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급 투수' 선동열도 일본 진출 첫 해였던 1996년에는 5승1패3세이브 평균자책점 5.50으로 체면을 구긴 적이 있었다. '해외 축구의 아버지(해버지)'로 불리는 박지성도 2012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나 퀸즈파크 레인저스 FC, PSV아인트호벤에서 활약하던 선수 생활 말년엔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 현역 시절 '농구 대통령'이라 불리던 허재도 세계 무대에서는 그저 '아시아에서 농구 좀 하는 가드'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연아는 주니어 시절부터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세계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현역 시절 출전했던 모든 국제 대회에서 3위 이상의 성적을 거둔 김연아는 최고로 출발해 최고의 자리에서 스케이트화를 벗은 진정한 '피겨여왕'이다. 김연아는 은퇴 후에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최종 점화 주자로 나서는 등 피겨와 동계스포츠의 발전을 위해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활약하는 후배 선수들에게 김연아는 목표로 삼아야 하는 우상이자 넘기 힘든 거대한 산이기도 하다. 김연아가 한국 피겨 역사에 이룬 업적이 워낙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연아 키즈'들이 연이어 고전을 면치 못하던 작년 11월, 김연아 이후 처음으로 그랑프리 시니어 대회 메달을 목에 건 한국 선수가 등장했다. 유영, 김예림과 함께 차세대 유망주 3인방으로 불리는 '꼬부기' 임은수가 그 주인공이다.

2016년 혜성처럼 등장한 피겨계의 '초딩 3인방'
 
임은수 '열정 가득 담아' 임은수(한강중)가 13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아이스링크에서 열린 'KB금융 코리아피겨스케이팅 챔피언십 2019'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아름다운 연기를 펼치고 있다.

▲ 임은수 '열정 가득 담아' 임은수(한강중)가 13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아이스링크에서 열린 'KB금융 코리아피겨스케이팅 챔피언십 2019'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아름다운 연기를 펼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연아가 시니어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2000년대 중·후반부터 피겨 여자싱글 종목은 아시아 선수들이 득세를 이뤘다. 한국은 일당백의 활약을 펼치던 독보적인 에이스 김연아가 있었고(사실 김연아 밖에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지만) 선수층이 넓은 일본은 '김연아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를 필두로 스즈키 아키코, 안도 미키, 무라카미 카나코 등이 시니어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한국은 김연아의 뒤를 이을 선수가 마땅치 않았다. 김연아가 전성기를 달리던 시기, 김연아의 수리고 후배로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 함께 출전했던 곽민정은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 동메달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14-2015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곽민정은 2017년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과 작년 평창 아시안게임에서 해설위원으로 변신했다.

'진정한 김연아 키즈'로 불리며 한국 여자 피겨 싱글의 쌍두마차로 주목 받았던 박소연과 김해진 역시 피겨 팬들의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특히 초등학교 5학년 때 트리플 5종 점프(토루프, 살코, 루프, 플립, 러츠)를 완성시키며 큰 기대를 모았던 김해진은 성장 과정에서 잦은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노비스 시절에 보여준 잠재력을 폭발시키지 못한 김해진은 만 20세의 어린 나이에 빙판을 떠났다.

'김연아 키즈'로 주목을 받았던 박소연과 김해진 대신 한국을 대표해 평창 동계 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는 바로 최다빈이었다. 기술의 화려함은 다소 떨어지지만 실수가 적고 표현력이 뛰어난 최다빈은 2017년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피겨 역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작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총점 199.26점으로 7위에 오르며 김연아를 제외하면 올림픽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한 한국 피겨 선수가 됐다.

2000년생 최다빈보다 3살 어린 2003년생 임은수는 2016년 종합선수권대회에서 초등학교 6학년의 나이로 쟁쟁한 시니어 언니들을 제치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당시 임은수를 주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만11세 8개월이라는 역대 가장 어린 나이로 종합선수권 우승을 차지한 '천재소녀' 유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영보다 먼저 시니어에 데뷔해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쪽은 임은수였다.

김연아 이후 처음으로 시니어 대회 메달 차지한 '꼬부기' 임은수
 
우아한 연기 펼치는 임은수 임은수가 12일 오후 서울 목동실내빙상장에서 열린 KB금융 코리아피겨스케이팅 챔피언십 2019 여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 우아한 연기 펼치는 임은수 임은수가 12일 오후 서울 목동실내빙상장에서 열린 KB금융 코리아피겨스케이팅 챔피언십 2019 여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 연합뉴스

 
임은수는 2016년 2월에 열린 동계체전 초등부 경기에서 언론의 주목을 독차지한 유영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며 '언니'의 자존심을 지켰다. 2016-2017 시즌 주니어로 올라선 임은수는 2016 아시안 트로피에 이어 2016년 주니어그랑프리 독일 대회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며 김연아 이후 처음으로 주니어 데뷔 시즌에 메달을 딴 한국 여자 싱글 선수로 기록됐다. 그리고 이어진 2017년 종합선수권에서는 김예림과 유영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2016-2017 시즌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 4위에 오른 임은수는 2017-2018 시즌에도 주니어 그랑프리 오스트리아 대회 2위, 세계선수권대회 5위를 차지하며 순조롭게 성장했다. 그리고 2018년 2월 만 15세가 되면서 2018-2019 시즌부터 시니어 데뷔를 하게 됐다. 15세 8개월 만에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한 임은수는 데뷔 무대였던 2018 NHK트로피에서 196.31점을 기록하고도 6위에 그치며 시니어 무대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하지만 임은수는 일주일 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로스텔레콤컵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대회 우승자는 평창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알리나 자기토바였고 은메달리스트는 2019년 유럽선수권 챔피언 소피아 사모두로바였다. 세계 정상급 선수가 2명이나 출전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던 그랑프리 대회에서 당당히 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임은수는 지난 2009년 김연아가 마지막으로 시니어 그랑프리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9년 만에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메달을 차지한 첫 번째 한국 선수가 됐다. 

임은수의 스케일 큰 점프는 이미 주니어 시절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뛰어난 활주 스피드를 활용한 높고 시원한 점프는 임은수의 최대 강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임은수는 이미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선수로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과 경쟁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평가 받는 스핀이나 스텝 같은 비점프 요소를 보완하지 못한다면 임은수 역시 '포스트 김연아'가 되지 못했던 많은 선배들처럼 성장 과정에서 한계에 부딪힐 수도 있다.

유영은 역대 최연소로 종합선수권 우승을 차지했고 김예림은 13년 만에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출전했으며 임은수는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 메달을 목에 걸었다. 3년 전 종합 선수권에서 '초딩 3인방'이라 불리던 선수들이 한국 여자 피겨의 기둥으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시즌을 거듭할수록 빠른 성장 속도를 보이고 있는 임은수가 2019년 또 한 번 업그레이드를 한다면 2022년 베이징 올림픽 세대의 선두주자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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