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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의 죽음은 한국 사회를 느리지만 조금씩 바꾸고 있습니다.  28년 묶여 있던 산업안전보건법이 높은 국회의 입법 장벽을 넘어 개정됐고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도 시작됐습니다. 그의 죽음의 의미를 짚어봅니다.[편집자말]
 
컨베이어벨트 사고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근무한 충남 태안군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 모습.
 컨베이어벨트 사고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근무한 충남 태안군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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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전에 태안에 세워진 두 발전소의 시작을, 그 거대한 구조물의 기이한 탄생을 이야기해야 한다. 대체 그 시작은 언제일까?

2017년 12월 21일. 이날 언론은 일제히 태안화력 9, 10호기의 준공식을 보도했다. 국내 최대 용량의 발전소. 국내 표준화력인 500MW의 무려 두 배의 용량 이상으로 건설된 9, 10호기. 발전효율을 1.5%로 높여 온실가스를 감축하는 친환경발전소. 연료비를 300억원 이상 절감할 미래형 발전소. 태안 9, 10호기에 붙여진 찬사는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서부발전은 6년 전인 2011년 34년간 발전소 건설에 몸담아왔다는 '건설의 달인' 건설차장을 내세워 타 발전소보다 최소 6개월 가량 건설기간을 단축하겠다고 장담했다. 비록 건설기간 중 도급사 및 하도급사의 부도가 있었지만 기어이 '최단기간'의 자부심은 지켜낼 수 있었다.

태안 9,10호기 건설에 참여했던 건설 도급사들은 '저가 입찰'의 압박을 못 견디고 줄줄이 부도를 내거나, 부도를 내기 직전에서야 손해를 감수하고 철수해야 했다. 이 와중에 두 명의 건설 노동자가 60미터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사망 당시 인건비를 아끼려고 시멘트 타설 전문공 대신 비전문가인 플랜트공을 현장에 투입했기 때문이라는 플랜트노조의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은 서부발전이 9, 10호기를 최단기간 건설해내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2017년 12월 21일, 태안9, 10호기 준공일, 언론은 정영철 서부발전 직무대행의 자부심을 전했다.

"서부발전은 어려운 공사여건에도 불구하고...국내 최초로 1,000MW 화력발전 시대를 개막하는 쾌거를 이뤘으며...태안 9,10호기에 자부심을 느끼며..."

태안 9, 10호기는 그 태생부터 취약했다. 아니, 모든 종류의 취약함이 폭력적으로 할당되었다. 건설단가, 공기단축의 쾌거는 건설 하청업체들의 부도와 하청노동자의 죽음으로 전가되었는데, 이 취약성을 분배하는 방식 때문에 특정 인구 집단은 자의적 폭력에 더 예속된다. 우리는 이 방식을 '외주화'라고 이름 붙인다.

 
컨베이어벨트 사고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근무한 충남 태안군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 모습.
 컨베이어벨트 사고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근무한 충남 태안군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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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뿐만이 아니다. 태안 9, 10호기는 그 자체가 거대하고 위태로운 구조물로 태어났다. 애초에 서부발전의 자부심으로 태어났지만 서부발전 직원의 일터가 아닌 곳, 그 외부로 설계되고 건설된 발전소였다.

1000MW급의 대용량 화력을 생산해내기 위해 노동자들은 점심시간과 휴게시간을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끊임없는 고장들을 다 감당할 수는 없었다. 컨베이어 벨트가 멈추면 안 되기 때문에 낙탄을 치우고, 기계의 이상한 소음을 잡아내기 위해 벨트 깊숙이 몸을 들이밀어야 했다.

9, 10호기에서 석탄을 실어나르는 컨베이어벨트는 2개. 1개가 고장이 나면 나머지 1개가 과부하가 걸린다. 왜 라인은 2개여야만 했을까? 라인의 속도 곱하기 하루 석탄량의 결과, 최적의 2개가 나왔다면 여기서 빠진 것은 무엇일까?

컨베이어벨트 2개의 발상은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점심, 휴식, 신체가 다음날에도 손상되지 않고 회복할 수 있는 정도의 노동강도, 2인1조라는 안전의 최저선 등이 절삭된 숫자다. 수시로 고장을 일으키는 라인 때문에 위태롭게 하루하루 가동되는 9호기, 10호기의 수명은 고려되지 않은 숫자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건설되어야 했는가? 태안 9, 10호기의 시작은 2017년 12월 21일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8월 4일. 김대중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방침을 발표한다. 이로부터 한국전력은 5개의 자회사로 분할된다. 그 후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문재인 정부까지 20년의 과정에서 발전업무는 이른바 '핵심'과 '비핵심'이라는 임의적인 구분으로 분할되고 또 분할되었다.

그 안에서 5개 발전사들은 정부의 경영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몸집을 줄이고 비용을 하청업체에게 떠넘겼다. 외주화와 경쟁입찰이라는 제도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태안 9호기, 10호기가 세워졌다.

신자유주의는 우리 삶에 취약성을 들여온 것이 아니다. 그 이전 삶도 우리는 취약했으며 불안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저항하거나 연대하며 살아갔다. 신자유주의는 취약성을 분배하고 할당하는 그 자의적 폭력, 그것을 합리적인 언어로 발명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외주화'라고 이름 붙인다.

외주화가 탄생시킨 새로운 위험, 이것이 이 사건의 출발이다. 우리가 김용균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태안화력 9호기, 10호기라는 거대하고 위태로운 구조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태그:#태안화력, #김용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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