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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책을 읽었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남들에게 많이 읽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지적 허영심을 독서로 채우기 위해 했던 노력은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던 내 팔을 튼튼하게 만들었을 뿐 마음과 머리를 살찌우지는 못했다.

남들이 보고 있다고 느끼면 속독에 매우 뛰어난 사람인 것처럼 보였을 테다. 읽기도 전에 책장을 넘기느라 책을 덮고도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늘 책을 지니고 있었기에 독서로 성장하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아쉽다. 조금 더 일찍 책을 진정으로 대하고 정독했다면 하는 아쉬움이다.

나는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해서 아쉽지만, 요즘 학생들은 자신이 선택하지도 못한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 걱정된다. 학교 도서관에서 한 학생이 독서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고 있었다. 궁금해서 다가가보니 독서 목록이 범상치 않다. <이방인>, <데미안>, <죄와 벌> 등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들이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의 독서 목록이라 놀라웠다. 그 학생이 가장 최근 독서했던 작품 <죄와 벌>. 내가 좋아하는 책이기도 했다. 학생이 정리한 인물 정리가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라스콜리니코프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포트폴리오 종이에는 '000 독서학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읽지도 않은 책을 선생님이 정리해 준대로 기록했다고 한다.
 
책 표지
 책 표지
ⓒ 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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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도 완벽한 독서인은 아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나와 같은 후회와 아쉬움을 똑같이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천천히 책을 음미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책을 소개한다. 나쓰카와 소스케의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라는 작품이다.

고서점을 운영하던 린타로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을 하는 얼룩고양이가 린타로에게 찾아오면서 생기는 일들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얼룩고양이와 린타로는 위험에 빠진 책을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인물과 상처받은 오래된 책 한 권을 만난다.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은 한 달에 100권의 책을 읽는 사람이다. 그는 남들보다 많이 읽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길 원한다. 마치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무조건 많이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 번 읽은 책은 다시는 들춰보지 않게 박물관에 물건을 전시하듯 자물쇠를 채워둔다. 린타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과시형 독서인에게 진심으로 충고해 갇힌 책들을 구한다.
 
"무턱대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눈에 보이는 세계가 넓어지는 건 아니란다. 아무리 지식을 많이 채워도 네가 네 머리로 생각하고 네 발로 걷지 않으면 모든 건 공허한 가짜에 불과해." (65쪽)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학교에 무단결석을 하는 린타로에게 알림장을 가져다주는 반장 사요가 있다. 린타로는 그런 사요가 귀찮았고, 사요 또한 린타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요의 눈에도 얼룩고양이의 존재가 보이면서부터 사요와 린타로, 얼룩고양이가 함께 길을 떠난다. 사요의 등장은 책은 결국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로 판단된다.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책을 잘라 줄거리를 만드는 학자다. 그는 바쁜 현대인을 위해 책의 줄거리만을 요약하고 연구하는 학자다. 100권의 책을 한 권에 옮기는 작업을 하기 위해 줄거리를 요약하고, 속독법을 개발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독특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 삶속 곳곳에 존재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시간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소설의 줄거리를 정리해주는 사람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한 권의 책이 몇 문장에 안에 갇히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안타까운 린타로는 이번에도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학자를 설득한다.
 
"책을 읽는다고 꼭 기분이 좋아지거나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아. 때로는 한 줄 한 줄을 음미하면서 똑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거나 머리를 껴안으면서 천천히 나아가기도 하지.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시야가 탁 펼쳐지는 거란다. 기나긴 등산길을 다 올라가면 멋진 풍경이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야."(124쪽)

마지막으로 책을 팔아 이익만을 올리려는 출판사 사장과 깊은 상처를 받은 오래된 책을 만난다. 네 가지 유형의 사람 또는 책을 만나면서 나누는 대화는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책은 왜 읽어야 할까?'는 막연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시나브로 내 마음속에 박힌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책에 대한 막연한 이상론이나 낙관론에서 벗어나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얻은 듯하다. 지식이나 지혜, 가치관이나 세계관처럼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며, 아는 즐거움, 새로운 견해를 만나는 두근거림 등.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책의 힘'이 있다.

책을 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몰랐던 어릴 적 나의 모습이 자신에게 투영된다면, 읽지도 않은 책을 남이 정리한 글로 읽었다고 자부한다면, 학생들에게 잘못된 독서교육 방식으로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면, 나쓰카와 소스케가 말하는 '책의 힘'이 궁금하다면, 무엇보다도 책 읽는 즐거움을 알고 싶다면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를 펼쳐보아야 할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운영 중인 독서IN(www.readin.or.kr) 홈페이지 독서카페에도 실립니다.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arte(아르테)(2018)


태그:#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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