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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의 이이 동상
 오죽헌의 이이 동상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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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에서 율곡 가문의 역사를 알게 되다

오죽헌은 율곡 이이(李珥: 1536-1584)가 태어난 집이다. 그것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 결혼 후 남편을 따라가지 않고 친정인 강릉 오죽헌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사계 김장생(金長生)이 쓴 행장에 보면 율곡은 1536년 12월 26일 관동(關東)) 임영(臨瀛)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났다. 임영은 강릉을 말하고, 북평촌은 현재 오죽헌 주변을 말한다. 율곡은 어릴 때부터 영특해서 세 살 때 이미 시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태어날 때 신부인(申夫人)의 꿈에, 용(龍)이 아이를 감싸 품 안에 넣어 주는 것을 보았으므로, 어렸을 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했다. 나면서부터 남달리 영리하고 뛰어나서 말을 배우면서 바로 글을 알았다. 세 살 때 외할머니가 석류(石榴)를 가지고 ‘이것이 무엇 같으냐?’ 하고 물어보자, 선생은 곧 고시(古詩)를 들어 대답했다. ‘석류 껍질 속에 부서진 붉은 구슬(石榴皮裏醉紅珠)이다.’ 이에 사람들은 기특하게 여겼다.”
 
오죽헌
 오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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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에 태어난 방은 오죽헌의 바깥채다. 그것은 안채에 사임당의 어머니가 거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 칸짜리 건물로 가운데 오죽헌, 오른쪽에 몽룡실(夢龍室)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그리고 몽룡실 안에는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집의 주인은 신사임당이다. 건물 안쪽의 벽과 서까래에는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의 시문이 걸려 있다. 중수기에 따르면 오죽헌은 1962년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사임당은 이곳 오죽헌에서 평산신씨 신명화(申命和)와 용인이씨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리고 덕수이씨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해 아들 넷, 딸 셋을 낳았다. 그 중 셋째 아들이 율곡 이이다. 이들 형제자매 중 첫째 딸인 매창(梅窓: 1529-1592)과 막내 아들인 우(瑀: 1542-1609)가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다. 그 때문에 오죽헌의 율곡기념관은 신사임당과 율곡 삼남매의 글과 글씨 그리고 그림을 보여주는 전시관이 되고 있다.
 
신사임당의 글과 글씨 그리고 그림
 
신사임당
 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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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신씨는 시서화에 능한 문인이었다. 그렇지만 남아 있는 작품은 많지 않다. 그 중 글씨가 적어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다. 시로는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는 시가 유명하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踰大關嶺望親庭)’라는 칠언절구에서 사임당은 친정어머니가 계신 강릉을 떠나는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의 원 제목은 ‘대관령 반정에 이르러 북평을 바라보다(行至大嶺半程望北坪)’이다.
 
학처럼 백발이 된 어머니 임영에 계신데   慈親鶴髮在臨瀛
홀로 한양을 향해 가니 마음이 아파         身向長安獨去情
머리 돌려 북촌을 다시 한 번 바라보니     回首北村時一望
흰 구름 아래 푸른 산에 저녁이 내리네.     白雲飛下暮山靑


 
심사임당의 초서(병풍): 왼쪽에 "江南雨初歇..."이 보인다.
 심사임당의 초서(병풍): 왼쪽에 "江南雨初歇..."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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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폭으로 남아 있는 초서 병풍은 우여곡절 끝에 율곡기념관에 오게 되었다. 그 과정이 영조 때 강릉부사를 지낸 이형규(李亨逵)와 노산 이은상 선생의 발문을 통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병풍의 글은 신사임당이 쓴 당시(唐詩) 오언절구로 한 폭에 한 편씩 모두 여섯 편이 실려 있다. 시는 강남(江南)의 사계(四季)를 보면서 느낀 시인의 마음을 노래했다.

그 중 네 번째 시가 보편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쉽다. 당나라 시인 대숙륜(戴叔倫)의 시 ‘희유고십일명부(戱留顧十一明府)’ 라고 한다. 자료에 보니 사임당 글씨의 자획이 명료하고 품격이 있다고 적혀 있다. 초서지만 꿰뚫어 보면 그 글씨가 어느 정도 보인다. 이 초서병풍은 1973년 7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신사임당의 초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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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 비가 막 개었건만             江南雨初歇
산은 어둡고 구름도 젖어있네.      山暗雲猶濕
아직 노 저어 돌아가지 못하는데   未可動歸橈
앞 시내 바람이 정말 거세네.        前溪風正急

 
그림으로는 초충도(草蟲圖) 팔폭 병풍이 유명하다. 초충도는 식물과 꽃 그리고 벌레를 그린 그림이다. 식물로는 오이, 수박, 가지, 맨드라미, 양귀비, 봉숭아, 원추리가 있다. 이들 식물에 꽃이 피었고, 주변에 곤충들이 움직이고 있다. 메뚜기, 쇠똥구리, 여치, 사마귀, 개구리, 거미, 잠자리, 벌이 보인다. 이들 동식물을 보는 화가의 관찰력이 뛰어나고 묘사가 굉장히 사실적이다. 초충도는 5000원권 지폐 후면 그림으로 들어가 있다. 이곳에 있는 초충도는 송담서원에 있던 것을 복제했다고 한다.
 
율곡 누님과 아우의 그림과 글씨도
 
이매창의 묵매도(오른쪽)와 이우의 국화도(왼쪽)
 이매창의 묵매도(오른쪽)와 이우의 국화도(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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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큰누님인 이매창은 자연을 서경적으로 표현한 화가로 유명하다. 묵매도가 가장 유명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부러진 굵은 매화 줄기에서 가지가 나오고 그곳에 매화꽃과 봉오리가 달려 있다. 이러한 표현방식을 절지(折枝)와 비백(飛白)이라고 한다. 먹으로 농담을 조절해 줄기와 꽃의 강약을 표현했다. 그를 통해 줄기와 꽃의 정중동(靜中動)을 느낄 수 있다.

매창의 그림으로는 화첩이 전해진다. 이 화첩에는 사계절 풍경과 화조 그림이 들어 있다. 나뭇가지에 앉은 두 마리 참새를 그린 ‘참새’, 달밤에 갈대밭의 기러기를 그린 ‘달과 새’, 대나무 밭의 참새를 그린 ‘참새와 대나무’, ‘설경과 새’, ‘안개 속의 매화’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사계절의 풍경, 사군자, 화조를 적절하게 결합하고 변화시켜 그녀만의 특징을 만들어 냈다.
 
옥산서병: 귀거래사
 옥산서병: 귀거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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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의 그림은 더 많이 남아 있다. 그의 대표작은 ‘국화도’와 ‘묵포도도’다. 국화와 포도는 그 특징을 잡아내기가 쉽지 않은데, 이우는 이들을 개성적으로 잘 표현했다. 그의 그림은 옥산화첩(玉山畫帖)으로 남아 있다. 이 화첩에는 가지, 게, 매화, 대나무, 포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안내판에 보니 이우의 그림에서 “빠르면서 대담하고 다소 거친듯하면서도 분방한 필선이 잘 드러나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우는 초서에도 능해 옥산서병(玉山書屛)을 남겼다. 서병은 글씨가 들어간 병풍이라는 뜻이다. 이 9폭 병풍은 이우가 15살 때 쓴 것으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1편을 초서로 썼다. 그것은 제1폭 첫머리에 “돌아가련도다. 전원에 풀이 무성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라는 문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글씨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글씨는 결혼 후 장인인 황기로(黃耆老: 1521-1575)의 영향을 받는다.
 
초서의 대가 황기로의 글씨도 만나다
 
황기로의 초서: 이군옥의 시 '파산(坡山)'
 황기로의 초서: 이군옥의 시 "파산(坡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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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로는 율곡가와 사돈간이다. 이우가 황기로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황기로는 16세기를 대표하는 초서체의 대가다. 경상도 선산 사람으로 14살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고향인 고산(孤山)에 매학정(梅鶴亭)을 짓고 명리를 떠나 글과 글씨로 소일하며 평생을 지냈다. 황기로는 당나라 회소(懷素)의 서풍에 토대를 두고, 명나라 장필(張弼)의 서풍을 따랐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획과 글자체를 간명하게 하면서도 호방한 자신만의 서법을 완성해 나갔다.

이러한 그의 서법이 사위인 이우와 아계 이산해(李山海) 같은 조선 중기 문인들에게 전해졌다. 이곳에는 초서로 쓴 황기로의 글씨 두 점이 있다. 당나라 시인 이군옥(李群玉)의 오언율시 ‘파산(坡山)’과 사공서(司空暑)의 시 ‘금릉회고(金陵懷古)’다. 이 중 이군옥의 시는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의 작품은 원본을 복제한 것이다. 또 이백의 시 ‘초서가행(草書歌行)’을 황기로가 써서 석판에 새긴 원석(原石)이 있다. ‘기유춘고산서(己酉春孤山書)’라는 서각을 통해 1549년 봄에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태그:#강릉 율곡기념관, #신사임당, #이매창, #이우, #황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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