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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단 한 번> 표지
 <내 생애 단 한 번> 표지
ⓒ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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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수업 시간.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고 장영희 교수의 수필 '킹콩의 눈'을 읽었다. 그는 어릴 적 앓았던 소아마비 때문에 한 쪽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됐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뉴욕에 유학까지 가서 박사학위를 땄고, 한국에 돌아와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내 생애 단 한번>을 비롯한 많은 책을 썼다. 장애를 극복한 이야기는 신화처럼 각색되지만 그날 읽었던 수필은 그런 기적의 스토리가 아니었다. 

장영희 교수가 아직 대학생이었을 때,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입학처를 찾아갔다. 그러나 담당자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대학원은 장애인을 받지 않아요."

미리 공지라도 했으면 아픈 다리를 이끌고 입학처까지 찾아가는 수고를 안했으련만 그는 어디에서도 그 조건을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대학원 입학을 거부하는 그 조건은 명백한 차별이며 인권침해였다. 하지만 당시는 지금처럼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은 시대였고 학생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쓰린 마음을 안고 학교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그때 우연히 보게 된 영화가 <킹콩>이었다. 우리는 <킹콩>을 생각하면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단숨에 기어오르는 괴수와 그의 손에 쥐어진 작은 여인, 괴수의 사랑을 오해하고 그를 향해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허나 학생 장영희가 본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건 바로 '킹콩의 눈'. 자신을 죽이려드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커다랗고 맑은 킹콩의 눈이었다.

장영희 교수는 그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람들 눈에 나도 저 킹콩처럼 보일 수 있겠구나."

그는 인간의 세계에서 괴물로 취급받는 킹콩과 자신의 처지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이후 학생 장영희는 자신을 거부한 한국을 떠나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는 글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그때 나를 받아주지 않은 입학위원회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는 그 말을 장영희 자신을 결국은 다 나은 곳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진심이라고 읽을 지 모르지만, 나는 그 말이 장영희 교수가 한국에게 보내는 조소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정말 영화 속 킹콩처럼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으로 보내버린, 어머니의 나라를 향해 보내는 씁쓸한 웃음.

킹콩이 되지 않으려면
 
영화 <킹콩> 스틸컷
 영화 <킹콩> 스틸컷
ⓒ UIP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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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준비를 하면서 아이들이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장애와 인권, 차별 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장난기가 조금 있어도 성실하고 똑똑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학원강사이긴 하지만 '교육자'라는 일말의 양심이 있다. 아이들이 더 나은 세계, 혐오와 차별이 적은 미래에서 살길 바란다.

그런 내 꿈이 너무 거창했을까. 진지한 나와 달리 아이들은 수필을 읽고도 장난으로 일관하기 일쑤였다. 내가 한국에서 장애인이 겪는 차별을 이야기하면 겉으론 슬픈 척을 해도 입가엔 미소를 띄우며 저들끼리 웃었다. 

내가 수업 장악력이 부족한 탓일까. 허나 그 전에 있었던 시 해석 시간엔 열심히 필기하던 것과 비교하면 이건 수업 장악력보다는 필요와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동그라미 치고 밑줄 긋는 '분석'이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필요하다. 외워야 하므로 공감할 이유도 없다.

반면 내가 인권에 초점을 맞추고 분위기를 이끌었던 이 수필은 시험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것'이 됐다. 동시에 '인권 '역시 순식간에 공감의 영역에서 삭제돼버렸다.

시험과 삶의 경계에서 아이들의 관심은 시험에 더 기울어져 있다. 나 역시 입시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그 경계에 서서 현기증을 느낀 적이 여러 번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것조차 느끼지 않는 듯하다.

아이들을 탓할 수 있을까.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혹은 과외로 내모는 부모와 사회의 문제다.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다 원인을 알고 있다. 하지만 부모 역시 경쟁 사회에서 아이들을 살아남게 만드려고 고군분투하는 피해자일 뿐이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혀 있는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마음이 캄캄하다. 

더 우려되는 것은 아이를 어른으로 길러내는 학교에서조차 이런 것들을 바로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감은커녕 차별과 혐오는 이제 재미와 오락으로 거리낌없이 소비된다.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청소년기의 교육이 올바르지 못하면 아이들은 몸만 성장한 어른이 되고 만다. 그 어른들이 또다시 혐오를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고 그건 다시 폭포처럼 아이들을 향해 낙하한다. 머리와 혀에 스며든다. 지금도 미성숙한 성인이 거칠게 배설해놓은 오물들이 SNS와 유튜브에 넘친다.

어쩔 수 없이 학생과 부모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학원 강사로서 당당히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게 때때로 나를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킹콩의 손에 들린 작은 여인이 아무리 소리쳐도 미사일을 날리는 조종사에겐 들리지 않는 것처럼.

장영희 교수가 작고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킹콩을 여전히 괴물로 바라보는 어른들과, 기꺼이 거기에 동참하려는 아이들이 성실하게 시험 문제를 풀고 있는 세상.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도 언젠가 '킹콩'이 될지 모른다는 잔인한 사실을. 킹콩이 되지 않으려면, 나부터 누군가를 킹콩으로 바라보지 말아야 한단 사실을. 

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지음, 샘터사(2010)


태그:#장애인, #장애인인권, #장영희, #연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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