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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토론회에서 발표하는 윌렌츠 국제앰네스티 조사관
 낙태죄 폐지 토론회에서 발표하는 윌렌츠 국제앰네스티 조사관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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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7만 명. 지난 35년간 아일랜드에서 원정낙태를 선택한 여성들의 숫자다. 한때 아일랜드는 낙태 여성에게 최대 14년형을 선고할 정도로 낙태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하지만 이제는 옛말이다. 아일랜드는 지난해 5월 25일 국민투표로 헌법상 임신 12주 이내의 중절 수술은 제한을 두지 않기로 하고 낙태죄를 폐지했다.

21일 서울 종로구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시민사회 낙태죄 위헌을 논하다' 포럼에서 그레이스 윌렌츠 국제앰네스티 아일랜드지부 조사담당관이 언급한 사례다. 그는 4월 전후로 나올 헌법재판소 낙태죄 위헌법률심판 결정을 앞두고 국제앰네스티 의견을 한국 정부와 관계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방한했다.

윌렌츠 담당관은 "낙태 범죄화는 도리어 불법 낙태 시술의 증가를 야기한다"며 "세계보건기구(WHO)는 불법적 낙태 시술은 모두 안전하지 않다고 규정했다"고 말했다. 이어 "낙태죄는 여성의 신체·정신적 합병증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처벌에 대한 공포로 압박감마저 준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낙태죄 폐지는 세계적 추세다. 1960년대 낙태죄 폐지 운동이 부상하면서 1985년 36개 이상 국가에서 관련법이 바뀌었다. 이 나라들은 대부분 낙태를 보건·의료서비스의 하나로 관리하고 있다.

낙태, 보건·의료서비스로 접근해야

윌렌츠 담당관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여성들의 낙태 서비스 접근권을 법률로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일랜드에서도 낙태죄 폐지 찬반 국민투표에 앞서 많은 시민단체가 여성들의 낙태 서비스 접근권 보장제도를 요구했다. 이는 WHO의 안전한 인공임신중절을 위한 가이드라인(Safe abortion: technical and policy guidance for health systems) 중 하나다.

그는 아일랜드의 낙태죄 폐지에는 여성들의 참여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도 소개했다. 윌렌츠 담당관은 "아일랜드가 국민투표에서 높은 찬성(66.4%, 반대는 33.6%)이 나온 것은 여성들이 직접 자신의 낙태 경험을 공유하는 용기를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들은 전국적인 토론에도 참여하며 사회의 인식 격차를 줄여나갔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일랜드 공영방송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국민투표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요인(43%)으로 낙태죄 피해 여성들을 다룬 언론보도를 꼽았다.

시민단체들이 '낙태죄 이후' 모델을 제시한 것도 폐지론에 힘을 실어줬다. 아일랜드 유권자들을 대표하는 시민의회는 낙태죄 폐지와 관련해 '최대 12주 동안 요구가 있을 경우 가능해야 한다'는 의견을 국회에 냈다. 이후 아일랜드 하원의회에는 임신 주수에 따라 낙태 허용 여부를 따져야 한다는 법률 개정안이 제출됐다. 윌렌츠 담당관은 "시민단체에서 대안모델을 미리 제시한 것이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인, 보수성 짙은 아일랜드에서 압도적인 찬성표를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했다.

두 번째 헌재 판단 앞둬... 종교계도 예의주시
 
[시민사회포럼] 시민사회, 낙태죄 위헌을 논하다 - 토론회 자료집 관련 사진
 [시민사회포럼] 시민사회, 낙태죄 위헌을 논하다 - 토론회 자료집 관련 사진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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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낙태죄 폐지를 찬성하는 여론은 적지 않다. 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만 15~44세 여성 1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5.4가 형법상 낙태죄(269조, 270조) 개정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또 절반가량은 임신중절수술대상을 제한하는 모자보건법 14조 및 시행령 15조의 개정도 필요하다고 했다.

헌재 분위기도 2012년 첫 심판 때와 다르다. 당시 4대 4로 합헌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관들은 모두 퇴임했고,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새로 취임한 재판관 6명 가운데 유남석 헌재소장과 이은애·이영진 재판관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낙태죄 위헌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여느 때보다 낙태죄 폐지 가능성이 커진 만큼 종교계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지난 5일 천주교 생명운동본부는 "여성에 한해 형법상 낙태죄 처벌조항 폐지가 가능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현행 유지'만을 주장하던 기존 태도에서 한 발 물러선 것이었다.

하지만 21일 토론회에서 이한본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는 이를 두고 "이중적인 태도"라고 비판했다. 현행법은 낙태한 여성과 시술한 의료진을 처벌하는데, 이번에 천주교는 '의료진 처벌조항만 유지' 의견을 냈다. 이 변호사는 "(결국 천주교는) 낙태죄 폐지를 찬성하는 게 아니다"라며 "의사만 처벌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불법시술을 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자캐오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소속 신부는 종교계가 낙태죄를 어떻게 바라볼지를 더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종교는 사회를 통제하는 기구가 아니라 사회와 동행하는 존재"라며 "(종교계 안에서도) 낙태죄 폐지를 위해 합리적 판단을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여성들의 발언권은 통제된 상태"라고 평가했다.

그는 "여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지지하는 게 종교의 목적이다, 낙태죄도 그 갈래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또 "'생명이냐 선택이냐'로 단순화시킨 구도 너머에,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여성들의 고통과 홀로 짊어진 삶의 무게가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며 "여성이 아니라, 낙태죄가 문제"라고 강조했다.

태그:#여성, #낙태, #낙태죄, #헌법재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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