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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이 밝았다.

올해는 새해 일출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어제 뜬 해나 오늘 아침 해나 차이가 없다. 단지 달력이 바뀌었을 뿐이라며 애써 궁색한 핑계로 위안을 삼아본다.

비록 지난밤 송년회 취기가 아직 남아 있어도 마냥 침대에 누워있을 수만은 없다. 뭔가 나름의 새해맞이 의식을 해야만 될 것 같은 압박이 머리를 짓누른다.

천천히 늦은 아침을 챙겨 먹고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한 권과 메모를 해 둔 노트를 펼쳤다.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짧은 겨울 해에 멀리 떠날 수는 없어 가까운 곳을 훑어보다 거창에 눈길이 멈췄다. 지난 늦가을부터 한 번 다녀오리라 마음먹고 있던 곳이다.
 
답사 동행이 솟을 대문 앞에서 정려문을 일고 있다.
▲ 동계 종택 솟을 대문 앞 답사 동행이 솟을 대문 앞에서 정려문을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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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과 거창 사이에는 안의면이 있다. 정자와 동천으로 유명한 안의는 조선시대까지는 안음현 후에 안의현으로 화림동(花林洞), 심진동(尋眞洞), 원학동(猿鶴洞)은 안의3동으로 불리며 예부터 유명했다. 덕유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가 계곡을 이루고 그 물길을 따라 정자가 늘어서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쪽은 함양에, 북쪽의 마리(馬利), 위천(渭川), 북상(北上)은 거창으로 편입됐다.

지금은 거창군에 속하는 옛 안의 땅에는 수승대 황산마을의 거창신(愼)씨, 위천의 초계정(鄭)씨, 갈천의 은진임(林)씨와 건계정(建溪亭)의 거창장(章)씨 세거지가 있다.
이중 오늘 내가 찾고자 하는 곳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절개와 충절로 이름난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 선생의 혼이 깃든 곳이다.

결정하고 보니 새해 답사지로는 제격이다. 역사문화유적 답사를 즐기는 나는 자연이 빼어난 곳보다는 인문기행을 주로 선택한다. 평소 책이나 선인(先人)들의 답사기를 통해 확인해 둔 곳들을 둘러보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놓치는 것들이 많아 자연히 재방문하는 경우도 많다.

천천히 3번 국도를 따라 마리면으로 들어섰다. 일반적으로 지명은 아무렇게나 짓지 않기에 분명 숨은 뜻이 있을 것이다. 마침 길가에 승마장이 보인다. 혹시 옛날에 이곳에 군사용 종마장이 있거나 아니면 말을 방목했던 곳일까? 마리(馬利)가 자꾸 궁금증을 자아내 결국 멈췄다. 마리는 가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머리(頭,首)의 의미로 부족장이 살았던 곳이라는 뜻이다.
 
정려문의 마지막 숭정기원후 다음 글자가 무엇일까?
▲ 정려문 정려문의 마지막 숭정기원후 다음 글자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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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종택(宗宅)은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50-1번지로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후손들이 1820년(순조20)에 중창하였으며 대문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아래채, 곳간채, 사당으로 구성돼 있다.

동계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는 문간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정려문(旌閭門)을 세우게 하여, 솟을대문 위에는 붉은 바탕에 흰글씨로 '文簡公桐溪鄭蘊之門(문간공동계정온지문)' 이라 씌어 있다.

그런데 끝에 붙어있는 '崇禎紀元後O 己卯四月 日'에서 기원후 다음 글자를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동행과 한참 논의했다. 숭정연간이면 1628년부터 1644년이고 그 안에 기묘년은 1639년이다. 생긴 것이 '五'와 닮아 그렇게 하면 1879년이 된다. '四'로 보면 1819년이 되어 후손들이 중창했던 시기와 맞게 되지만 끝의 四月의 '四'자와는 너무 달라 왜 이렇게 썼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동계 종택의 늘름한 ㄱ자 사랑채
▲ 사랑채 동계 종택의 늘름한 ㄱ자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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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늘름하게 앉아 있는 ㄱ자 사랑채가 바로 보인다. 특히 용마루의 눈썹기와와 누마루의 이중처마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또 하나는 무심히 읽고 지나칠 수 없는 현판이 있다. 사랑채 가운데 걸려 있는 추사가 썼다는 '忠信堂'이다.

동계는 마흔 살인 1610년(광해군2)에 과거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이 됐을 때, 영창대군의 죽음이 부당하다고 역설하며 때마침 일어났던 폐모론도 반대했다. 이에 분노한 광해군은 1614년 동계를 제주도 대정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동계의 10년 유배생활도 끝이 났다.

2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1840년(헌종6)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 대정으로 유배를 갔다. 9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육지로 돌아온 추사는 유배지에서 느낀 동계의 충절을 기려 이곳을 찾아가 '충신당'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안채오 들어가지 않아 곁에 있는 반구헌에서 사진만 찍었다.
▲ 사당 안채오 들어가지 않아 곁에 있는 반구헌에서 사진만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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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는 15대 종손이 현재 살고 있다. 중문 옆에 방문객들에게 주의해달라는 문구가 붙어있어 열린 문 앞에서 안채를 감상만 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종부가 직접 담근 장류가 '기왓골'이란 상표로 판매되고 있어서인지 마루에 주렁주렁 매달린 메주덩이였다. 대충 세어보니 60짝이나 된다. 대략 한 짝에 콩 2kg로 계산하면 무려 120kg의 콩을 삶고 디뎌서 만들었다는 셈이다.

안채 뒤로는 불천위로 인정받은 동계선생을 모신 사당이 있지만 안채를 들어가지 않아 곁에 있는 반구헌에서 사진만 찍었다. 자료에 의하면 정조대왕이 동계의 지조를 높이 사 손수제문과 함께 시를 지어 보냈다는데 이 제문과 시가 현판에 새겨 사당에 걸려있다고 한다.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동계는 다시 조정에 진출했으나 1636년(인조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적들과 맞섰다. 최명길 등이 화평을 주장하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과 강력하게 척화를 주장하며 주전론(主戰論)을 펼쳤다.

그러나 끝내 인조가 항복을 하자 수치를 참을 수 없다며 칼로 베를 갈라 자결을 시도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지 않고 살아나자 1636년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남덕유산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누가 물으면 '모리(某里)', 즉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름 모를 곳으로 갔다고 말하라 했다.
 
모리재 문루인 화엽루,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들어가면서도 불안했다.
▲ 화엽루 모리재 문루인 화엽루,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들어가면서도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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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종택을 나와 서쪽으로 보이는 금원산 방향으로 진행하다 우측으로 말목고개를 넘는다. 이 답사 처음에 발길을 멈추개 했던 '말'이라는 단어가 또 나왔다. 말의 목처럼 생겼다하여 말목고개인가 생각하며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동계 종택에서 이정표 상에 나오는 3.8km 지점에 강선대(降仙臺)가 있다. 이건 그냥 넘겨짚어도 알 수 있는 옛날 신선이 내려와 노닐던 곳이겠지. 역시나 이름에 걸맞게 여기는 거창4경에 꼽히는 월성계곡이다.

여기서 모리재까지는 길이 험하다. 1km 정도의 짧은 거리이지만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임도를 따라 경사도 가파른 산길을 꼬불꼬불 올라가야 한다.

동계 선생은 찾지 말라고 했으나 나는 굳이 이름도 없는 산속의 선생 은거지에 들어섰다. 올라오는 길도 험했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데다 짧은 겨울 해가 산에서는 일찍 넘어가 분위가 더욱 스산하다.

동계는 여기다 풀을 엮어 집을 짓고, 흙을 쌓아 침상을 만든 뒤 '모리구소(某里鳩巢: 이름 없는 마을의 비둘기 집처럼 누추한 곳)'라 하고는 직접 산을 개간해 기장과 조를 심어 자급자족하다 1641년에 돌아가셨다.

1654년(효종5)에 유림과 제자들이 영당(影堂)을 세워 영정(影幀)과 유물을 보존하고 제향하다, 1704년(숙종30)에 소실됐다. 1707년(숙종33)에 중건하면서 모리재라 하였으며, 1758년에 곁에다 선생의 유허비를 세웠고, 1806년에는 문루인 화엽루(花葉樓)를 건립했다. 1921년에 대대적인 중건을 해 모리재, 사당, 동무, 서무, 화엽루 등 현재의 모습으로 구성했다.

화엽루 앞에서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히고 문루를 쳐다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다. 유흥준씨는 너무나 잘 알려진 그의 저서에서 "건물로서 모리재야 특별히 말할 것이 없지만 누마루에 올라 동계당년을 생각해 보면..."이라고 썼지만 나는 감히 그곳에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모리재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鳩巢(구소)' 오른쪽에는 '采薇軒(채미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채미는 주나라의 백이숙제처럼 고사리나 캐 먹으면서 굶주림이나 면하겠다는 뜻이다.

권력은 돌고 돌아 영남우도가 중심이었던 북인(北人)은 중앙정계에 발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비록 폐모론 논쟁에서 스승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1535~1623)과 갈라서기는 했지만 내암이 인조반정 후 참수를 당했고, 동계 후손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동계 종택 바로 곁에 붙어 있는 9대손 정기필의 고택
▲ 반구헌 동계 종택 바로 곁에 붙어 있는 9대손 정기필의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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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 ?~1728)가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자 난을 일으키자 동계의 고손자인 정희량(鄭希亮, ?~1728)도 경상도 지역에서 봉기하여 여기에 동조했다.

반역의 집안은 삼족을 멸하는 것이 조선의 법률이었으나 다행히 충신의 후손이라 멸족만은 면했다.

거의 한 세기가 흐른 뒤 동계의 9대손인 야옹(野翁) 정기필(鄭夔弼, 1800~1860)이 정계에 진출했다. 동계 종택 바로 곁에는 대문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는 '反求軒(반구헌)'이 있다. 야옹이 헌종, 철종 연간에 영양현감을 지낼 때 청렴한 인품으로 덕망이 높았으며 그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거처를 마련할 재산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안의현감과 고을사람들이 뜻을 모아 집을 지어준 것이 이 반구헌이다. 사랑채 상량문에 의하면 이 건물이 창건 혹은 중건된 시기는 187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반구'는 '반구제심(反求諸心)'에서 나온 말로 스스로 뒤돌아보며 항상 반성한다는 뜻이다.

짧은 일정에 갑자기 떠난 답사라 제대로 챙겨보지 못한 것이 많다. 할 수 없이 또 아쉬움은 다음으로 기약한다. 다른 계절에 다시 찾는다면 이번에 스치듯이 지나간 요수(樂水) 신권(愼權, 1501~1573)이 터를 잡은 후 거창 신씨의 세거지가 된 황산마을과 수승대, 동계 선생 아버지의 스승이기도 했던 갈천(葛川) 임훈(林薰, 1500~1584)의 종택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태그:#동계정온, #동계종택, #모리재, #반구헌, #반구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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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지리산 자락 경남 산청, 대한민국 힐링1번지 동의보감촌 특리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여전히 어슬픈 농부입니다. 자연과 건강 그 속에서 역사와 문화 인문정신을 배우고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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