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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을 붙들어야 미래가 안정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오랫동안 한미동맹에 의존해 왔으니, 이 불확실한 시대에 그것만큼 확실한 게 없어 보일 수도 있다. 2018년 12월 31일자 <조선일보>에 '김정은 답방만 목매 기다리는 한국 외교'란 칼럼을 기고한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도 한미동맹에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이렇게 말했다.
 
"한미동맹만 굳건하다면 대중·대일 관계가 악화돼도 일정 부분 우리에게 (대한) 부정적 영향을 차단할 수 있다. ······ 한미동맹마저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지옥의 문 앞과 같은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2018년 12월 3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의 '김정은 답방만 목매 기다리는 한국 외교'
  2018년 12월 3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의 "김정은 답방만 목매 기다리는 한국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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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서 윤덕민 전 원장은 철천지원수처럼 으르렁대던 시진핑 주석과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 2018년 10월 26일 한화 30조 원짜리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한 사실을 언급했다. IMF 금융위기 같은 사태를 대비해 위안화와 엔화를 상호 융통하기로 하는 협정이 체결된 일을 두고 그는 이렇게 평가했다.
 
"외교란 이런 것이다. 필요하다면 적과의 동침도 서슴치 않는다. 국익과 실리 앞에 이념이나 코드는 없다. 마오쩌둥이든 레이건이든 외교는 철저히 현실주의에 서서 국익을 추구한다."

중국과 일본은 국익을 위해 적과의 동침도 서슴치 않는데, 우리 한국만 이념과 코드에 매몰돼 한미동맹을 경시하고 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어제의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이 불안정한 국제정세에서 살아남으려면 한미동맹이라도 꽉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미동맹만 굳건하다면, 부정적 영향을 차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럴싸한 말이지만, 명백히 잘못된 말이다. 외교관계에 문외한인 사람도 아니고, 외교부 부속기관의 장이었던 사람이 할 만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금의 현실을 냉정히 따져보면 그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미동맹만큼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게 없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한미동맹은 대북적대정책을 전제로 운영됐다. 그런데 바로 그 대북적대정책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흔들어대고 있다. 지난 2018년 9월 30일(현지 시각) 워싱턴 서쪽의 웨스트버지니아주 공화당 집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노동당위원장의 친서를 거론하면서 "그는 내게 아름다운 편지들을 썼고 멋진 편지들이었다"고 한 뒤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다.

바로 그 트럼프로 인해 북한과 미국이 정상회담을 열었고 한미합동군사훈련은 중지됐다. 또 2018년 한 해 동안, 미국은 북한과 상당히 가까워졌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마음으로만 '연모'하는 게 아니라 수시로 만나고 싶어 한다. 이처럼 한미동맹의 대전제인 대북적대정책이 약화되고 있으니, 한미동맹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미동맹이 흔들린다는 것은 이 동맹이 불안정함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동맹을 꽉 붙들자고 외치는 것은, 외교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일이다.

만약 한국이 미국보다 강하다면, 미국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간에 한국의 의지로 동맹을 유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보다 훨씬 강한 미국이 동맹을 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꽉 붙든다 해서 이 동맹이 예전처럼 유지될 수 있을까. 진보든 보수든 간에 전직 국립외교원장이라면 그 점을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것이 위의 칼럼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나타다고 있는 변화의 징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 도널드 트럼프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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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관계 조정을 통해 한미동맹를 흔드는 일 외에도, 미국은 세계적 차원에서 동맹관계를 재조정하고 있다. 지금 미국은 시리아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발을 빼려 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러시아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일을 미국이 벌이고 있는 것이다.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가 부각된 1991년 이전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미국은 러시아를 견제해왔다. 그런데 지금 트럼프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방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정책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략에 근본적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반영하는 징후로 읽을 여지가 없지 않다.

트럼프는 러시아 스캔들이라는 약점을 안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러시아 정부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낙선시키는 공작을 했다는 의혹의 중심에 트럼프가 서 있다. 이 때문에 트럼프는 러시아에 대한 호의적 감정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꼭 트럼프가 아니더라도, 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태도를 바꿔야 할 이유가 많다. 러시아의 도움을 얻을 일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동민 단국대 교수의 논문 '미국 트럼프 정부의 대(對)러시아 전략 변화 가능한가?'는 그 이유들을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는, 중국 견제다.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무엇보다 대(對)러시아 경제제재 이후 빠르게 진행된 중·러 밀착을 완화하는 것을 목표로 그 전략을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유럽 견제와 안정 관리라는 두 가지 측면이 공존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중동 지역의 안정 관리라고 볼 수 있는데, 미국은 러시아를 통해 테러리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도 있어 보인다."
-한국동북아학회가 2017년 발행한 <동북아논총> 제83호에 수록.
 
러시아보다 훨씬 강해져버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또 미국 홀로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유럽과 중동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러시아와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이후의 미국 대통령들도 러시아와 손잡아야 할 이유가 많다는 것이다.

미국은 종전에 적대적이었던 러시아와 가까워질 가능성을 보여주는 한편, 리처드 닉슨 대통령(재임 1969~1974년) 이래의 중국 정책을 수정할 조짐까지 보여주고 있다. 걸출한 전략가 헨리 키신저가 수립한 이 정책은 중국과의 적대적 협력관계를 발판으로 미국의 아시아 패권을 보호하는 동시에 소련(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018년 무역전쟁이 보여주는 것처럼, 미국은 중국과의 협력관계에 대해 예전 같은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 중국에 대한 태도에 중대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진짜 '현실주의 외교'를 하려면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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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닉슨 행정부 이래의 중국 정책을 흔들 가능성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초기부터 제기됐다. 이를 두고 미국 내에서는 '역(逆)닉슨 전략'이란 말까지 나왔다. 이런 분위기를, 홍관희 고려대 교수의 논문 '트럼프의 역(逆)닉슨 전략-미·러 연대로 중국 견제'는 이렇게 설명한다.
 
"중국의 급격한 대외팽창을 견제하기 위한 러시아와의 연대 전략이 그것이다. 역(逆)닉슨(reverse-Nixon) 전략으로도 불리는 이 대외노선은 대표적인 현실주의 정치학자인 미어샤이머(Mearscheimer)의 지론이기도 하다. 1970년대 초 미국이 중국을 끌어들여 소련의 팽창을 억제했던 방식을 역으로 활용하는 이이제이 전략인 셈이다."
-북한연구소가 발행한 <북한> 2017년 2월호에 수록.
 
이처럼 미국은 북한은 물론이고 러시아에 대한 입장까지 서서히 바꾸고 있다. 북한 지도자와는 '사랑'에까지 빠져 있다. 동시에, 전통적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손을 내미는 게 아니라 손을 벌리고 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도 주둔 비용을 더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동맹관계를 용역계약 관계로 바꾸려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온 세상을 요란스럽게 만들면서 적과 동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는 이때, 한국이 살아남는 길은 미국의 태도를 예의주시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미국이 세계질서를 흔들고 있으므로, 미국의 행보가 한국에 불이익을 주지 않는지 주목해야 한다. 또 미국이 한국을 향해 불화살을 쏜다면, 얼른 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한미동맹을 무한정 믿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해야, 화를 피하고 불이익을 피할 수 있다.

윤덕민 전 원장은 칼럼에서 "외교란 이런 것이다. 필요하다면 적과의 동침도 서슴치 않는다. 국익과 실리 앞에 이념이나 코드는 없다"면서 중국과 일본의 행보를 본보기로 제시했다. 중·일처럼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철저하게 현실주의 외교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는 '우리 한국만큼은 한미동맹에 연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으로 인해 한미동맹이 불확실해지는 마당에 미국과의 동맹에 더욱 더 의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국익과 실리를 위해서라면 미국의 태도 변화에 따라 한국도 태도를 바꿔야 하는 이때, 미국과의 관계에서만큼은 아무것도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듯한 그의 주장은 다소 의아하게 다가온다.

태그:#한미동맹, #윤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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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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