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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두 건의 내부고발에 국민들의 시선이 집중돼 있다. 김태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 수사관이 우윤근 러시아 대사의 비리 문제를 포함해 특별감찰반의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을 폭로했다. 또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은 '청와대가 KT&G 사장 교체에 관여하고, 재정적 여유가 있었는데도 만기 도래 이전의 국채를 바이백(환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폭로가 역사에 어떻게 남게될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보수야권은 김태우·신재민을 공익제보자라고 규정하지만 그렇게 보지 않는 이들도 있다. 두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논란 가운데, 한편에선 '내부고발' 자체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태우·신재민의 경우를 떠나, 한국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되짚어본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동안 국민들의 뇌리에 두고두고 기억될 만한 내부 고발자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한국 현대사에 큰 의미를 남긴 공익제보들이었다.

6월항쟁과 연이은 노동자 대투쟁으로 한국 사회는 격동에 휩싸였다.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문턱을 넘느냐 못 넘느냐의 기로에서 사회가 일대 요동을 쳤다. 이런 가운데, 보수정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1987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평화민주당과 김영삼 통일민주당의 야권 분열에 힘입어 어부지리로 정권을 지켜냈다. 하지만, 1988년 제13대 총선 참패로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국면을 맞이하면서, 국민과 민주화세력의 눈치를 보며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민정당 정권이 얼마나 긴장했는지는, 1989년 9월 4일자 <경향신문> '개혁이 없으면 혁명이 일어난다'는 기사에서도 알 수 있다. 부총리나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강연회나 정책설명회를 통해 보수세력을 상대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다닌 것이다. 민정당 정권이 토지공개념 개혁정책을 추진한 것도 그런 공포심 때문이었다.

그렇게 코너에 몰렸던 민정당이 여유를 찾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90년 1월 3당 합당이 그것이다. 민정당이 통일민주당에 더해 김종필 신민주공화당을 끌어들인 이른바 '3당 야합'이었다. 이를 계기로 민주자유당(민자당)이라는 거대 여당으로 변신한 보수정당은, 몸을 추스르면서 반격을 위한 시동을 걸 수 있게 됐다. 보수가 6월항쟁의 결과물을 짓밟고 과거 회귀를 시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연달아 등장한 내부고발자들이 이문옥·윤석양·이지문 등이다.

부동산 비리, 민간인 사찰, 부정선거... 용감한 고발자들

1990년 5월, 이문옥 감사원 감사관(당시 53세)이 민자당 정권을 향해 폭로전을 개시했다. 노태우 정권이 국민적 열망에 부응해 재벌의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겠다면서 '부동산 투기억제 특별대책'을 발표한 5월 8일로부터 불과 3일 뒤였다.

이문옥 감사관은 제보자가 익명으로 처리된 5월 11일과 12일자 <한겨레신문>을 통해, 재벌의 로비를 받은 감사원이 강제매각 대상인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에 대한 감사를 중단했으며, 은행감독원도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보유 비율이 43.3%인 사실을 숨겨주고 1.2%로 대거 축소해 발표했다는 사실을 국민들 앞에 폭로했다.

이 폭로는, 노태우 정권이 부동산 대책과 재벌 정책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있으며 국민의 개혁 요구에 맞서 음흉한 계책을 꾸며 왔음을 고발하는 대형 사건이었다. 6월항쟁 이후의 사회 진보를 막고자, 개혁할 것처럼 위장하는 노태우 정권의 꼼수를 입증하는 폭로였다. 이 제보로 인해 이문옥 감사관은 5월 15일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구속됐다.
 
이문옥 감사관의 폭로에 관한 1990년 5월 16일자 <한겨레신문>.
 이문옥 감사관의 폭로에 관한 1990년 5월 16일자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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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뒤인 11월 4일에도 중요한 증언이 나온다. 일요일인 이 날 서울은 전날인 3일 토요일보다, 최고 기온이 4.2도 오르고 최저 기온이 1.8도 내려가 비교적 따뜻했다. 이 날 서울은 또 다른 이유로 매우 뜨거웠다.

이날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이병이 민자당 정권의 부조리를 폭로했다. 보안사는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이 1979년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할 당시의 그 부대였다. 그 보안사의 '졸병'인 윤석양 이병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도움으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실태를 폭로했다. 윤석양 이병은 디스켓 30장과 서류를 증거로 내밀며 보안사의 반국민적 범죄를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국민과 군대를 위해 일해야 할 보안사가 정권 편에 서서 국민을 감시했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가권력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보안사는 국군기무사령부로 이름을 바꿔야 했다. 보안사라는 이름으로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을 정도록 윤석양 이병의 내부고발이 위력을 발휘했다. 대신, 그는 2년간의 수배생활 끝에 1992년 9월 23일 기무사 및 헌병대에 체포돼 군무이탈죄로 2년형을 살아야 했다.
 
윤석양 이병의 체포 사실을 보도하는 1992년 9월 24일자 <한겨레신문>.
 윤석양 이병의 체포 사실을 보도하는 1992년 9월 24일자 <한겨레신문>.
ⓒ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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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만큼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위력적인 두 건의 내부고발이 있은 지 1년 반 뒤 또다른 사건이 터진다. 제14대 총선을 이틀 앞둔 1992년 3월 22일이었다. 이 선거에서 민자당은 4년 전의 여소야대 참패를 설욕해야 했다. 13대 총선 때 도합 219석(민정 125, 통일민주 59, 신민주공화 35)을 획득한 세 당이 3당 통합을 이룬 뒤에 치러지는 첫 선거이므로, 전체 299석에서 과반수를 훨씬 넘는 압도적 대승을 거둬야 했다. 그런 선거가 있기 2일 전, 24세의 육군 중위 이지문이 세상을 놀라게 하는 내용을 폭로했다.

윤석양 이병이 전두환이 사령관이었던 부대에 근무했던 데 비해, 이지문 중위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12·12 쿠데타 때 사단장이었던 9사단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지문 중위는 '총선 전에 치러진 군대 부재자 투표 때 민자당 후보를 찍으라는 압력이 병사들에게 가해지고 심지어 공개투표까지 이루어졌다'는 내용을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이 기자회견은, 6월항쟁의 민의를 왜곡하는 3당 합당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를 연상시키는 위헌적 불법선거 수단까지 동원해 국민의 뜻을 억압하려는 보수정당의 부조리를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런 일을 한 직후, 이지문 중위는 근무지를 이탈했다는 이유로 연행돼 구속됐다가 이병으로 파면됐다. 3년간의 법정 다툼 끝에 파면을 취소시키고 중위로 전역했다.

이지문 중위의 기자회견 이틀 뒤 열린 제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은 과반수에서 1석 모자라는 149석을 얻는 데 그쳤다. 13대 총선에서 도합 219석을 얻은 세 정당이 하나로 뭉쳐 거대 여당을 만들었건만, 제1당이기는 하지만 과반수가 안 되는 의석으로 대폭 줄어든 것이다. 3당 합당의 '보람'이 상당부분 없어졌던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진보하는 데 기여했던 폭로들
 
폭로 1년 뒤인 1993년 5월 15일자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이지문 중위의 연행 장면.
 폭로 1년 뒤인 1993년 5월 15일자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이지문 중위의 연행 장면.
ⓒ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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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옥·윤석양·이지문 세 내부고발자의 폭로는, 6월항쟁의 불씨를 끄기 위한 보수세력의 대반격이 가속화되던 시점에서 등장했다. 이들의 내부고발은 보수 세력의 부조리와 반(反)국민적 죄악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시민혁명에도 불구하고 보수 권력이 여전히 살아남아 개혁과 진보를 훼방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개혁과 진보의 편에 서서 보수 권력의 부조리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들의 폭로는 3당 합당을 계기로 지지 기반을 넓히려는 보수 정당의 시도를 상당부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들로 인해, 유권자들의 의식 속에는 보수정당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확산됐다. 3당 합당으로 형성된 정치지형이 불과 2년 만에 무너진 데는 이들의 폭로가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당 합당으로 보수는 이전보다 막강해진 데 반해 진보는 상대적으로 위축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 사람의 공익제보는 국민과 진보세력에게 메가톤급 힘을 안겨주었다. 이들의 내부고발은 6월항쟁의 결과가 덜 위축되는 한편, 한국 사회가 진보와 발전을 향해 계속 힘차게 전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현대사와 민주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폭로들이었다. 

태그:#이문옥, #윤석양, #이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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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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