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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응급의료 센터장으로 일했던 고 윤한덕 센터장.
 중앙응급의료 센터장으로 일했던 고 윤한덕 센터장.
ⓒ 중앙응급의료센터

피범벅이 된 환자. 심정지로 응급 제세동이 필요한 환자가 실려 왔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숨을 붙여놓기 위해, 고도의 집중과 판단이 오간다. 연락 한 통도 놓칠 수 없다. 분초를 다투는 응급의료는 이렇게 의료진 한 명, 한 명이 중요하다. 자신의 근무지에서 홀로 삶을 마감한 고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도 그런 의료진 중 하나였다. 

그는 응급 의료체계의 변화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했다. 사망 직전 사무실 데스크 앞에 놓여 있었던 수많은 서류들이 방증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윤 센터장은 명절 전 1주일 동안 줄곧 병원에서 머무르며 전국 응급의료기관의 운영현황과 설 재난대비 비상연락망을 점검했다. 평소에도 응급의료기관 평가 결과에 따른 민원 등으로 휴가를 가지 못한 채 수많은 격무에 시달렸다고 한다. 
  
결국 그의 직무환경과 높은 책임감에 따른 만성적인 스트레스, 높은 긴장도를 유지해야 하는 응급의료시스템, 빈번하게 일어나는 돌발적인 사건들이 그의 심장을 멈추게 했으리라. 

헌신과 죽음

'KAROSHI(가로시).' 과로사의 일본어 발음인 이 말은 2002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됐을 정도로 유명하다. 사실 과로사는 의학용어라기보다는 장시간 노동으로 돌연 사망하는 노동자들을 설명하는 사회용어다.

일본에선 과로사가 수십 년 전부터 문제였다. 결국 2014년에는 '과로사 방지법'을 제정, 정부가 과로사 위험성을 교육·예방하도록 하고 2016년부터 매년 <과로사 백서>도 만들고 있다.

한국은 201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평균 노동시간 3위(연간 2024시간)로, 일본보다 더 많이 일하는 나라다. 과로사 문제 역시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위한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과로사 방지법 제정 필요성을 논의 중이다.

갑작스레 윤한덕 센터장이 세상을 떠난 원인도 과로사로 추정되고 있다. 그와 함께 응급의료체계의 기틀을 닦아온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장은 7일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윤 센터장은 15년 이상 응급의료를 어떻게든 정착시키려고 굉장히 무리를 많이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과로사로 숨진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헌신'이라는 말이 뒤따른다. 고 윤한덕 센터장 또한 대한민국에서 밤낮없이 환자를 돌본 참된 의사, 모두의 발전을 위해 애쓴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의대생으로 지켜보니 대부분의 대학병원 수련의나 교수는 병원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 같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선배들의 병원 실습 후기에는 수련 중 병원을 뛰쳐나간 이들의 사례가 쉽게 등장했다.
 의대생으로 지켜보니 대부분의 대학병원 수련의나 교수는 병원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 같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선배들의 병원 실습 후기에는 수련 중 병원을 뛰쳐나간 이들의 사례가 쉽게 등장했다.
ⓒ unsplash.com
  
그러나 사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분명 새로운 헌신을 끊임없이 요구할 것이다. 이국종 센터장의 말처럼.

"저는 윤한덕 선생님이 굉장히 많이 헌신하신 부분도 있지만, 대한민국에는 윤한덕 선생님 같이 일하는 사람이 더 많이 나와야지 사회가 한 발짝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대생으로 지켜보니 대부분의 대학병원 수련의나 교수는 병원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 같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선배들의 병원 실습 후기에는 수련 중 병원을 뛰쳐나간 이들의 사례가 쉽게 등장했다.

그래도 몇몇 의사들은 주 최대 80시간 수련하도록 한 '전공의 특별법'이 도입되면서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고 했다. 주 100시간 이상의 살인적 근무에서 벗어나니 도망가는 수련의 숫자가 약간은 줄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하지만 주 80시간도 정상적인 근로시간이 아니다. 고용노동부는 산업재해와 직무 간의 관련성을 평가할 때 주 평균 60시간 이상 근무하면 뇌심혈관 질병과 관계가 강하다고 본다.

통계적으로도 주 80시간 근무는 다양한 질병에 노출될 확률이 높다. 미국의 한 역학연구 저널에 따르면, 장시간 노동을 할 경우 정상노동보다 약 2배가량 심혈관계 질환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스칸디나비아 노동환경센터 연구 결과, 아시아국가에서는 주 55시간 이상 일하면 40시간 이하 근무자보다 우울증상 발생률이 1.5배 이상 높다고 나오기도 했다.

헌신을 위한 과로는 당연한 것일까. 환자는 건강하게 병원을 나가는 반면, 의료진은 병원에서 우울하게 병을 안고 나간다면 공익에 부합하는 것일까.

윤한덕 센터장이 끝까지 놓지 않았던 업무는 누군가 다시 이어가야 한다. 그런데, 그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꾸 헌신이라고만 하지 말자. 공익을 위해 한 사람의 생명을 담보하는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지 않은가.

'공익을 위해서'라면 괜찮은 걸까
  
일본은 한때 수련의 업무시간을 주 50~60시간으로 지켰다. 그 소식을 접한 한국 의대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일본에서 과로사한 의사들 이야기가, 주 60시간 이상 일하는 의사의 비율이 증가한다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고소득 전문직은 근무시간과 관계없이 성과만으로 임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도입하려고 추진 중이다. 일하는 방식을 시간보다 성과에 중점을 두려는 목적이라고 하지만, 이 법이 악용될 경우 근무시간 제한은 없어진다. 

이처럼 나라 안팎에서 돈을 위해서라면, 발전을 위해서라면 노동자의 건강에 역행하는 정책들이 서슴없이 쏟아지고 있다. 이 분위기 속에서도 의료계를 위해, 공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선생님이 존경스럽다.

하지만 나는 두렵다. 또 다른 '헌신적' 죽음이 뒤따를까봐 너무나 두렵다. 언젠가 의사가 될 나는, 의사 윤한덕의 죽음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태그:#윤한덕 , #과로사, #중앙응급의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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