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경 가족>의 한 장면

영화 <동경 가족>의 한 장면 ⓒ 오드


오즈 야스지로 사망 50주기를 맞아 제작된 영화 <동경 가족>은 <동경 이야기>를 오마주한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방향이 다르다. <동경 이야기>에서 그들은 마치 척력(밀어내는 힘)으로 공생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동경 가족>에서 그들은 하나의 자장 안에 있는 듯 보인다. 오즈의 아버지가 쓸쓸하게 홀로 남는 것과는 달리, 야마다의 아버지는 막내아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둘 다 동일하다. 그러나 <동경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던 배가 <동경 가족>에서는 노부부를 동경에 데려온 페리선으로 설명된다. 즉 <동경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쓸쓸함이 물 위에 흘러가는 것이라면, <동경 가족>에서 아버지의 쓸쓸함은 자신의 삶 위에서 흐른다. 

<동경 이야기>에서 물 위를 떠가는 배가 수많은 기표의 집합이라는 점을 우리는 안다. 그 배는 영화의 시작과 끝에 자리 잡아 일종의 차연(differance)을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된다. 그러나 <동경 가족>에서의 페리선은 이 차연의 경계를 명확히 한다. 자신들이 동경에 왔다가 자녀들을 동경으로 떠나보내는 페리선의 모습은 마치, 무한히 뻗어 나갈 가능성이 아니라 막연하게 남겨진 두려움에 가까워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되물어 볼 수도 있다. 부모를 섬에 남겨두고, 동경에 상경한 자녀들이야말로 섬에 갇힌 것은 아닌지. 노부부의 고향이 섬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섬이 아니면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 같다. 요컨대 노부부를 노쇠한 것, 구시대라고 가정할 때, 구시대는 섬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자녀들이 부모를 떠난 게 아니라 부모가 자녀들을 떠난 것일 수도 있다.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섬에 남은 게 아니라, 동경이라는 신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것을 잘 알았기에 그곳에 남은 것이다. 

요컨대 야마다 요지는 오즈를 동정한 것 같다. 다른 시대를 살았으나 비슷한 고민을 할 나이대인 그에게, 오즈의 영화는 단순히 관객으로만 볼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이 영화가 개봉할 때 야마다 요지는 만 82세였고 삶으로만 보면 오즈보다 22년을 더 살았다. 두 사람은 시대도 나이도 결혼 여부도 다르지만 영화라는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

그리고 야마다 요지는 오즈를 존경했으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오즈의 시대가 현대에도 유효하다고 보았다. 어쩌면 야마다 요지가 그 시대 사람이기에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야마다의 오즈 해석방식은 답습하거나 변주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내미는 등의 관용이었다. 
 
 영화 <동경 가족>의 한 장면

영화 <동경 가족>의 한 장면 ⓒ 오드


두 개의 동경

이 영화가 오즈의 오마주이기는 하나, 두 영화를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오마주가 오마주인 이유는, 원본을 알면 더 재밌는 것이지 원본을 알아야만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영화는 제목에서 '동경'이라는 단어만 일치할 뿐, 다른 영화라고 보는 게 맞을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영화의 비교는 몹시 흥미롭다. 오즈의 팬들에게 이 영화는 만약이라는 상상의 산물이다. 과거의 가족이 현대에 옮겨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단상. 그들이 찢어질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자괴. 스크린이라는 허구가 꿈으로 다가오기만을 우리는 빌어본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잡힐 듯한 이 환상을 우리는 쥐어본다. 

야마다는 과거의 가족을 재현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저런 구닥다리 가족이 아직도 남아있느냐고 화를 낸다. 분명 오즈의 시대에도 그런 가족은 희미했고, 요즘 같은 현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찢어졌지만 노부부를 극진하게 모시는 자녀들의 모습은 핵가족이라는 개념을 지나 1인 가구로 발전했다. 영화에서 프리터(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취업준비생)로 나오는 쇼지(츠마부키 사토시)가 그렇다.

그런데 쇼지는 <동경 이야기>에서 전쟁 중에 실종된 인물이다. 말하자면, 이런 일로 앞가림을 잘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조차 할 수 없는 게 <동경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야마다는 전쟁으로 사라진 개념을 현대에 들어 다시금 살려냈다. 그러나 이건 변주가 아니라 관용이다.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피고자 했다. 즉, 죽음의 필연성이 있는 곳에는 삶의 필연성도 함께하노라고 야마다는 말한다. <동경 가족>에서 야마다가 오즈를 동정한다고 느껴지는 게 그 부분이다.
 
 영화 <동경 가족>의 한 장면

영화 <동경 가족>의 한 장면 ⓒ 오드


해체와 생성 

<동경 이야기>와 <동경 가족>에서, 쇼지를 두고 벌어지는 차이점은 며느리를 떠나보내는 것과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른바 해체와 생성. 두 영화의 노리코는 히라야마 가의 결말을 암시한다. 그러나 죽은 어머니의 유품을 받아들인다는 점은 같다. 우리는 이런 배치를 통해 두 영화가 유사하리라고 믿게 된다. 오마주이기에 비슷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야마다는 <동경 가족>에서의 노부부가 섬에 갇혀야만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도 노리코(아오이 유우)는 그들을 떠나는 인물이다. 이건 오히려 <동경 이야기>보다 더욱 슬픈 관계다. <동경 이야기>에서 노리코(하라 세츠코)는 완벽한 타인이 되어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텐데, <동경 가족>에서 노리코는 같은 가족이면서도 하나의 자리에 있지 못한다. 그들은 동경에 살아야 하고 아버지는 섬에 남아야 한다. 그들이 살아온 시대가, 사회가, 시간이 그들의 자리를 규정했기에, 위수지역처럼 그곳에 남아 지켜야만 하노라고 야마다는 말한다. 

오즈가 말하는 건 시간이 흐르면서도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오즈의 딸들은 집을 떠나야만 했다. 이때 예외적인 것은 탄생이 아니라 결합이다. 오즈의 부부는 늘 불화를 극복했다. <오차즈케의 맛>, <동경의 여인>, <바람 속의 암닭>. 이 영화에서 쇼지와 노리코가 결합에 이르는 것도 그런 관습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동경 이야기>가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그런 관습에서 예외적이었다는 것이었다. 가족이 꼭 뭉쳐야 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

이 영화에서 쇼지와 노리코는 애초에 결합될 수 없는 관계였다. 쇼지가 실종되었고 실종이지만 사실상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결합이 아니라 해체를 향하는 이 영화의 기수는 그동안 맞서 싸워왔던 신념을 굽히고 시대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야마다가 등장했다. <동경 가족>은 시간이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법칙을 유지하면서도, 어디로 되돌아갈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오즈의 시간이 선형적이었지만, 돌아갈 수 없다면 방향을 바꾸면 된다고 말이다. 

아마도, 동일본대지진을 겪고 각본을 수정했다는 감독의 발언은 바로 이 부분에 적용되었을 것이다. 시간이라는 구슬이 파편으로 남을지언정 다시 붙을 수 없다는 게 오즈의 영화이고, 그런 불변이 마음 속에 자리하는 게 오즈의 인물이었다. 야마다는 그런 오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잔혹한 파괴는 창조의 정수라고 말하는 오즈가 있다면 야마다는 왜 하필 파괴냐고 물었다. 야마다는 그 파괴가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향할 수도 있지 않으냐고 물었다.

요컨대 동일본대지진이 남긴 게 단지 이웃들의 죽음뿐만은 아닐 테다. 오즈의 영화에서 아버지들이 느꼈던 감정은 딸과의 헤어짐이 아니라 홀로됨의 공포이기도 했다. 산 자의 공포 혹은 기록. <산 자의 기록>에서 그들은 혹시나 모를 방사능을 피해 브라질로 가려고 한다. 이미 사태가 끝났음에도 허구의 시간을 일본에 소환하고, 그것도 모자라 일본을 피해 브라질로 도망가려 한다. 말하자면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의 도피. 어쩌면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야말로 물리적이기에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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