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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 이른 아침, 기차역 대합실에는 옅은 설레임이 흐르고 있다.
 겨울날 이른 아침, 기차역 대합실에는 옅은 설레임이 흐르고 있다.
ⓒ 김숙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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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변한단다.' 어릴 적 어른들께선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은근히 웃곤 했었다. 지금이야 이런 얘기를 해주시는 어른도 없고 또
그 말을 믿을 아이도 없지만 그때 어른들께서는 왜 있지도 않은 얘기를 하셨을까. 한 해의 마지막 날만큼 쉽게 잠들지 말고, 가고 오는 시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다지며 밤을 보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들, 이제는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가오는 시간을 맞아야 할 때다.

그래서 기차여행을 떠났다. 종종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떠나곤 한다. 마산역에서 순천역, 그리고 다시 마산역까지 네 시간 동안 느리게 가는 열차의 창가에 앉아 창밖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편안하고 여유롭다. 밀려있는 사념의 보따리를 마음껏 풀어내고, 가끔은 아프지만 또다른 나를 사심 없이 들여다본다. 돌아올 때쯤이면 한결 마음이 넉넉해져 있다. 
 
타고갈 열차가 도착했다.  내리고 타는 사람들. 나는 기차여행을 떠난다.
 타고갈 열차가 도착했다. 내리고 타는 사람들. 나는 기차여행을 떠난다.
ⓒ 김숙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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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사역을 지나친다.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없다. 이젠 역무원 없이 무배치간이역이 된 역의 쓸쓸한 풍경이 애틋하게 다가온다. 경전선 역의 반 이상이 폐역이나 무인역으로 변해버렸다. 흐르는 시간들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 하지만 사라지는 옛날들이 유독 사람 냄새나고 따뜻하게 여겨지는 무슨 까닭일까. KTX를 한 번도 타보지 않았다는 내게 사람들은 말한다. 얼마나 빠르고 편리한지 아느냐고. 물론 바쁜 현대인들에게 유용한 교통수단임은 틀림없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진주역에 가까워지니 5분간 쉬겠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열차가 멈추고 승객들이 서둘러 내려서 뛰어간다. 그리고는 역사 안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다시 기차에 올라탄다. 나도 따뜻한 커피 한잔을 들고 왔다. 오늘은 객차가 세 량만 운행하기에 열차 카페가 없다. 문득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서울을 오르내리며 기차가 대전역에 도착하고 다시 출발하는 짧은 시간 동안 재빨리 우동을 사먹던 기억. 

순천역에 도착했다. 시간표를 확인하니 2시간쯤 여유가 있다. 지난번처럼 순천역사 근처에 있는 전통시장에 가서 팥칼국수를 먹고 시장을 구경한 뒤 다시 돌아오는 기차에 올랐다.
 
순천에서 서울로 향하는 열차가 스쳐 지나갔다.
 순천에서 서울로 향하는 열차가 스쳐 지나갔다.
ⓒ 김숙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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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날. 사람들은 새해 첫날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기 위해 너도나도 길을 떠난다. 사실 일 년 365일 해는 떠오른다. 어제의 해도, 오늘도 내일도 같은 해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새해 첫날 떠오르는 해를 보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다짐을 한다. 모든 것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다. 나도 한 해를 보내며 생각해본다. 새해에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 돈이 많고 권력이나 지위를 가진 사람 앞에서는 언제나 당당하고,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손을 내밀 수 있기를.
-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넉넉한 마음, 진실된 마음, 올바른 마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게 되기를.
- 죽어버린 의식과 빈곤한 정신세계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
- 새것보다는 옛것을 더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잃지 않기를.
-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게 되기를.
-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함을 잊지 않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순천역에서 다시 마산으로 향하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순천역에서 다시 마산으로 향하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 김숙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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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 풍경은 마음에 다가오고 생각은 깊어진다. 기차는 정확한 시간에 나를 다시 마산역에 데려다주었다. 느린 기차여행을 끝낸 내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종종 무궁화호 열차 여행을 하며 숨을 고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행복하다.

태그:#송구영신, #기차여행, #무궁화호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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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나를 살아있게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과 객창감을 글로 풀어낼 때 나는 행복하다. 꽃잎에 매달린 이슬 한 방울, 삽상한 가을바람 한 자락, 허리를 굽혀야 보이는 한 송이 들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날마다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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