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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돼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돼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낙안읍성마을 전경. 마을 진산, 금전산 산봉우리를 닮은 둥글둥글한 초가지붕이 사납게 달려온 인생을 다독이고 보듬는다. ⓒ 김정봉
 
"사농공상(士農工商) 낙안(樂安)이요, 부자형제(父子兄弟) 동복(同福)이라."
 
신재효본 <호남가>의 한 대목이다. <호남가>는 50개에 달하는 호남고을을 언어유희로 나열한 판소리 단가다. 이 대목은 낙안과 동복고을을 얘기하고 있다. "사농공상, 온 백성이 즐거운 가운데 평안하고 부자형제, 온 집안 식구가 복을 누리리라"라는 뜻이다.

이처럼 예전 낙안은 주요 호남고을로 어엿하게 한자리 차지한 고을이었다. 현재 낙안이 순천에 더부살이하듯 편입돼 있지만 예전에는 달랐다. 보성군 벌교읍은 물론 고흥군 동강면과 순천시 외서면, 별량면 일부를 아우르는 고을이었다.

낙안에 속해 있을 때, 벌교는 일본 헌병을 벌교장터에서 맨주먹으로 때려 숨지게 한 안규홍(1879-1910) 의병장을 비롯한 의병들의 주 활동무대였다. "벌교에서 주먹자랑하지 마라"는 이때 얻은 훈장 같은 말이다. 일제의 눈으로 보면 낙안, 벌교는 눈엣가시, '역적의 땅'이었다. 결국 일제는 1908년에 낙안은 순천으로, 벌교는 보성으로 찢어놓았다.
 
벌교 보성여관. 소설 <태백산맥>에서 남도여관으로 나온다. 한 때 잘나가던 벌교의 상징건물이다. ⓒ 김정봉

조선 이래 오랫동안 벌교는 낙안으로 드나드는 변두리 작은 포구였다. 그러던 벌교가 달라졌다.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수탈기지로 변모하더니 성장을 거듭했다.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 사람이 많이 꼬였다. 선착장은 배들로 가득했고 장사 또한 잘됐다. 1930년에 경전선 벌교역이 생기고 1935년에 보성여관이 들어섰다. 당시 잘 나가던 벌교의 상징물들이다.
 
노릇노릇 잘 익은 낙안민속마을
 
낙안 가는 길은 벌교를 통한다. 낙안과 벌교의 관계를 생각하면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그려진 모질고 끔찍한 벌교사(筏橋史)의 한 면을 뒤적이다 졸깃하고 짭조름한 벌교 참꼬막으로 씁쓸한 입맛을 달랬다.
 
'평안한' 땅 낙안으로 접어든다. '참혹한' 근현대 민중의 역사를 거슬러 좀더 앞선 역사 안으로 한 발 더 깊숙이 들어가는 거다. 어디 민중의 역사가 순탄한 적이 있겠냐마는, 참혹하고 평안함의 차이는 멀고 가까운 시간에서 오는 망각과 기억의 차이일 뿐이다. 낙안에서만은 망각으로 얻은 평안함을 누려볼지어다.
 
낙안의 중심은 낙안읍성마을이다. 남쪽 바다를 향해 헤벌어져 있을 뿐 북쪽 금전산으로 오긋하고 동쪽 오봉산과 제석산, 서쪽 백이산이 감싸 안았다. 천생 명당소리를 들을 만하다. 낙안을 두고 낙토민안(樂土民安)의 땅이라는 얘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낙안읍성은 처음에 흙으로 쌓였다. 태조 6년(1397년) 일이다. 그 후 1424년부터 여러 해 걸쳐 돌로 쌓아 지금에 이른다. 중간에 개축공사도 있었던 모양이다. 인조 4년(1626년) 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은 금전산 바위를 내리쳐 하루 만에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떠돌아다닌다. 이런 얘기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마을 한가운데에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선정비가 있다.
 
낙안마을 초가지붕. 노릇노릇한 초가지붕, 두둑한 세월이 쌓였다. ⓒ 김정봉
  
낙안읍성마을 돌담. 마을 돌담길은 깊다. 벌교바닷바람을 잠재우듯 거칠게 달리다 상처 입은 우리를 보듬는다. ⓒ 김정봉
  
노릇노릇한 초가지붕과 구불구불한 고샅은 거칠게 달려온 나를 보듬는다. 두둑한 초가지붕 두께만큼이나 세월이 내려앉았다. 이웃과 이웃이 어깨를 맞대고 정을 나누고 보듬고 살아온 민초들의 인생이 두둑이 쌓여 있는 것이다.
 
벌교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겨울 바닷바람이 차갑다. 고샅에 몸을 숨겼다. 바람 빠르기는 돌담 고샅에 내리쬐는 햇발을 이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바람이 잦아들고 볕은 다사롭다. 몇 겹을 껴입은 초가지붕과 햇발에 익은 돌담 덕인지, 고샅은 온기가 돌았다. 뉘 집 돌담 아래에서 쪼그려 앉아 한참 볕바라기를 하고 나니 내 몸에도 따뜻한 기운이 솟았다.
 
그 기운 덕으로 고샅고샅 둘러보았다. 우선 마을은 동서로 큰 길이 나 있고 남문에서 동헌 쪽으로 가르맛길이 나 있다. 살림집은 주로 큰길 남쪽에 있고 동헌과 객사, 내아 등 관아건물은 북쪽에 몰려있다.

이 중에 'ㄱ'자집(최창우가옥), 대나무서까래집(주두열가옥), 마루방집(김대자가옥), 서문성벽집(김소아가옥), 이방댁(박의준가옥), 주막집(최선준가옥), 향리댁(곽형두가옥), 뙤창집(이한호가옥), 들마루집(양규철가옥)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옛집이다.
 
낙안마을은 옛집이라도 한집한집 뜯어보기보다는 성곽 위를 걸으며 마을 전체를 바라다보는 맛이 좋다. 동문에서 남문을 거쳐 언덕으로 이어지는 길은 마을에서 조망이 제일 좋다는 길이다. 금전산, 오봉산 아래 초가집들이 다붓하다. 산봉우리는 올망졸망, 둥글둥글한 초가지붕을, 초가지붕은 산봉우리를 닮았다. 둥근 맛에서 오는 한국미는 이를 두고 한 말일 게다.
 
낙안읍성 굴뚝에서 사농공상이 보인다?

 
낙안마을 굴뚝은 사농공상에 따라 모양이 다르다. 물론 사농공상, 신분을 들먹이는 말은 아니고 조선의 눈으로 바라다본 굴뚝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농(農)에 해당하는 이 마을의 살림집굴뚝은 대부분 널빤지를 덧댄 널굴뚝이다. 마을 고샅에서 만난 첫 살림집 굴뚝도 널굴뚝이고 이방댁, 뙤창댁, 서문성벽집 모두 널굴뚝이다.
 
널굴뚝이 있는 고샅 풍경. 돌담, 초가지붕, 널굴뚝, 사립문이 있는 고샅풍경은 아련한 어릴 적 추억으로 안내한다. ⓒ 김정봉
  
이방댁 굴뚝. 19세기 중엽에 지은 집으로 이방이 살던 집이라 하여 이방댁으로 불린다. 낙안마을 일반 살림집 굴뚝은 대개 널굴뚝이다. ⓒ 김정봉
            
화덕 굴뚝이나 새로 만든 굴뚝은 개성이 뚜렷하다. 주로 '상(商)'에 해당되는 굴뚝이다. 뉘 민박집 굴뚝은 두툼한 몸집에 발랑 뒤집힌 연가를 얹어 갓을 삐딱하게 쓴 한량을 보는 것 같다. 장사하려고 앞마당에 마련한 대나무서까래집 화덕굴뚝은 애벌레 닮은 굴뚝으로 인상적이다. 공(工)에 해당하는 굴뚝으로 도예방이나 대장간 굴뚝은 무척 요란하다.
 
들마루집 화덕굴뚝. 장사를 하려고 앞마당에 마련한 화덕굴뚝이다. 일반 살림집굴뚝에 비해 유난스레 크고 개성이 넘친다. ⓒ 김정봉
  
대장간 굴뚝. 쇠를 녹일 정도의 고온을 견뎌야하는 대장간 굴뚝답게 튼튼하고 요란하게 생겼다. ⓒ 김정봉
            
사(士)에 해당하는 굴뚝으로 동헌과 동헌 안채인 내아 굴뚝이 있다. 동헌굴뚝의 경우 잘 다듬은 사괴석으로 연도(煙道)를 만들어 민초들의 굴뚝과 차별했다. 줄무늬 몸체에 연가는 수키와와 암키와, 암막새, 수막새를 사용해 여간 정성을 다한 게 아니다. 내아굴뚝의 경우 자연석을 네모로 잘 다듬어 연도를 내고 굴뚝 몸은 외담 색조에 맞추려 했는지, 연분홍으로 했다. 물론 연가도 정성을 기울였다. 전체적으로 동헌굴뚝은 남성스럽고 내아는 여성스럽다.
 
동헌 굴뚝. 연도는 사괴석으로, 연가는 수키와, 암키와, 암막새, 수막새를 사용하여 만들어 온갖 정성 다하였다.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남성답다. ⓒ 김정봉
 
동헌내아 굴뚝. 연도, 몸통, 연가 모두 안채답게 여성스럽게 꾸몄다. ⓒ 김정봉
            
벌교 '남도여관' 굴뚝과 법정 스님의 '무소유' 굴뚝
 
낙안 가까이 송광사 불일암이 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불필요한 것은 가지지도, 가지려 하지도 않은 법정 스님의 뒷모습이 아련한 곳이다. 거기에 스님을 꼭 닮은 굴뚝이 있다. 한때 잘나가던 존재, 큼직한 보성여관의 굴뚝을 보고 온 뒤라 더 보고 싶었다.
 
송광사 불일암 전경. 무소유 스님,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살아생전 사랑하던 후박나무와 스님이 만든 ‘빠삐용 나무의자’가 많이 외로워 보인다. ⓒ 김정봉
 
소설 <태백산맥>에서 남도여관으로 등장하는 보성여관은 읍내 하나뿐인 여관이자 현부자 집 소유의 여관으로, 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의 숙소로 묘사됐다.
 
"임만수, 똑똑히 들어! (중략)지금이 어느 때라고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어? 그러면서도 그것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입을 놀려대?" (<태백산맥> 3권, 85쪽)
 
"벌교의 지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보성의 지주들까지 남도여관의 뒷문을 드나들었다"(<태백산맥> 4권, 43쪽)
 
남도여관은 당시 잘나가던 벌교의 상징물이고 여관굴뚝은 남도여관의 상징물이다. '여관잠'과 '여관밥'으로 표현되는 말처럼 굴뚝연기는 따뜻한 밥과 따뜻한 방을 상징한다. 남도여관 굴뚝은 풍요를 누리는 지주나 힘깨나 쓰는 토벌대의 풍요와 힘을 자랑하듯 하늘 모르고 솟았다.
 
보성여관(남도여관) 굴뚝. 여관밥과 여관잠, 따뜻한 밥과 따뜻한 잠을 상징하는 굴뚝이다. 풍요를 누리는 지주나 토벌대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인다. ⓒ 김정봉
  
불일암 굴뚝. 더 이상 없애려야 없앨 게 없는 깡마른 굴뚝, 불필요한 것은 가지지 않으려는 ‘무소유’ 굴뚝이다. ⓒ 김정봉
 
불일암 굴뚝은 남도여관 굴뚝과 다르다. 난 속으로 '무소유' 굴뚝으로 부른다. 힘이든 돈이든 잘못 쓰면 그게 불필요한 것이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으려는 마음, 불일암 굴뚝이 그 마음, 그 길이다.
태그:#낙안읍성마을, #낙안, #벌교, #보성여관, #불일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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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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