에서 발굴된 수막새, 암막새, 명문기와 복제품이 있다. 성산면 보광리에는 보현사가 있는데, 낭원대사(朗圓大師: 834-930) 오진탑(悟眞塔)과 탑비가 있다. 낭원대사는 굴산사에서 범일로부터 심인(心印)을 받았고, 범일 사후 보현사로 가 법을 펼치다 그곳에서 입적했다. 그 때문에 탑과 탑비가 보현사에 있다.

그리고 대표적인 불교유물로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한송사는 강동면 남항진리에 있던 절인데, 폐사 후 두 기의 석조보살좌상이 수습되었다. 하나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머리와 오른팔이 없어진 불완전한 형태로 이곳 강릉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석조보살좌상은 입체감이 풍부하고 매우 활달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보물 제81호로 지정되었다.

시호 교지와 지석, 도자기와 서화 이야기
 
심언광의 시호 교지
 심언광의 시호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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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물로는 교지와 지석 등이 있다. 교지는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벼슬 임명장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심언광(沈彦光: 1487-1540)에게 내린 시호교지가 있다. 그는 8세손 심상현(沈尙顯)의 상소로 1761년(영조 37) 문공공(文恭公)의 시호를 받았다. 문(文)은 "영민하여 배우기를 좋아하고(敏而好學)", 공(恭)은 "이미 지난 잘못을 고쳤다(旣過能改)"는 뜻이다. 심언광은 의정부 좌참찬까지 지낸 후 삭탈관직 되었다가 사후 복권된 바 있다.

지석으로는 안성이씨 종친회에서 기증한 이수징(李守澄) 지석이 있다. 지석에는 "통사랑 영천훈도 이공묘지(通仕郎榮川訓導李公墓誌)라는 표제와 "가정(嘉靖) 37년 10월 일지(日誌)"라는 연보가 있다. 이를 통해 1558년 만들어진 훈도 이수징의 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묘지문에는 이수징의 선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과 관직, 출생지, 활동사항, 부인과 자녀, 출생과 사망일시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울진과 영천에서 훈도를 지냈으며, 강릉최씨와 사이에 3남1녀를 두었다.
 
금강산도
 금강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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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로는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청화백자가 있다. 분청사기로는 박지문병, 국화문 접시, 덤벙문 대접이 있다. 청화백자로는 모란문 항아리가 있다. 이들 외에 수준이 조금 떨어지는 서화(書畫)가 여럿 있다. 이들 중 눈에 띄는 것은 병풍에 그려진 금강산도와 관동팔경도다. 금강산도에는 총석정, 장안사, 보덕암, 구룡연, 만폭동 등이 그려져 있다. 관동팔경도에는 통천의 총석정에서부터 평해의 월송정까지 여덟 군데 명승이 그려져 있다.

금강산도는 두 점이 있는데, 19세기말 20세초 작품으로 추정된다. 하나는 병풍 형태고, 다른 하나는 화첩 형태다. 설명에 보니 수직준과 미점에서는 정선의 필법을, 변형 하엽준은 김홍도의 필법을 따랐다고 되어 있다. 뾰쪽뾰족한 내금강의 산봉우리는 정선을 모방했다. 그리고 바위와 봉우리의 골계미는 김홍도를 모방했다. 그러나 수준이 그들에 미치지 못해 매너리즘이 느껴진다.
 
금강산도에도 들어가고 관동팔경도에도 들어가는 통천 총석정
 금강산도에도 들어가고 관동팔경도에도 들어가는 통천 총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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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팔경도는 금강산도에 비해 민화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림의 상단에 군현명과 명승 이름을 기록했고, 그림 속에 구체적으로 지명과 바위, 정자 등의 이름을 기록했다. 그러므로 이 병풍은 관동팔경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또 이 그림을 감상하는 현대인에게는 관동팔경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그 중 양양 낙산사(洛山寺)와 산척 죽서루(竹西樓)를 현재와 비교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낙산사 그림에는 낙산사, 관음굴, 의상대가 있고, 전진리(前津里), 조암(鳥岩), 조도(鳥島)가 있다. 전진리는 현재 강현면 전진리를 말한다. 관음굴은 위치상으로 보아 현재 홍련암으로 보인다. 의상대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현재도 크게 보면 소나무가 두 그루다. 조암과 조도는 바닷가의 바위와 섬에 붙인 이름이다. 길이 달라지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을 뿐 큰 구도는 현재와 같다.
 
관동팔경도: 양양 낙산사(오르녹), 삼척 죽서루(왼쪽)
 관동팔경도: 양양 낙산사(오르녹), 삼척 죽서루(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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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서루는 삼척의 오십천 위 절벽에 위치한다. 죽서루 앞에는 큰 나무가 있고, 그 오른쪽으로 대나무 군락이 있다. 누각 아래 하천 오른쪽에는 마을이 있다. 오십천 위에는 배가 한 척 떠 있다. 그림 아래 왼쪽에는 봉황대(鳳凰臺)가 있어 죽서루를 건너다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는 죽서루와 봉황대 사이에 엑스포로가 지나고, 죽서교가 오십천을 가로지르고 있다.

충성스런 노비의 송덕비가 있다
 
충노문리동지려(忠奴文里同之閭)
 충노문리동지려(忠奴文里同之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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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박물관 내부 전시관을 보고 나오면 야외전시장에 늘어선 비석들을 볼 수 있다. 이 지역을 거쳐 간 관리들의 송덕비다. 관찰사, 강릉부사, 찰방 이름과 그 공적이 적혀 있다. 관찰사 비석 2기, 부사 비석 16기, 찰방 비석 1기, 관노(官奴) 비석 1기다. 이들 비석은 명주군청, 남대천 제방, 경포대 서쪽을 거쳐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비석 중 특이한 것이 충성스런 노비 문리동(文里同) 공적비다. 비석 가운데 '충노문리동지려(忠奴文里同之閭)'라고 적고, 양쪽에 그의 행적을 사언배율로 기록했다. 강릉부 관노였던 문리동이 임진왜란 때 강릉부사 이광준(李光俊)을 모시고 산골로 피신하여 정성을 다해 부사를 섬겼다는 내용이다. 산에서 식량이 떨어졌을 때 곡식을 구해와 기아를 면케 했으므로, 충효의 실행이 탁월하고 독보적이니 영원히 잊지 말자고 세운 것이다.

태그:#강릉시립박물관, #선사시대 유적, #교지와 지석, #금강산도와 관동팔경도, #노비 송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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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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