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작품 포스터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작품 포스터 ⓒ 판씨네마


자비에 르그랑 감독은 이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의 경로는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 있었다. 법정에서 시작해 호러로 끝나는 것으로. 법정에서 내리는 판결이 가족을 진정한 비극으로 내모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씨네 21> 1161호)

감독의 말처럼, 법정에서 시작한 영화가 집안에서의 총질로 끝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영화 같은 일들이 많이 있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는 스크린에서도 불합리하게 느껴질 만큼 끔찍하기 때문이다. 장르 영화로 따지면 '실패'에 가까운 이 서사적 흐름이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은 우리를 숙고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실패'에 가까운 서사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네 현실에 옮겨오게 되었나. 아니, 그 반대로 물어야 한다. 이 '현실'은 왜 '실패'에 가까운 것처럼 묘사되어야만 했나. 

끝나는 것과 끝나지 않을 것

영화는 이혼한 부부 앙투안(드니 메노셰)과 미리암(레아 드루케)의 법정 심리로 시작한다. 딸은 18세가 넘었으니 양육권 분쟁은 없고 줄리앙은 아직 나이가 어리니 누구에게 양육권이 돌아갈 것인가의 문제로 다툰다. 아버지 앙투안과 어머니 미리암은 2주에 한번 주말 동안 아버지에게 줄리앙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주인공 줄리앙(토마 지오리아)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줄리앙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오가며 그들 사이의 상처를 온몸으로 맞는다. 영화는 자동차에 줄리앙의 가방을 던져 넣는 앙투안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쇼트 직후에 안전벨트를 메는 줄리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두 쇼트는 화면 내의 운동-이미지를 하나로 봉합함으로써 '짐짝처럼 취급되는 줄리앙'이라는 기표를 완성한다. 이때 우리는 '짐짝처럼 취급되는'이라는 모멸감이 아니라 '짐짝'으로써 바닥에 내팽겨지면서 받을 충격을 생각해보게 된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지점은 폭력적인 아버지와 학대받는 어머니라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다. 영화는 아버지의 총질이라는 충격적인 결말로 끝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어머니임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즉 어머니의 품 안으로 돌아간 줄리앙이 '짐짝' 취급에서 벗어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리암은 앙투안의 학대를 피해 줄곧 거처와 연락처를 바꾸어서 수중의 돈이 별로 없다. 제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아들에게 쓸 수 있는 돈이 많지 않을 테고, 어쩌면 줄리앙은 미리암이 아니라 할머니의 품에서 자라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미리암도 나쁜 부모여서 줄리앙을 다시금 학대할 수도 있다. 또는, 차후 재혼을 하게 된다면 미리암이나 그녀의 재혼 상대가 줄리앙을 '짐짝'으로 여길 수도 있다. 결국 이 영화는 제목처럼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영화의 제목은 아주 다양한 방면으로 줄리앙을 압박한다. 영화의 중간에, 어린 줄리앙은 어머니의 거처를 알려주기 싫어서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도망친다. 앙투안은 도망치는 줄리앙을 쫓아가다가 이내 그만두고 돌아선다. 앙투안은 병원의 보안과장으로 일해서 어린 줄리앙을 쫓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달리지는 않으니, 의도적으로 추격을 그만둔 셈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추격을 그만두었을까? 어린 줄리앙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줄리앙은 아직 초등학생이어서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혹은 자립의지가 있다고 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도망쳐서 할머니 댁으로 간다 하여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이 도주는 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줄리앙은 자신을 포기하고 자동차로 돌아가는 앙투안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다가 쭈뼛한 발걸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짐짝 같은 상황이다.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건, 내버리고 싶지만 내버릴 수 없는 것을 뜻한다. 그게 경제적인 이유이든 도의적인 이유이든 간에, 버려지고 싶어도 버려질 수 없는 현실은 어디까지나 '끝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꺼진 불씨가 아니라, '아직은 끝날 수가 없다.'라는 반강제적 현실에 가깝다.

요컨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감독의 의도는 영화의 마지막에 경찰이 왔음에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도 있지만, 끝나는 것과 끝나지 않을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되는 어떠한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가 있는 것이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한 장면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한 장면 ⓒ 판씨네마

  
누구의 시선인가

불특정 다수에게 이런 불쾌함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사람들은 위기에서 탈출해 새 삶을 찾는 이야기를 더 선호한다. 이를테면 수년간의 감금에서 탈출하는 <룸>(2015)이나 집안에 침입한 괴한들로부터 몸을 피하는 <패닉룸>(2002)이 있다. 여기에 판타지적인 요소를 조금 가미하자면 <큐브>(1997)나 <쏘우>(2004)가 된다. 

사람들은 이런 영화에서 감금된 공간을 영화관이라는 지정좌석과 동일시하게 되고, 위기를 극복한 후 맞이하는 행복한 결말을 가슴에 품은 채 자리를 뜨게 된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총격이 끝나고 경찰이 들이닥치는 순간에 영화가 끝나버리니 관객은 여전히 '위기상황'인 셈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관객들은 여전히 '위기상황' 속에 내동댕이 처져 있다. 스크린 속의 모자가 어두운 집안에서 밝은 경찰들을 맞이했듯이, 관객도 어두웠던 영화관에 '결말'이라는 밝은 조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 영화의 결말로 돌아가 보자. 앙투안이 미리암의 집에 들이닥쳐 줄리앙을 향해 총질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집에 들이닥쳐 '아들'을 향해 총질한다. 이들을 지켜보는 것은 맞은편 가구에 사는 어느 할머니다. 영화는 할머니의 신고로 경찰을 출동시킨 다음 공황상태에 빠진 미리암이 뒤늦게 신고했을 때 상담원을 통해 "이미 경찰이 출동했다."라는 말을 전달한다.

그리고는 총을 쏘는 아버지가 출입문을 부수고 모자가 숨은 화장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경찰이 아슬아슬하게 도착한다. 말하자면 맞은편에 사는 할머니가 미리암보다 먼저 신고를 했기에 경찰이 제때에 도착한 셈이다. 이런 식의 서사구조는 아마도 누군가의 폭력을 목격했을 때 보다 빨리 신고해야만 그들을 구할 수 있다는 '신고정신'을 독려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남겨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누구의 시선으로 보아야 할까. 영화는 줄리앙을 주인공으로 진행되므로 줄리앙의 시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폭력행위를 신고한 이웃집 주민의 존재로 우리의 시선은 모호해진다. 

영화의 마지막은 문틈 사이로 자신이 신고한 이웃집의 '결과'를 지켜보는 할머니의 시선으로 끝나는데,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제3자'의 시선으로 끝나는 게 된다. 그리고 제3자라는 점에서 할머니와 우리는 동일시된다. 우리는 스크린 밖에서 그들을 염탐하고 있었고, 할머니도 문 안에서 그들을 염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점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신고하지 않았고 신고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관찰자이자 방관자로서의 무기력함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와 할머니의 차이점이라면 할머니는 서사 안의 인물로서 경찰신고를 통해 서사에 개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영화는 이 지점에서 자신이 '신고정신'을 독려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애초에 영화 밖의 인물이니 신고할 수가 없고, 그 신고는 영화 속에서 이미 실행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마지막 시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전히 '위기상황'을 마주한 채로 영화가 끝나버린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다. 이 영화의 위기상황이 일차적으로 가정폭력이라는 점에서는, 스크린이라는 미디어 매체 속에서 방영되는 여러 폭력의 굴레가 채널을 돌리면 금세 사라져 버리고 또한 시청자들도 그것을 금세 잊어버리게 된다는 '망각'의 슬픔을 떠올릴 수 있다.

요컨대 마지막 장면에서 할머니는 신고는 했어도 여전히 문안에 머무르며 그들 서사 안으로 개입하기를 망설이고, 경찰도 할머니가 이쪽을 염탐하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문을 닫아버린다는 점에서 두 공간 사이의 교류를 차단하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은 마치 미디어 매체에서 벌어지는 여러 폭력에 잠깐이나마 귀를 기울이다가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면 금세 그것을 잊어버리는 우리들의 아둔함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눈앞의 위기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금세 시선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다.
영화 자비에 르그랑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