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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기에 있었음을 안다

/ 문태준, <우레>
/ 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그늘의 발달> 수록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는데 너무 어린 학년은 아니었고 조금 몇 살은 나이가 들어 열 살은 넘겼을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수업을 듣고 있었다. 지루했다. 수업은 듣지 않고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개로 지우고, 생긴 지우개 똥을 동글동글 뭉쳐 커다란 덩어리를 만들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밝았던 하늘이 어느새 검게 변해 있었다. 비가 금방이라도 내릴 것 같았다.

그날의 날씨는 기억나지 않지만 오지 않던 비가 갑자기 내린다고 생각했으니 장마철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고개를 들어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비가 오기 바로 직전의 하늘, 검게 변할 대로 변해 툭 터지기 직전의 임박한 무게가 좋았다.

선생님은 집중하지 않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머뭇거리며 비가 오기 직전의 이 어둑함이 좋다고 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어두운 것을 좋아하는 네 마음속에 검은 사탄이 있어서야"라고 말했다. 열 살 소년에게 던져진 사탄이라는 단어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사탄이 정말 내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어두운 하늘을 좋아했던 걸까.

어렸던 열 살보다 조금 더 어렸을 무렵, 그러니까 점심도 먹지 않고 오전 수업만 받고 집으로 돌아오던 시절에도 이따금 낮에 비가 왔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조금 흐려진 하늘은 집에 도착해서 씻고 나서는 조금 더 검게 변해있었고, 점심을 먹고 난 다음에는 낮이 꼭 밤과 같이 어둡게 숨죽여 있었다.

그럴 때면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무언가 머지않았다는 생각을 할 때면 보이지 않는 번개가 쳤고 이내 우렛소리가 들렸다. 하늘에서 땅으로 벼락이 칠 때 그 빛을 번개라고 하고 그 소리를 우레라고 하는 건 나중에 알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것들이 보이고 들린 뒤에는 곧 비가 온다는 걸 알았다. 비가 오기 시작한 뒤에도 검은 하늘은 연신 우렛소리로 가득했다. 어머니는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은 내게 그만 거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집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비에 젖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 나는 여러모로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다.

비 오기 직전의 검은 하늘, 검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우렛소리를 이토록 기억하는 건 그것들을 피할 수 있었고 무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섭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사실 나의 어린 시간들은 구석구석 무서운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이 무서웠고 비가 온 다음 날 땅에 배를 뒤집고 굴러다니는 지렁이가 무서웠다. 나를 향해 짖고 뛰는 개가 무서웠고, 개의 이빨이 무서웠고, 개 목줄을 잡고 함께 이쪽으로 뛰는 사람이 무서웠다. 보이지 않는 것은 더 무서웠다. 귀신과 유령이 있다고 믿었다.

밤마다 긴장 속에 잠을 잤다. 조심하지 않으면 침대 밑에서 흰 손이 올라와 발목을 잡을 거라 두려워했다. 잠을 잘 때면 이불 속으로 온몸을 숨겼고, 이따금씩 침대 밑에 아무도 없는지 아무것도 없는지 고개를 내밀어 침대 밑 검은 공간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심연의 늪 같은 검은 공간은 나를 검은 눈으로 노려봤고 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왔다. 많은 것들이 무서웠다. 무서울 때면 여름에도 한기를 느꼈다. 서늘하다고 느낀 밤이 더 많았다.
 
어느덧 고요한 집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밤비가 내렸다. 비만 내리지 않고 벼락이 쳤다. 우레 소리가 들렸다.
 어느덧 고요한 집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밤비가 내렸다. 비만 내리지 않고 벼락이 쳤다. 우레 소리가 들렸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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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난다. 어떤 날에는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시간이 몇 시인지 몰랐고 침대 너머로 창밖을 보니 아직 하늘이 새카만 것이 싫었다. 한 번 잠에서 깨니 잠에 다시 쉽게 들지 못했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이렇게 적막한 집구석이,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와 누나가 각자의 방에서 잠들어 있을 이 집구석이 더없이 적막하고 고요했다. 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이불 속으로 온몸을 숨겼다. 발목 하나 손목 하나 이불 밖으로 나올까 싶어 이불 양 귀퉁이를 손으로 꼭 잡았다. 밤일까, 아침일까. 귀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는데 어느덧 고요한 집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밤비가 내렸다. 비만 내리지 않고 벼락이 쳤다. 우렛소리가 들렸다. 이불 속에 숨어 그 소리를 듣는 건 더 무서웠다.

다음 번개가 치고 우레가 칠 때면 누군가 이불을 젖히고 나를 덜컥 잡아 흔들 것만 같았다. 사탄이라는 말을 기억한다고 했다. 이불 속에 떨며 계속 우렛소리를 들어야 했던, 비 오던 어느 밤 역시 똑똑히 기억한다. 어서 아침이 오길 바랐고 누군가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인기척이 들렸으면 했다. 그 밤을 기억한다.

시간이 이십 년 가까이 흘렀다. 딸 아이는 아직 혼자 잠들지 못해서 밤에 함께 누워있어야 했는데, 아이는 어둑한 방을 무서워했다. 물어보니 방이 깜깜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누군가 곁에 있는지 없는지 몰라서 그것이 무섭다고 했다. 그리 밝지 않은 수면 등을 켜고 곁에 누워있어 주었다. 아이는 장난을 치고 뒤척이다가 곧 아이다운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아이는 밤이 무섭다고 했지만, 잠자리에 들고 나자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무섭다는 감정. 으스스하다는 기분. 온몸에 한기가 돌며 서늘하다는 감각을 느낀 것이 과연 언제가 마지막이었나 싶었다. 나이가 들며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더 많아져서 그런 걸까.

아니다, 어느 정도 아는 것들이 채워진 이후에는 더 이상 모르는 것을 찾고 경험하기보다는, 아는 것들 속에서 안락하게 쳇바퀴를 돌며 살아갔다. 몇 개 없지만 그나마 아는 것들 속으로 숨었고, 그곳에서 무서울 것이란 크게 없었다. 내가 영위하고 마주하는 것들은 대개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에 낯선 존재는 희미해져 갔다. 나의 감각은 쉽게 무뎌졌다.

그러니 비록 나는 무서움에 질식하였으나 잠이 깨 밤새 이불 속에서 숨어야 했던 밤, 밤새 들리던 우렛소리 속에서 나의 연약한 윤곽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 순간 내가 거기에 있었음을 안다. 무서움에 대해 더 이상 떠올리지 않으면서 내 존재의 윤곽을 더듬고 새롭게 느끼지 않았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은 삶이라는 걸까. 아, 그러고 보니 우렛소리를 들은 것이 정말 오래 되었지 …

나는 차가운 마루에 앉아 있고
우레는 나를 지나간다

우레의 지나감은
어떤 윤곽을 생각게 되느니

눕다 다시 바로 앉아 돌이키느니
그마저 내가 숨어서 한 일을

- 문태준 시인의 <우레> 전문

그늘의 발달

문태준 지음, 문학과지성사(2008)


태그:#시, #시집, #에세이, #문태준, #우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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