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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다. 표현주의는 꽤 개성적인 사조다. 남 눈치 보지 않고 자기만의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시적인 문장에 쓰이면 난해한 내용이 되기 쉽다. 그 좋은 예가 <나, 영원한 아이>다. 에곤 실레의 시적 단상 모둠인데, 비유투성이라 반구상화 같다. 그러나 주장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영원한 아이"로 살겠다는 것이다.
 
"영원한 아이"는 내면의 목소리, 즉 나다움에 올인하는 주체다. 에곤 실레에게 나다움은 곧 생명이다. 그가 미술학교 중퇴자의 삶으로 들어선 것도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다. 규범을 강제하는 학교생활이 나다움을 억압하는 "영원한 죽음의 마을"로 여겨져서다. 시키는 대로 해서 착하나 창의성은 없는 규격 인간을 대량 생산하는 "국가들은 진짜 살아 있는 것들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여겨 저항한 셈이다.
 
특히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는 자(죽음과 인간)'(1911)와 '세 명의 남성으로 구성된 자화상'(1911)처럼 살아있되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 존재를 응시하는 에곤 실레가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며 사회와 마찰하는 건 내게 자연스럽다. 더욱이 그의 시선은 대량생산에서 소량생산으로, 심지어 도로 맞춤생산으로 나다운 소비를 겨냥하는 미래산업 지향의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당시에는 시기상조였을 뿐이다.
 
당대를 지배하는 이념이나 세태 역시 살아있는 생물이어서 변화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에곤 실레는 미성년자인 소녀들을 모델로 하여 마을에서 쫓겨나거나, 에로틱한 작품 전시로 인해 구금된 경력이 있지만, 암튼 생전에 성공한다. <나, 영원한 아이>에 수록된 홀랑 벗어 까발린 '앉아 있는 남자의 누드'(1910)는 당시 큰 파문을 일으켰겠지만, 나는 "뼛속까지 혼자임을 느낀 순간"의 "감각"을 포착한 그 표현을 재밌어 하듯 에곤 실레에 대한 평가 또한 변화한다.
 
그 외에도 <나, 영원한 아이>는 에곤 실레의 웅숭깊음을 소개한다. 수록된 그림들, 즉 하나의 몸에 딸린 손이나 팔의 감각, 혹은 비틀림이나 꿈틀댄 표정 등 특정 부위 감각을 집중적으로 표현한 그림들 해석에 걸맞은 단상을 통해서다. "나는 만물로 존재하지만, 모든 것을 동시에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분과 전체, 또는 개인과 집단을 동시에 보는 생명평등사상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실재함의 관조와 어우러진다.
 
그것은 '5・18 망언'처럼 "같은 공간을 살지만 같은 세상을 살지 않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또한 그것은 "완벽하다! 모든 것이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다"가 암시하는 자연성 회귀를 바라보게도 한다. 살아있음이란 한 번 지나가면 그만인 바라봄의 연속 촬영이다. 그 무상을 향한 긍정적 마인드 "나는 인간이다, 죽음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한다."에서는 생명의 영원성에 닿은 경지마저 느껴진다.
 
에곤 실레가 스페인 독감으로 28살에 죽었으니까 20대 자아성찰치고는 올된 편이다. 그렇게 바라보니 언뜻 외설적이고 퇴폐적으로 보이는 작품들의 동적(動的) 기류가, 화단의 문제아로서 이런저런 구설에 시달리며 받은 냉대를 몸의 신음으로 변주한 몸부림 같아서 짠하기까지 하다. 그림들 자체가 에곤 실레다움을 전하는 "영원한 아이"의 시리즈인 셈이다.
 
<나, 영원한 아이>를 덮으며 난 '그림이 곧 예술가다'에 동의한다. 에곤 실레처럼 나다움에 올인한 예술가라면 돈과 권력이 사람 구실하는 걸 경계할 거라고도 아퀴짓는다. 나다움과 생명평등사상을 아우른 에곤 실레의 자화상들이 당분간 내게 잔상으로 머무를 듯하다.

나, 영원한 아이

에곤 실레 지음, 문유림.김선아 옮김, 알비(2018)


태그:#나, 영원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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