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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지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무대가 된 하노이는 베트남의 천년 고도다. 강(河·베트남어로 '하')의 안쪽(內·베트남어로 '노이')에 있다는 뜻을 지닌 이 도시는 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수도로 남부 최대도시 호찌민으로부터 1천760㎞가량 떨어져 있다. 기원전 3천년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하노이는 6세기 무렵부터 베트남의 중심 도시가 됐으며 11세기 리 왕조가 수도로 삼았다. 사진은 하노이 전경.
▲ 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지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무대가 된 하노이는 베트남의 천년 고도다. 강(河·베트남어로 "하")의 안쪽(內·베트남어로 "노이")에 있다는 뜻을 지닌 이 도시는 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수도로 남부 최대도시 호찌민으로부터 1천760㎞가량 떨어져 있다. 기원전 3천년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하노이는 6세기 무렵부터 베트남의 중심 도시가 됐으며 11세기 리 왕조가 수도로 삼았다. 사진은 하노이 전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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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에서 오는 27~28일 양일간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기로 확정되면서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 양국은 1950년 1월 정식수교를 맺고 사회주의 형제국이 됐다. 두 나라는 제국주의 식민지배 및 일본 점령의 경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대가 열리면서 남북 분단을 겪은 점, 국제전으로 비화된 통일전쟁의 쓰라린 경험, 중소 분쟁 당시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추구한 점 등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베트남과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 남한은 남베트남과, 북한과 북베트남과 각각 수교를 맺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으로 볼 때 호치민과 김일성은 필연적으로 매우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1956년 말 북한은 베트남 하노이로 조선문화대표단을 파견했다. 베트남 국부 호치민이 다음해인 1957년과 1961년에 북한을 방문했다. 1958년과 1964년엔 김일성이 북베트남을 방문했다. 1964년은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쟁이 시작된 해였다. 남한이 미국의 요구로 전투병을 파병했듯이, 북한도 북베트남에 1964~1969년까지 무기 10만정과 군복 100만벌을 지원하고 공군 조종사를 파견했다. 베트남에 파견된 이들 조종사들은 소련이 제공한 미그 전투기를 몰고 참전했다. 그 전체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14명의 전사자 묘가 하노이 인근 박장성에 조성돼 있다. 지난 2002년에 북한으로 유해가 송환돼 '조선인민군 영웅열사묘'에 안장됐다.  

베트남전과 김일성
   
11년에 걸친 전쟁 끝에 통일을 이룩한 베트남은 이후 공산당이 주도하는 개혁개방을 선택, 변화를 추구했지만 북한은 주저했다. 경제개혁이 야기할 정치적 변화를 두려워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 돈독했던 양국의 유대관계는 1980년대부터 느슨해졌다. 1992년 베트남이 한국과 수교하고 1995년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하자 양국 관계는 형식만 남았다. 그러다 지난 2007년 호치민 주석 이후 처음으로 농 득 마잉 총비서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면서 관계 회복의 전기를 맞았다. 

최근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과의 도보다리 회담 당시 경제개발 모델로 베트남을 관심에 두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베트남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졌다. 베트남은 프랑스를 상대로 한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1950년대부터 전 세계 사회주의자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이후 미국을 상대로도 맞서 싸운 호치민은 청렴과 도덕성의 상징이 됐고, 전 세계 젊은이의 영웅이 됐다. 베트남전쟁에서의 북베트남인들의 희생과 투쟁방식은 일본의 전투적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찬가지로 북한과 김일성에게도 확고부동한 영향을 줬다. 특히 북한 국내정치와 대남정책에 많은 영향을 주면서 북한정치사를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남조선혁명론'이다.

북한은 베트남전쟁 초기 남한에서 베트남전에 영향받아 남조선혁명(공산화)의 기운이 무르익기를 기대했다. 북한과 김일성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북조선 현대사>(2014)에 따르면, 북한은 스스로가 남조선혁명을 위한 기지라고 생각했다. 북쪽의 민주 근거지를 더욱 강화하고 북에서 남으로 바람을 불어넣어 남쪽의 변혁을 한층 더 촉진시킨다는 방책이 취해졌다. 이는 6.25 전쟁 이전 남과 북에 각각 정권이 수립된 때부터의 사고방식이었다. 당시는 남쪽에서 공산주의자가 지도하는 저항운동(소요)과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이 많았다.

1961년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김일성은 위기감을 느꼈다. 한 달 뒤인 6월 북베트남의 지도자인 호치민이 평양을 방문했다. 와다 교수는 같은 책에서 "김일성에게 호치민의 방문은 흥분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썼다. 1965년 2월부터 미국은 북베트남 폭격을 개시했다. 같은해 6월 남한의 박정희 정권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내용 없이 한일기본조약을 조인했다. 한·미·일 삼각동맹을 바라는 미국이 조약 체결을 재촉했고, 북한은 이에 대해 강력 반발했다. 

한국은 미국의 요구에 응해 곧바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북한에게 베트남은 사회주의 우방으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연대의 원칙하에 북베트남 측에 서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가운데 남한혁명이 북한 지도부의 현실 목표로 부상했다. 남베트남에서 일어난 폭력을 동반한 소요, 봉기 등이 남한 인민에게 영향을 줄 것이며, 그것이 남한혁명의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개전 초기 베트남전은 북한의 무력 통일 의지를 고무한 것이다. 1966년 10월 5~12일까지 일주일간 열린 조선노동당 제2회 대표자회의서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조선혁명은 세계혁명의 한 고리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는 힘을 합쳐 싸우는 윁남(베트남) 인민을 지원해야 하고, 북한의 당과 인민은 윁남에 대한 미제의 침략을 자신에 대한 침략으로 인정하며 싸워야 한다(...). 한반도의 민족적 과업은 조국의 통일과 혁명의 전국적 승리이며, 이를 위해 북반부를 혁명의 위력한 기지로 만들고, 남한에서 혁명세력을 강화하여 혁명투쟁을 발전시켜야 한다(...). 남조선혁명의 기본적 임무는 미제국주의의 침략 세력과 그 주구들을 타도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선 (남반부에) 맑스-레닌주의 당을 조직하여, 혁명세력을 준비해야 한다" (<노동신문>, 1966. 10.6.)

혁명에 의한 통일 구상이 천명된 것이다. 와다 교수는 "베트남 사태와 한국의 출병에 자극받은 김일성은 한국에서의 혁명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다"고 주장했다. 베트남으로 보내는 지원병 파견도 곧바로 결정됐다. 김일성은 같은달 19일, 파견을 앞둔 제203 공군부대 조종사들을 만나 격려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이러한 방침을 두고 대립이 일어났다. 박금철 당비서 겸 정치위 상무위원과 당시 남조선 공작의 총책임자였던 리효순 당연락부장, 김도만 선전선동부장 등이 비판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중 박금철과 리효순은 김일성이 수행한 전투 가운데 가장 유명한 '보천보전투' 당시 국내에서 호응·협력했던 국내파 '갑산계' 공산주의자였다. 1967년 6월, 이들은 모두 해임·추방됐다. 1967년은 보천보전투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들은 김일성이 속한 빨치산파(만주파)를 제외하고 최후까지 생존한 계파였다. 연안파·국내파·소련파 등은 이전에 모두 숙청됐다. 김일성이 누구와도 권력을 나눠 갖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베트남 내 투쟁이 진전됨에 따라 북한은 이에 호응, 고무돼 '제2전선'을 구축하려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와다 교수는 남한에서 반미와 반박정희를 목표로 한 혁명적 항쟁인 "혁명적 대사변"이 일어나면 북한이 '유격대 남파'를 포함한 적극 지원방안을 채택하려 했다고 봤다. 

그러나 '실천적' 투쟁을 관철해온 베트남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1967년 8월 26일, 슈트라우스 동독 대사를 만난 호안 무이 베트남 대리대사는 다음과 같이 북한을 맹비난했다. 

"조선노동당 지도부의 정책은 전혀 맑스-레닌주의적이지 않다." "대외정책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는 두 얼굴을 갖고 주변국들을 조종한다. 그들은 허위와 사기를 동원하고 있다. 우리에겐 이렇다 말하고, 중국인에겐 저렇다 말하며, 소련인에겐 또다시 다른 말을 한다. 이런 것은 오래 잘될 수는 없다." "공화국(북한)은 우리를 힘닿는 한 지원해주겠다고 하지만, 주로 말에 그치고 있다." "조선(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에 대한 소문은 프로파간다다. 조선의 정세는 우리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동독 외무성 자료 G-A-364)

와다 하루키는 "베트남인의 실천적인 관점에서 보면,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말뿐인 연극처럼 보였을 것"이라며 "베트남은 북한을 신용하지 않았다, 북한이 해온 것은 짝사랑 비슷한 것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북한은 진지했다"라고 전했다. 그즈음 북한은 남한으로 유격대를 보냈고, 비밀리에 자신들과 연락을 취하는 혁명조직을 건설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보낸 유격대원 31명이 청와대 인근까지 진격했다. 남한이 '김신조 사건' 혹은 '1.21 사태'라고 부르는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이다. 이틀 후인 23일엔 북한이 자국 영해를 침범했다며 미 함정을 나포하는 '프에블로호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맹렬히 반발했고, 소련은 북한의 일련의 대담한 행동에 아연실색했다. 31일 남베트남에서 '테트공세'라 불리는 대규모 기습공격이 개시되자, 김일성은 자신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같은해 8월 20일 제주도 해안에서 북한 특공대(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발생해 12명이 사살되고 2명이 잡혔다. 이들 생포자의 진술로, '통일혁명당' 간첩단이 색출됐다. 25일 통일혁명당이 일망타진됐다고 발표됐다. 통일혁명당은 이전에 여러 차례 북한에 잠입해 북한 당국과 협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종태, 김질락, 리문규 등 핵심 멤버가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됐다. 같은해 11월 2일, 울진·삼척에 100명가량의 유격대원(무장공비)이 상륙했으나 거의 토벌당했다. 다음해 8월 16일, 주문진에 또다시 남파 공작원이 출현했다. 

이러한 일련의 침투 사건을 북한 <노동신문>은 모두 남한 내에서 '자생적으로' 조직된 무장 유격대의 공격 사건이라고 보도하며, 자국 병사의 파견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북한 측은 "무장한 소부대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출현해 괴뢰 경찰부대와 총격전을 벌였다"거나 "미제 침략군 초소를 습격해 양키를 처단했다" "남쪽 인민이 열차를 탈선·전복시키는 등 투쟁에 나서고 있다"고 허위 선전했다. 

진실은 다음과 같았다. 남쪽에 상륙한 무장 유격대는 마을에 들어가 '혁명선전'을 하며 무장투쟁에 나설 것을 독려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를 '거부'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북조선 현대사>는 "유격대 작전이 베트남에 호응해 남조선혁명을 일으키려는 목적이었다면, 그것은 이미 1968년 단계에서 한국인들에게 거부당함으로써 처절한 실패를 맛봤다"며 "베트남의 혁명 방식은 한반도에선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남베트남해방민족전선 평양대표부는 동독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조선에 대중에게 일정한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조직된 혁명 그룹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동독 외무성 자료 C-1025-73)

김진환 건국대 연구교수는 <베트남전쟁 시기 북한의 대외정책>에서 "기대했던 남한의 반전운동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김일성은) 자신의 모험주의적 군사행동 탓에 남조선혁명 가능성이 더욱 낮아지자 박정희 정부와의 대화 노선으로 전환했다"면서 "미국은 북한이 요구한 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일축했고, 북한이 바라던 주한미군 철수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베트남에서 또다시 교훈 찾으려는 북한  

역사는 다시 돌고 돌아, 북한은 현재 미국에게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핵리스트 제출 등 완전한 비핵화를 원하고 있다. 박정희를 대화 상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김일성은 1972년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우리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가 저지른 짓"이라며 김신조 사건을 사과했다. 이미 공작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최고위급 간부들을 해임한 상태였다. 베트남전쟁과 통일은 남한에도 '우방의 패배'라는 시사점을 안겨줬다. 남북 모두 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분단 이후 최초로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과 민족단결을 도모하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냈다.

지난해 12월 초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베트남을 방문했다. 리 외무상은 베트남의 외자 유치와 관광산업 발전 방안 등 도이머이(쇄신) 노하우를 익히고, 양국 간 교류협력 확대를 위해 방문했다고 알려졌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전후로 김정은 위원장이 베트남을 국빈 방문할 가능성도 제기됐다.

북한은 또다시 베트남을 본받으려 하고 있다. 북한이 베트남 식의 개혁개방을 도입하는 것에 대해 긍정론과 부정론이 맞서고 있다. 집단지도체제인 베트남과 달리 수령독재체제인 북한은 개혁개방을 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북한처럼 대안적 정치세력이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에선 경제성장의 체제 안정화 효과가 매우 클 것이란 진단도 있다. 과연 북한이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갈지 국제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북조선 현대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기정 옮김, 창비, 2014
<베트남전쟁 시기 북한의 대외정책>,《사회와역사》 105호 , 김진환, 한국사회사학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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