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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성지
 배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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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성지를 거점으로 포교와 사목활동을 한 최양업 신부

배티성지는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성지로 충북 진천군에 있다. 진천군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인 백곡면 양백리에 있다. 경기도와 충청도를 나누는 금북정맥의 남쪽사면이다. 이처럼 성지가 산골에 있는 것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골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배티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이다. 신유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온 신자들이 배티 아래 삼박골, 절골, 용진골, 동골 등에 정착해 살았다.

1837년에는 교우촌이 커져 모방(Pierre Maubant)과 샤스탕(Jacques Chastan) 신부가 배티를 방문 미사를 집전하기에 이른다. 이때 배티에 처음으로 공소가 운영되었다. 1839년에는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 정하상(鄭夏詳) 등이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그렇지만 1850년 배티에는 다블뤼(Antoine Daveluy) 신부에 의해 본당이 설립되었다.
 
최양업신부 동상
 최양업신부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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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853년 여름 조선인 최양업 신부가 배티본당 주임으로 부임한다. 그는 이곳을 거점으로 경기도, 충청도 지역은 물론이고 경상도 지역까지 사목을 담당한다. 최양업은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신학교육을 받으러 간 조선인 최초의 신학생이었다. 그 중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조선인 최초로 1844년 12월 부제가 되었고, 1845년 6월 사제가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그 해 10월 페레올(Jean Ferreol)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충남 강경 부근 황산포로 입국해 서울과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했다. 그러나 1846년 5월 황해도 순위도에 있는 등산진에서 체포되어 반역죄를 지었다는 명목으로 사형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이처럼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기 때문에 피의 순교자라 불린다. 그는 1984년 천주교 성인이 되었다.
 
최양업신부의 사목활동
 최양업신부의 사목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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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49년 4월 사제 서품을 받았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조선인 신부가 된다. 그리고 12월 조선에 입국해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배티본당은 1850년부터 1853년 여름까지 다블뤼 신부가 맡았고, 그 후 1854년 3월까지 최양업 신부가 맡았다. 그 후 배티본당은 매스트르, 페롱, 프타니콜라 신부가 맡았다. 그 동안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 지역으로 옮겨 사목활동을 했다.

당시 충청, 전라, 경상 삼도의 공소는 127곳이나 되었는데, 이곳을 도보로 다녔으니
한 해 7000리를 걷는 강행군이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천주교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문과 한글로 옮기는 직업에도 몰두했다. 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최양업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한글이 천주교 교리를 배우는데 유용하다고 적었다.
 
최양업신부의 라틴어 편지
 최양업신부의 라틴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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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돼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해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천주교 교리를 4.4조의 가사로 만든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어 보급시켰다. 1859년 여름에는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문본 교리서 <성교요리문답>과 한문본 기도서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그는 또한 천주교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 다블뤼 주교를 통해 교황청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최양업 신부는 조선의 천주교 사목의 토대를 만들어 나갔다.
 
한글 필사본 <천주가사>
 한글 필사본 <천주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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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사목활동은 11년 만에 끝나고 만다. 1861년 과로로 배티본당 인근 공소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 부른다. 1866년 병인박해로 천주교가 다시 한 번 탄압을 받는데, 이때 배티와 인근 교우촌에서도 수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그들 이름이 오반지 바오로, 장 토마스, 김원중 스테파노, 송 베네틱토 가족, 박경진 프란치스코 부부 등이다. 그리고 1858년부터 1861년까지 배티본당 주임을 맡았던 프타니콜라 신부도 병인박해로 순교했다.

산골짝에 있는 천주교 박물관
 
최양업신부 박물관 내부
 최양업신부 박물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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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성지에는 천주교 순교박해박물관인 최양업신부 박물관이 있다. 최양업신부 박물관은 최양업 신부의 업적을 기릴 뿐 아니라, 천주교를 믿다 순교한 사람들을 기리는 박물관으로 2014년 12월 개관했다. 1층에는 5개의 체험관과 1개의 시복시성 기원관이 있다. 체험관은 한국 천주교회사, 최양업신부 생애, 최양업신부 사목활동 체험, 최양업신부 유물, 멀티미디어홀로 이루어져 있다. 2층에는 기획전시실과 양업연구소가 있다.

한국 천주교회사관은 말 그대로 천주교회의 역사를 도표와 패널로 설명하고 있다. 최양업신부 생애관은 최신부의 출생에서 선종까지 삶의 역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목활동 체험관은 최신부의 사목길을 따라가는 공간이다. 최양업신부 유물로는 그의 라틴어 편지 20점과 그가 지은 교리서와 기도서 필사본이 있다. 멀티미디어홀은 시청각 자료를 통해 최신부의 순교영성을 깨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선종가>
 <선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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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유물 중 가장 감동적인 것은 최양업 신부의 지성과 땀으로 이루어진 편지와 책자 그리고 천주가사다. 천주가사로는 <사향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선종가> 등이 있다. <사향가>는 833행으로 이루어진 4·4조의 한글가사다. 내용은 천주교의 가르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르침에 따라 고향 또는 본향으로 여겨지는 천주교에 귀의하고 의지할 것을 권하고 있다.

"어와 벗님네야 우리 낙토 찾아가세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 곳이 낙토런고
지당으로 가자하니 아담원조 내쳐있고
복지로 가자하니 모세 성인 못 열었고
이러한 풍진세계 평안한 곳 아니로다.
부귀영화 얻었던들 몇 해까지 즐거하며
빈궁재화 결여신들 몇 해까지 근심할고
인간영락 다 얻어도 죽어지면 헛것이라."


볼거리로 이콘이 또 있다
 
최양업신부(이콘)
 최양업신부(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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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을 보고 나면 천국의 계단을 통해 자연스럽게 2층 기획전시실로 이동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2016년 8월 최양업신부의 가경자 선포를 기념해 이콘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콘은 가톨릭과 동방정교에서 즐겨 그리는 성화로,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천사, 성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콘은 성스런 그림으로 신앙의 대상일 뿐 아니라, 문맹자들을 위한 교육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이곳에 있는 이콘은 양희진 도미니카의 작품으로 러시아 정교, 이집트 콥트교, 로마 가톨릭의 전통을 아우르고 있다. 성모자상이 가장 많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도 보인다. 대천사상도 보이고, 사도 바오로상도 보인다. 그렇지만 처음 시도된 이콘으로 김대건 신부상과 최양업 신부상도 있다. 김대건 신부는 준수한 청년의 모습으로, 최양업 신부는 듬직한 중년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푸른 망토의 성모’
 ‘푸른 망토의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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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자상은 러시아 정교의 이콘을 따라선지 진지한 표정이다. 금빛 배경을 기본으로 하고, 진하고 어두운 색으로 인물을 표현했다. 십자가의 예수는 치마부에( Cimabue)의 그림을 모방해선지 신성하면서도 예술적인 느낌이 든다. 아기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되는 이콘도 있다.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온 예수를 시메온(Simeon)이라는 예언자가 성전에 바치는 모습을 성모 마리아와 안나가 지켜보고 있다. 이집트 양식의 성모 마리아상도 특이하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이콘으로는 '푸른 망토의 성모'가 있다. 2014년 124위 시복식을 위해 우리나라를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봉헌된 이콘이다. 금빛 바탕에 밝은 푸른색을 띤 성모자상으로 이곳의 이콘 중 가장 밝은 느낌을 준다. 중세와 르네상스시대 성모 마리아의 옷은 대개 파란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청금석을 갈아 만든 푸른색 물감이 가장 비쌌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명순교자의 묘
 무명순교자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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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 박물관을 보고, 배티성지의 역사를 증거하는 신학교 교사 및 성당(초가집), 무명순교자 14인묘, 삼박골 모녀 순교자묘[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를 살펴볼 수 있다. 이들 순교자 중 8위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전으로 복자품에 올랐다. 이때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도 복자가 되었다. 이성례 마리아는 1840년 1월 31일 한양의 당고개 형장에서 순교했다.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했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으로 시성되었다.

태그:#배티성지, #최양업신부 박물관, #땀의 순교자, #천주가사, #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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