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의사당 대로에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는 불꽃집회가 열렸다.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의사당 대로에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는 불꽃집회가 열렸다.
ⓒ 지유석

관련사진보기

 
지난 12월 15일, 여의도 국회 앞 거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집회가 열렸다. 여러 시민단체들이 집회장 한편에 부스를 차려 캠페인을 벌였고, 노란색 옷을 입은 정의당 당원들도 많이 보였다.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을 비롯해서 노동당과 우리미래와 녹색당의 깃발도 펄럭였다.

집회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면 매우 이례적인 조합인 이 집회는 짐작하다시피 연동형 비례대표제도로 정치개혁을 촉구하는 시민단체와 거대 양당을 제외한 소수정당들의 연합 집회였다.

특히 야3당 중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국회를 주도하는 두 거대 정당들에게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위한 논의에 성실하게 나서라고 경고하는 단식농성이 9일째에 접어들고 있던 시점이었다. 

집회가 시작되기 직전 '연동형 비례대표제도 도입방안을 적극 검토'하기로 합의한다는 내용의 6개항 합의문이 알려졌고, 사람들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집회를 즐겼다.

배신의 풍경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 2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 2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집회가 끝나고 각 당 원내대표들의 서명이 포함된 합의문이 공개되고 난 뒤, 시차도 없이 익숙한 '배신의 풍경'이 펼쳐졌다. 

배신의 풍경 첫 번째 등장인물은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였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도입 검토 수준의 합의'에 불과하다면서 합의문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자신이 원내대표 경선에서 승리한 다음에 처음으로 한 원내 정당간 합의인데도 스스로 별것 아닌 일이라는 식이다. 나경원 원내대표 식으로 문구를 정확히 풀어 말하자면 '검토'가 아니라 '적극 검토'를 합의한 것이며, 적극 검토란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의미다.

두 번째 배신의 풍경은 그간 정개특위에 참여했던 자유한국당 측 간사를 김재원 의원으로 교체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재원 의원은 뇌물수수죄로 재판이 진행 중이었는데, '이런 사람이 정치개혁을 논할 수 있는가'라는 비판이 잇따르자, 지난 20일 한국당은 김재원 의원이 아닌 장제원 의원을 간사로 선임한다고 발표했다. 이 우왕좌왕을 보며 소셜미디어에서는 '자유한국당에 이렇게 재원(제원)이 많냐'는 반어적 한탄이 쏟아졌다. 

배신의 풍경 세 번째 주인공도 자유한국당이다. 합의문에는 '10% 범위 내에서 의원정수 확대 여부를 검토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의원정수를 줄이는 것이 정치개혁'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지난 20일엔 한국당 지도부가 '의원정수 축소'를 정개특위 논의사항으로 상정할 것을 검토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는 한국갤럽이 조사한 공공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17개 기관 중 압도적 꼴찌였다. 자유한국당식으로 따지면 국민들이 생각하는 정치개혁의 심정적 방향은 국회를 없애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처럼, 합의문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 자유한국당은 세 번이나 합의를 부인하고 배신의 풍경을 연출한 것이다.

배신 비긴즈(Begins)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 사진은 지난 2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 생각에 잠긴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 사진은 지난 2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만약 후세대들이 한국 정치개혁의 역사를 배운다면, 자유한국당이 배신의 풍경을 찍기 전에 이미 더불어민주당이 '배신 비긴즈(Begins)'를 찍어뒀다는 것은 반전으로 여겨질 것이다.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당 대표였을 때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당론으로 삼았고, 대통령 선거 때는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이제 약속을 지킬 차례가 왔는데도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지난 11월 23일 "공약한 것은 권역별 비례대표제였지 연동형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언론과 야당이 민주당에게 민주당 당론을 가르쳐야 하는 당황스러운 상황이 됐다.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김성태 의원은 '야3당의 합의를 기본적으로 동감한다'면서 민주당을 마음껏 조롱했다. 민주당의 배신 비긴즈의 첫 번째 챕터다.

배신 비긴즈 두 번째 챕터의 주인공은 홍영표 원내대표다. 이해찬 대표 발 '말 바꾸기 논란'으로 야3당의 비판이 쏟아지자 홍영표 원내대표는 지난 11월 28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의원정수를 늘릴 건지 말 건지, 지역구-비례대표 비율을 어떻게 할지 야당도 답을 내놔야 한다"라고 말했다. 훈계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언론과 야당은 다시 한 번 똑같은 강의를 해야 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당신들의 당론이고, 당신들의 선거 공약이었는데, 왜 그것을 야당이 준비해줘야 하는가!'라고.

세 번째 쳅터의 주연은 홍익표 민주당 대변인이 맡았다. 지난 10일 그는 '당대표가 선거제 개편안을 결정하라는 것은 정개특위를 무력화하자는 것'이라면서 되레 야3당을 탓했다. 야3당이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해 5당 대표가 만나 합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말이었다.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20대 국회의원들이 사용하는 배지. 사진은 2016년 4월 11일 제20대 국회의원들에게 지급할 배지가 공개되고 있는 모습.
 20대 국회의원들이 사용하는 배지. 사진은 2016년 4월 11일 제20대 국회의원들에게 지급할 배지가 공개되고 있는 모습.
ⓒ 공동취재사진

관련사진보기

 
가장 최근(1993년)에 소선거구제를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꾸는 데 성공한 나라가 뉴질랜드다. 민주당과 한국당은 뉴질랜드 노동당과 국민당의 사례에서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대국적이지 못한 정치의 말로는 이미 10.26으로 증명되지 않았나.

뉴질랜드 노동당은 두 차례의 총선에서 모두 국민당보다 더 많은 정당지지율을 얻었지만 승자독식 선거구제로 인해 의석수는 더 적게 배정받았다. 당연히 선거제도 개혁 여론이 생겼다.

노동당은 1987년 총선에서 집권하면 선거제도를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도로 바꾸겠다고 약속했고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런데 집권 후 노동당은 제도개혁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다가 급기야는 '연동형 제도 개혁은 당론 아님'이라는 당론을 채택한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배신의 풍경은 이미 뉴질랜드에서 행해졌었다. 3년마다 열리는 뉴질랜드 총선일정에 따라 1990년에 다시 총선이 있었다. 이 선거에서 보수정당인 '국민당의 대국적인 정치력'이 빛을 발휘했다. 

뉴질랜드 국민당은 노동당이 지난 선거 때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국민투표를 자신들이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리고 6년 만에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국민당 정부는 우여곡절 끝에 두 차례에 걸쳐 제도개혁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최종적으로 53.9%가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도입에 찬성하고 46.1%가 반대해 지금의 뉴질랜드 선거제도 개혁이 완수된 것이다. 

이제 결론을 말할 때다. 

사회가 바뀌면 당연히 정치도 그에 부응해야 한다. 지금은 독재와 반독재, 개발주의와 민주주의가 대립하던 20세기 사회가 아니다. 21세기에는 그보다 훨씬 더 다양한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등장했다.

사표를 없애고 선거의 비례성을 강화해서 승자독식 다수제 정치제도를 다양한 정치세력간의 합의제 정치구조로 바꿔 보자는 것은 정치제도의 측면에서 본 21세기의 시대정신에 해당하는 것이지, 특정 세력의 유불리로 따질 일이 아니다. 

그러니 민주당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정권을 내준 뉴질랜드 노동당의 사례를 좀 참고하시고, 자유한국당은 정치를 대국적으로 해서 박수받은 뉴질랜드 국민당에게 좀 배우시라.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24일 오전 국회 운영위원장실에서 3당 원내대표 회동을 하고 있다.
▲ 원내대표 회동하는 홍영표-나경원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24일 오전 국회 운영위원장실에서 3당 원내대표 회동을 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나경채씨는 전 정의당 공동대표입니다.


태그:#연동형비례대표제,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정의당, #배신
댓글3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