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팔과 다리, 포켓몬 '꼬부기'를 닮은 듯한 얼굴, 똑 부러지는 말투를 갖춘 15살 소녀 임은수는 이젠 한국 여자피겨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재목으로 거듭났다. 그를 입증하듯 '피겨여왕' 김연아(29) 이후 9년 만에 한국 여자선수로는 처음으로 그랑프리 시상대에 섰다. 
  
한국 여자피겨의 미래 13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아이스링크에서 열린 'KB금융 코리아피겨스케이팅 챔피언십 2019' 여자 싱글 시상식에서 1위 유영(가운데), 2위 임은수(왼쪽), 3위 이해인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한국 여자피겨의 미래 13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아이스링크에서 열린 'KB금융 코리아피겨스케이팅 챔피언십 2019' 여자 싱글 시상식에서 1위 유영(가운데), 2위 임은수(왼쪽), 3위 이해인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기자는 3년 전 아이스쇼에서 그와 유영(15·과천중)을 함께 인터뷰 한 바 있다. 혹시 그때 인터뷰를 기억하는지 묻자 임은수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당시에는 한 살 어린 동생이 인터뷰 도중 긴장이 되면 다독이는 언니 같은 모습을 보여 기자에게는 상당히 성숙한 선수로 기억됐다.

어느덧 시니어로 성장한 소녀는 은반 위에서는 자신의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들려주었다. 그는 인터뷰 질문에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얘기하면서도 웃음이 많은 중학생 소녀였다.

"그랑프리 동메달? 너무 놀랐어요"

올 시즌 임은수는 어느 누구보다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시즌 첫 대회였던 국제빙상연맹(ISU) 피겨 챌린저 시리즈 '아시안 트로피 대회'에서 김연아 이후 처음으로 ISU 주관 대회 시니어 부문 금메달을 차지했다. 시니어 첫 그랑프리 대회부터 쇼트프로그램 점수가 70점대에 육박하고 총점도 190점대를 기록하며 개인기록을 경신했던 그는 지난해 11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그랑프리 5차 대회에서 결국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김연아 이후 최초라는 성과도 있었지만, 시니어로 올라오자마자 곧바로 시상대에 서는 저력을 보여줬기에 임은수 자신에게도 더욱 의미가 컸다.
  
 피겨 선수 임은수의 모습

피겨 선수 임은수의 모습 ⓒ 박영진

 
"첫 시니어 시즌이었기 때문에 어떤 점수를 받을지 경기를 나오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었거든요. 다행히 열심히 준비한 만큼 국제대회에서 좋은 경기와 성과로 잘 마쳤던 것에 대해 만족스러웠어요.
 
그랑프리 메달은 제 목표이기도 했지만, 막상 경기 때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어요. 동메달이 확정되고 나서 되게 놀랐어요(웃음). 주니어 때는 어린 선수들과 경기를 했지만, 시니어로 올라오니 저보다 경험도 많은 선수들과 경기를 하다 보니 되게 신기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울 점이 정말 많았어요."

 
큰 결심하고 해외로 떠나 훈련... 성장의 밑거름 됐다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스스로 큰 결심을 했기 때문이었다. 임은수는 지난해 3월 주니어 세계선수권을 마친 직후 곧바로 미국으로 훈련 둥지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새롭게 그를 지도하기로 한 코치는 '미국 남자피겨 간판'인 네이선 첸을 가르치고 있으며 세계 피겨계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라파엘 아르투니안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 미국행을 택한 것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홀로 타국에서 적응하고 훈련에 매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니어 그랑프리 티켓을 따려면, 시즌 베스트 기록을 내거나 챌린저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만 했어요. 또한 시니어 첫 시즌이다 보니 더 중요하기도 했고, 팀을 옮기다 보니 새 코치님과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사실 미국 훈련지는 그 전 시즌에도 제가 먼저 '한번 가보고 싶다'고 얘기해서 갔던 곳이었는데, 라파엘 코치와 여러모로 잘 맞았어요. 여러 고민을 많이 했지만, 지금 미국으로 가는 것이 시기상 적절하다고 판단했어요. 물론 힘든 점도 많았지만, 훈련하는 데 있어서 환경이 정말 좋았던 것이 마음에 들었어요."

  
 피겨 선수 임은수의 모습

피겨 선수 임은수의 모습 ⓒ 박영진

 
역사상 유례없는 피겨 스타가 탄생했음에도 아직까지 국내에는 피겨 전용링크가 없다. 반면 미국은 오랜 기간 피겨 강국으로 명성을 떨쳐왔기에 수많은 링크를 비롯한 인프라는 물론 지도자별로 가르치는 분야가 세분화 돼 있기에 선수들이 마음껏 훈련하기에 최적으로 꼽힌다.

여기에 점프, 스케이팅, 스핀 등 코치 별로 가르치는 분야가 나뉘어 있기에 부족한 점을 빠르게 향상할 수 있다. 실제로 임은수는 올 시즌 비점프 요소가 크게 향상돼 구성점수가 3~5점가량 상승했고, 프로그램도 더욱 탄탄하게 보이는 효과가 생겼다.
 
"미국 링크는 다들 각자의 스타일로 열심히 타는 분위기(?)예요. 지금은 제가 미국에서 지낸 지 시간이 조금 지났으니 선수들하고도 많이 친해졌고, 그 선수들(네이선 첸, 마리아 벨, 혼다 마린 등) 외에도 두루두루 함께 훈련하고 있어요. 한국은 국가대표 선수끼리 모여서 훈련하지만 미국은 각자의 팀에서 훈련해요. 시즌 시작 전에는 콜로라도 캠프에서 기술 레벨 체크도 하고, 심판들이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도록 팁도 알려주기도 하고요.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한 후 오전 9시 20분부터 훈련을 시작해요. 총 세 타임 정도 훈련을 하는데 끝나면 대략 오후 1시 반~2시가 되거든요. 그리고 오후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지상훈련과 필라테스를 해요. 토요일까지 스케이트를 타는 일정은 똑같은데, 지상훈련과 필라테스 스케줄이 조금 다르고요. 평소에 영어는 사람들과 많이 만나서 부딪혀 보려고 해요. 그래야 저도 코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고, 영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니 많이 배워가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평소 쉴 때는 친구들과 놀러 가거나 엄마랑 맛있는 것 먹고, 영화 보기? (웃음)
 
  
 피겨 선수 임은수의 모습

피겨 선수 임은수의 모습 ⓒ 박영진

 
비점프 요소가 좋아진 것은 이전까진 스핀하고 스텝을 그렇게 꾸준하게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매일매일 훈련하고 있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제가 처음 갔을 때 그쪽 선생님들도 제가 점프에 비해 스핀, 스케이팅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하셔서 더 집중적으로 받기도 했고요.
 
라파엘 코치는 온화하신 면도 있지만 평소 푸쉬를 많이 하시는 편이세요. 훈련하는데 쉴 틈 없이 지도하시는 스타일이시거든요. 대부분의 코치분들이 그런데 저는 그런 점이 정말 좋았어요. 라파엘 코치는 전반적으로 다 봐주시지만 주로 점프를 더 많이 봐주시고, 그 외에도 스케이팅, 스핀 코치 따로 계세요. 코치분들마다 집중하시는 부분이 다르다고 할 수 있네요."

 
서정적인 장르? 계속 도전하고파

올 시즌 임은수가 호평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프로그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니어 시절까지는 다소 강렬하거나 자기 색깔이 강한 연기 위주로 선보였던 데 반해, 올 시즌에는 쇼트프로그램은 서정적인 프로그램을 프리스케이팅은 기존의 연기 스타일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성숙하고 다채로운 매력을 선보일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해 연기의 폭이 한층 넓어졌다.
 
특히 쇼트프로그램은 일부 해외 언론에서 올 시즌 여자선수 최고의 쇼트프로그램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은 김연아가 임은수에게 직접 선곡해 준 것으로도 알려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피겨 선수 임은수의 모습

피겨 선수 임은수의 모습 ⓒ 박영진

 
"프리 음악(시카고 OST)은 비슷한 장르를 도전해 본 적이 있어서 크게 걱정하진 않았지만 쇼트는 없었거든요.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됐었어요. 이 프로그램이 저는 맘에 들었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장르를) 시도하고 싶어요. 쇼트 음악은 연아 언니와 제프리 버틀 안무가가 같이 고른 것이에요. 제프리 버틀 하고는 꼭 한번 맞춰보고 싶어서 작년 시즌에도 올 시즌에는 꼭 제프리랑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쇼트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더블 악셀을 뛰고 나서 하는 안무를 꼽고 싶어요.
 
프리는 강렬한 뮤지컬 음악인데, 프로그램 중간에 있는 포인트 들을 잘 살리지 못하면 굉장히 심심할 것이라 생각했고 잘 표현하려고 노력을 했어요. 또 시카고 음악은 제가 전부터 꼭 사용해 보고 싶었던 음악이었고, 시니어 선수로 첫 시즌이니깐 그 전보다는 성숙한 연기를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프로그램 안무를 맞췄던 스즈키 아키코는 지현정 코치님 추천으로 호흡을 맞추게 됐었어요. 프리는 코레오 시퀀스에서 살금살금 걸어가는 부분이 마음에 드네요."

 
베이징 동계올림픽까지... 한 열다섯 걸음?

임은수는 목표인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같은 또래 친구인 김예림(16·도장중), 유영(15·과천중)과 함께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12월과 지난 13일에 각각 열렸던 회장배 랭킹 대회와 종합선수권 대회에서 임은수와 유영이 각각 우승을 나눠 가질 정도로 세 선수의 라이벌은 좋은 자극이자 곧 평창 이후 한국 피겨를 이끌어 나가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들뿐만 아니라 이들보다 1~2살 어린 이해인(14·한강중), 위서영(14·과천중), 지서연(13·신흥초) 등이 이번 종합선수권 대회를 통해 새로운 구도를 형성하면서, 국내 피겨계 라이벌 구도는 더욱 확대되고 있다.
 
"라이벌이 부담될 때도 있지만 좋은 쪽으로는 자극이 되는 게 더 많아요. 꼭 예림이나 영이가 아니더라도 항상 라이벌은 있을 것이고, 언제 누가 라이벌이 되든 좋은 쪽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돼요.
 
동생들에게 해줄 말이요? 음... 사실 저도 엄청난 선배도 아니고 (웃음) 조금 더 상황을 겪어봤을 뿐이지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고 말하긴 쉽지 않은데... 라이벌이 있고 자극이 돼서 좋지만 그 친구들만 이기기 위해서 타는 것이 아니니깐 제 경기에 집중하는 것이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피겨 선수 임은수의 모습

피겨 선수 임은수의 모습 ⓒ 박영진

 
국내 피겨계의 한 축을 구축하고 세계 피겨계에 샛별로 떠오른 그이지만 언제나 좋은 날만 있을 수는 없다. 항상 다부지고 야무진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 16살 소녀에게도 힘든 시기는 분명 있다.
 
"몇 년째 같은 운동을 하고 있는데. 사실 쉬운 운동이 아니라서 힘든 날도 많이 있고 의욕이 떨어지거나 싫은 날도 당연히 있어요. 그렇다고 운동을 안 할 수도 없고, 쉴 수도 없고... 저는 그냥 똑같이 운동하면서 괜찮아질 때까지 저는 그대로 두는 편이에요."
 
이에 기자가 '혹시 유독 힘든 훈련이 있는지' 물어봤더니 임은수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다가 "지상훈련하고 필라테스 둘 다 어려운데 선수마다 다 다르다. 반대되는 것? 지상훈련은 큰 근육을 키워주고, 필라테스는 속에 있는 근육을 잡아주는 것이라고 들었다"라고 답했다. 이에 그럼 스케이트 훈련에 비해 두 가지가 더 어려운 거인지 되묻자 "그건 또 그거대로 어려운데..."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살면서 모든 것이 그렇듯 힘들지 않고 쉽게 얻어지는 것은 결코 없다. 그럴 때 선배의 조언은 큰 도움이 되고 나를 지지해주는 힘이 된다. 임은수에게는 먼 선배이자 그가 스케이트를 신게 만들었던 김연아가 바로 그런 존재다.
 
"연아 언니가 먼저 조언을 주실 때는, 연기할 때 '이렇게 해보는 것도 좋은데 요런 식으로 해보는 것은 어떨까?'라고 제안을 많이 주세요. 특히 이번 시즌에 프로그램 음악을 선곡할 때 연아 언니가 선수 생활을 오래 하셔서 좋은 음악을 많이 알고 계셔서 조언을 구했고요. 그 외에도 뭔가 잘 안되는 경우에도 (조언을) 종종 구하는 편이에요."
  
우아한 연기 펼치는 임은수 임은수가 12일 오후 서울 목동실내빙상장에서 열린 KB금융 코리아피겨스케이팅 챔피언십 2019 여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 우아한 연기 펼치는 임은수 임은수가 12일 오후 서울 목동실내빙상장에서 열린 KB금융 코리아피겨스케이팅 챔피언십 2019 여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제 임은수에게 올 시즌 남은 것은 두 개의 챔피언십 대회(4대륙 선수권, 세계선수권)이다. 두 대회 모두 그가 처음 나가보는 대회이고, 앞서 겪어봤던 그랑프리보다 더 큰 대회다. 특히 세계선수권은 다음 시즌 자신의 그랑프리 대회와 차기 대회의 한국 국가 쿼터가 걸려 있기에 책임감과 부담감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는 "두 경기 모두 처음인데, 큰 경기에 한국을 대표해서 나갈 수 있어 기쁘다"면서 "꼭 후회 없이 잘 마무리하고 싶다"고 각오를 전했다.
 
인터뷰 말미에 과거 그가 '스토리를 들려주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밝힌 것과 올림픽에 대한 목표에 대한 질문을 던져봤다.
 
"링크장 안에서 운동선수이기도 하지만 음악을 가지고 표현하는 사람이니 어떤 음악인지 어떤 이야기인지, 또 제가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은지 어떤 감정인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먼 미래에는 제가 잘 타는 선수로 기억돼도 좋지만, 제 경기 보는 것에 빠져들어서 행복하게 만드는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요.
 
평창 올림픽 때 비록 나이가 되지 않아서 올림픽에 서진 못했지만 갈라쇼에 서 보니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것이 신기했고, 거기에 유망주로 갈라에 섰다는 것이 영광이었어요. 베이징까지 몇 걸음 걸어왔느냐고요? 음... 아직 첫 시니어 시즌도 마무리하지 않았으니 열다섯?(웃음)."

 
옆에 있던 매니지먼트사 직원이 "열 걸음, 스무 걸음도 아니고 열다섯?"이라고 물으니, 그는 "둘 중 뭘로 할까 고민했다가 중간이라서..."라며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고 이로써 인터뷰는 마무리됐다.
 
 피겨 선수 임은수의 모습

피겨 선수 임은수의 모습 ⓒ 박영진

 
피겨 임은수 선수 프로필
이름 : 임은수 (현 한국 피겨 국가대표)
생년월일 : 2003년 2월 26일
학교 : 한강중학교
올 시즌 프로그램: 쇼트- Somewhere in time (사랑의 은하수) / 제프리 버틀 안무
프리 - 뮤지컬 시카고 OST / 스즈키 아키코 안무

경력 : 2018 ISU 피겨 그랑프리 5차 대회 동메달 (김연아 이후 최초)
        2018 ISU 피겨 그랑프리 4차 6위
        2018 ISU 피겨 챌린저 시리즈 US 인터내셔널 클래식 은메달
        2018 ISU 피겨 챌린저 시리즈 아시안 트로피 금메달
        2017 ISU 세계 주니어 피겨 선수권 5위
        2017 ISU 피겨 주니어 그랑프리 2차 은메달
        2016 ISU 세계 주니어 피겨 선수권 4위
        2016 ISU 피겨 주니어 그랑프리 7차 동메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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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스케이팅 임은수 김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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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스포츠와 스포츠외교 분야를 취재하는 박영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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