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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에 이어, 이번에는 <상도길>이다. - 기자말

▶ 코스안내 : ①숭실대학교 - ②부부독립운동가 박영준·신순호 집 터 - ③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과 사저 - ④상도동 철거투쟁의 현장 - ⑤현대판 송덕비 <동작을 빛낸 인물> - ⑥복개천(상도천, 대방천) - ⑦장승배기 장승 - ⑧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과 우덕주 대령
  
숭실대 정문을 나와 큰길을 따라 상도역 방면으로 100m 정도 걸어 내려가다 보면 길 건너에 웰빙마트 상도점이 보인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웰빙마트가 있는 자리는 독립운동가 박영준‧신순호 부부의 2층 집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1970년 박영준‧신순호 부부 자택 화재 사건으로 독립운동의 소중한 역사가 담긴 문화재가 하마터면 다 타버릴 뻔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개 넘어 동작동 국립묘지(현 서울현충원)에 동지들이 묻혀 있는 애국지사 묘역이 조성된 탓일까?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어서 그랬을까? 해방 이후 상도동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정착해 살았다.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한 박영준·신순호 부부도 그런 경우였다.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나선 박영준‧신순호 부부
 
박영준-신순호 부부의 결혼증서(1943) 함께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던 박영준-신순호 부부는 1943년 12월 12일 임정요인들의 축하 속에 충칭에서 결혼식을 한다.
▲ 박영준-신순호 부부의 결혼증서(1943) 함께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던 박영준-신순호 부부는 1943년 12월 12일 임정요인들의 축하 속에 충칭에서 결혼식을 한다.
ⓒ 경기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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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1915-2000)과 신순호(1922-2009)는 한국광복군에서 함께 활동하던 중 결혼한 부부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결혼하는 경우는 여럿 있다. 하지만 박영준·신순호 부부는 대단히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우선 이들 부부는 둘 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아들딸로 2세대 독립운동가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박영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장을 역임한 박찬익의 아들이고, 신순호는 임시정부 재무부차장을 역임한 신건식의 딸이자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신규식의 조카이다.

박영준의 아버지 박찬익은 이미 대방길을 걸으면서 서울공고 이야기를 할 때 소개한 바 있다(관련 기사 : 서울공고가 대한민국 독립에 끼친 영향, 정말 대단하네). 박찬익은 서울공고의 전신인 공업전습소 출신으로 최초의 공업기술지인 <공업계> 발간인이자 공업연구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기반하여 독립운동을 벌인 이래 줄곧 항일외교의 최전선에 서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신순호의 아버지 신건식는 충북 출신의 유명한 4형제 독립운동가(신연식, 신규식, 신건식, 신동식) 집안의 넷째였다. 신건식은 형 신규식과 함께 육군무관학교를 다녔고, 경술국치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래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원과 재무부차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신순호의 어머니 오건해는 망명이후 임시정부의 안살림과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를 맡아 한 인물이었다. 사위 박영준의 회고(<한강물 다시 흐르고 ; 박영준 자서전>) 에 따르면 "독립운동가치고 오건해 여사의 음식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은 오건해 여사는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평생을 보낸 분"이었다. 1937년경에는 병약해진 당시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의 병환 치료에 정성을 다했고, 만주에 가족을 두고 홀로 충칭으로 와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미래의 사돈 박찬익의 뒷바라지에도 힘썼다.
 
중앙군관학교 군의관 시절의 신건식(왼쪽)과 박찬익(1931) 신건식은 신순호의 아버지이며, 박찬익은 박영준의 아버지이다.
▲ 중앙군관학교 군의관 시절의 신건식(왼쪽)과 박찬익(1931) 신건식은 신순호의 아버지이며, 박찬익은 박영준의 아버지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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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신순호(가운데)의 가족자신 왼쪽은 어머니 오건해, 오른쪽은 아버지 신건식
▲ 독립운동가 신순호(가운데)의 가족자신 왼쪽은 어머니 오건해, 오른쪽은 아버지 신건식
ⓒ 신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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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앙군관학교 졸업 당사의 박영준(가운데, 1939) 박영준은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광복군 3지대(지대장 김학규) 1구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 중국 중앙군관학교 졸업 당사의 박영준(가운데, 1939) 박영준은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광복군 3지대(지대장 김학규) 1구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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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아버지를 처음 만난 박영준과 신순호

1922년생인 신순호는 태어난 과정부터 극적이다. 아버지 신건식이 1920년대 초 임시정부의 임무를 안고 국내로 잠입해서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신순호 여사의 어머니가 임신을 하면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아버지 신건식는 1921년 10월 임무를 마치고 압록강을 건너다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지만, 1922년 병보석 상황에서 다시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다.

신순호는 5살 때인 1926년에 어머니 오건해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여 아버지 신건식과 극적으로 상봉하는 데 성공한다.

1915년 만주에서 태어난 박영준이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16년 후인 1932년이었다. 열여덟의 박영준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상하이를 거쳐 찾아간 남경의 한 여관방에서였다. 이후 만주에 있던 가족들 역시 남경에 도착하여 잠시나마 아버지 박찬익을 포함한 한 가족이 모여 사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임시정부의 안살림꾼으로 유명한 정정화의 회고(<장강일기>)에 따르면 고운 용모의 신순호는 임시정부에서 일하던 여러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영준과 신순호 집안은 부모 사이에 교류가 긴밀했던 관계로 일찍이 인연이 맺어졌다는 것이다.

박찬익과 신건식의 형 신규식은 1909년 <공업계> 발간 때부터 사장 겸 편집인(신규식)과 발행인(박찬익)의 관계로 만나 일찍이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형 신규식이 1922년 사망한 이후는 물론 박영준과 신순호가 결혼한 이후에도 신건식는 박찬익을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하니 두 집안의 긴밀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부부 이전에 동지
 
박영준의 임시정부 이재과장 임명장(1943) 박영준은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광복군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한다.
▲ 박영준의 임시정부 이재과장 임명장(1943) 박영준은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광복군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한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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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인 박영준과 신순호도 결혼하기 전부터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1938)와 한국광복군(1940)에서 함께 활동하는 동지였다. 1938년 10월 임시정부 요인과 한인 동포들을 태우고 광저우성 포산(佛山)에서 산수이(三水)로 피난 가던 기차가 일본군 비행기의 기관총 공격을 받았을 때도 부상당한 박영준을 옆에서 지킨 이가 바로 신순호였다.

박영준은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나와 한국광복군 제3지대 1구대장과 임시정부 이재과장을 역임하였고, 신순호는 한국광복군에서 선전활동을 맡았고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에서 근무하면서는 중국 중앙방송국의 한인 상대 한국어 방송 관련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박영준과 신순호는 1943년에 충칭 임정청사 대례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박영준의 회고에 따르면 "이 당시 중경의 한인 사회는 400명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동지 간에 결혼을 한다는 것은 다소 드문 일이기도 했다. 결혼식장인 임시정부 강당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가족들과 중경에 있는 한인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대한민국 이십오년 십이월 십이일'에 결혼했음을 증명하는 붉은 비단에 파란 글씨의 결혼증서가 전한다. 결혼증서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았던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보인다. 백범 김구는 주례로, 조소앙은 증혼으로, 민필호와 엄항섭은 소개로 등장하고 있다.

조완구(한국독립당), 김원봉(조선민족혁명당), 김성숙(조선민족전선연맹) 등 당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각 당 대표들의 축사도 있었다. 조완구가 "비록 성은 다르지만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축사를 했다는데, 이는 참석한 모든 이들의 심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박영준·신순호 부부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도 주화대표단 단장을 맡은 박찬익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하다 1948년에야 귀국하는데, 박영준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많던 국군에 참여하여 소장으로 제대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을 지키는 역할도 수행했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독립운동 관련 유물 2129점

박영준‧신순호 부부의 결혼증서를 비롯하여 박찬익·신건식의 독립운동 관련 유물 2129점은 박영준‧신순호의 딸 박천민이 2014년 경기도 박물관에 기증하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궤짝 두 개에 담겨 있던 이 유물은 6·25한국전쟁의 참화에도 살아남았는데, 1970년에 일어난 박영준‧신순호 부부의 상도동 자택 화재로 하마터면 불타 없어질 뻔했다.

당시 박영준‧신순호 부부의 집은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고 하는데, 화재는 당시 한전 사장으로 근무하던 남편 박영준이 없는 상황에서 2층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이때 신순호는 1층에 있던 두 개의 궤짝을 밖으로 옮기는 일을 제일 먼저 했다고 한다.

딸 박천민은 "궤짝만 지키고 있으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느라 중학교 졸업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교복과 책이 다 불타는 것을 어쩌지 못했고, 결국 졸업식에는 사복을 입고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00살의 활동가 임우철

해방 이후 상도동에서 생활한 독립운동가로는 박영준‧신순호 부부 말고도 김성호, 김중화, 김지환, 남정각(남영득), 서병철, 신공제, 이경도, 이대산, 이성구, 이수현, 이인곤, 김명수, 임우철, 채수반 등이 더 있다.

이중 독립유공자 임우철(1920~ )은 100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모습으로 최근 2·8독립선언 100주년 서울 기념식(서울YMCA 대강당)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 지하철 7호선 상도역 인근에 살고 있다.
 
 독립유공자 임우철과 보춘처장 피우진 독립유공자 임우철이 상도동 집에서 보훈처장 피우진과 함께 독립유공자 명패를 달고 있다
▲ 독립유공자 임우철과 보춘처장 피우진 독립유공자 임우철이 상도동 집에서 보훈처장 피우진과 함께 독립유공자 명패를 달고 있다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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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독립유공자협회(회장 조영진)에 따르면 현재 살아계신 독립유공자는 35명이라고 하는데, 이중 임우철을 비롯한 세 분이 동작구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임우철은 일본 동경의 공옥사고등학교 토목과에 재학 중(1941-1942) "동급생들과 함께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이용해 한국인으로서의 자각을 키울 필요가 있으며 귀국하면 한국인만의 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자본을 육성하고 공업학교의 교원이 되어 청소년을 훌륭히 육성하는 한편 한국어를 널리 보급하여야 하며 궁성요배는 불필요하다는 등 민족의식을 함양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른 분이다(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지난 1월 25일에는 피우진 보훈처장이 독립유공자 임우철의 집을 방문하여 대문 앞에 독립유공자 명패를 부착하는 행사를 하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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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