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작품 중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꼽으라면 <안녕하세요>를 고를 수 있다. 영화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다. 아이들의 침묵과 어른들의 수다가 어우러지는 모습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소재이고 그래서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부부사이의 화해를 다룬 <오차즈케의 맛>이나 <바람속의 암닭>은 부부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이입하기 힘들다. <가을햇살>이나 <만춘>은 삶의 황혼이 머무는 나이에만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다. <동경 이야기>나 <도다가의 형제자매들>은 외동이 대세인 요즘 세상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통용되는 언어이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이다. 

영화를 본다는 게 일종의 대화임을 생각해 보면, 오즈는 이 영화를 통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셈이다. 여전히 일방향에 가까운 소통이지만, 딱딱한 영화 제목보다는 이런 물음이 훨씬 정겹게 다가온다. 적어도 오즈의 초대를 받은 우리는, 이 영화에 물음을 던질 때 일방적인 구애라며 외로움을 타지 않아도 된다. 오즈는 자신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했고, 우리는 그에 답하려 한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이 영화는 무엇입니까?" 이 애정 어린 물음에서, 스크린 속의 세계가 허구라거나 오즈가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쪽 세계에서 사망한 오즈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우리는 그저 그 길을 따를 뿐이다. 

'오하이요(おはよう)'라는 제목의 이 영화를 '안녕하세요'로 칭할 수도 있지만 굳이 따지면 용법이 다르다. 일본어에는 아침과 점심과 저녁 인사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오하이요는 아침에 건네는 인사말이다. 영어로 '좋은 아침'이라는 뜻의 이 인사는 하루를 시작하고 가장 처음 하는 말인데, 그런 면에서는 삶의 끝자락에 자리한 오즈가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즈의 유고작 <꽁치의 맛>이 1962년에 개봉했고, 이 영화는 1959년에 개봉했으니 말년의 오즈에게 "안녕하세요"라는 아침 인사는 오늘도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대화였을 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레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라틴어 문구를 떠올리게 된다. 메멘토 모리는 "언젠가는 죽음이 다가오리라는 점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즉, 아침이 온다면 저녁도 온다. 또한, 우리의 인생에서 황혼은 금세 찾아온다. 그런 면에서 아침에 건네는 "안녕하세요"는 저녁에 건네는 "안녕하세요"가 되기도 한다. 영화가 시간의 축약이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흘러간다. 여러 번의 인사, 그러나 한 번인 것처럼. 어제저녁의 인사는 오늘 아침의 인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고, 어제 들었던 말을 오늘 또 듣고는 한다. 그런 우리의 모습에는 일종의 기시감이 느껴진다. 

이것은 오즈의 영화가 늘 한결같아 보이면서도 한결같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비슷한 언행에 평이한 사건이 즐비한 이들의 삶은 분명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분과 초를 세며 영화를 보게 될 때 그 평범함은 깨진다. 몇 분 몇 초라는 지금, 여기의 특정성이 늘 함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시간을 특정하지 않을 때 그것은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새' 이 순간이 되었다는 무한의 연장선이 있다. 그런데 매 순간을 기억하며 살게 될 때, '어느새'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여태까지의 행보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다지 놀랍지가 않다. "잘 살아왔구나"라는 뿌듯한 한 마디. 오즈의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영화 <안녕하세요>의 한 장면

영화 <안녕하세요>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영화 <안녕하세요>의 한 장면

영화 <안녕하세요>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침묵은 어른들의 세계

<가을햇살>이나 <만춘>을 이 영화와 일대일로 비교하면 정면승부가 되지 못한다.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건 아주 강력한 감정이기에 말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래서 우리는 '안녕하세요'를 외면할 수가 없다. 이 영화에는 오즈 영화에서 자주 보이던 이별이 없다. 자녀갈등을 다루는 <외아들>이나 <동경의 황혼>에서도 이별은 그저 슬프기만 했고, <그날 밤의 아내>와 <나가야의 신사록>은 이별을 애써 외면하는 이들의 이야기인데, <안녕하세요>는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대화의 단절이라는 소소한 테마가 주를 이룬다. 그조차도 하나의 모임에서 이탈하리라는 불안함의 표시가 아니다. "너무 말을 많이 하는" 아이들에게 절제를 부여했기에 오히려 긍정적인 요소이다. 

<안녕하세요>에서 아이들에게 주어진 절제는 침묵해야 한다거나 조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즈의 영화에서 침묵은 어른들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별을 겪기에 아이들은 너무 어리다. 아이들에게는 관계를 끊어도 대화를 이어나갈 성숙함이 없다. 그래서 아이들의 아버지는 어린아이가 슬픔을 겪지 않도록 미리 절제시켜야 한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의 침묵이 위기인 것은 그런 이유이다. 과하게 절제한다는 것은 일시적으로나마 어른이 되는 것이었고, 어른이 되기에는 아직 이르기에 다시금 말을 트게 된다. 

어른들은 어른의 책임감을 안고 말 한 마디에 신중함을 기하게 된다. <안녕하세요>가 보여주는 것은 그런 테마이다. 명랑한 아이들이 주인공인듯하나, 그 배경에는 언행이 가벼운 여인들이 있다. 이마를 살짝 밀면 방귀를 뀌는 등의 엉뚱함이 있는 반면, 시답잖은 말에 트집을 잡아 뒷담화하는 알량함도 있다. 재밌게도 그 둘은 자신의 행동에 별다른 생각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함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지다. 그러나 아이의 무지함은 이해할 수 있어도 어른의 무지함은 이해할 수 없기 마련이다. 즉 아이의 순수함과 어른의 순수함이 대비된다. 

TV를 사달라며 때 쓰는 아이들은 순수하다. TV를 사달라며 침묵하는 모습은 그저 귀엽기만 하다. 그러나 실직했던 이웃이 새로 취업한 가게에서 물건 하나를 팔아주었을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하야시(류 치슈)는 이웃이자 친구인 토미자와(토노 에이지로)에게서 텔레비전 한 대를 구매한다. 이에 토미자와 부인(나가오카 테루코)은 하야시 부인(미야케 쿠니코)을 험담하던 것을 그만두고 옹호해준다. 영화는 그런 토미자와 부인을 의아해하며 험담 대상을 하야시 부인에게서 토미자와 부인에게로 옮기는 두 여인의 모습으로 막을 내린다. 

자본이 오고 간다는 점에서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심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토미자와 부인의 모습은 몹시 순수하다. 사실 이런 순수함은 티브이를 보고 싶어 입을 닫아버린 아이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어른에게는 어른의 무게가 있기에 정당화되지 못할 뿐이다. 이 영화는 그런 식의 대립이 거진 반복되는데, 깊게 생각해 보면 온갖 부조리극을 떠올릴 수가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순수하지 못함에 대한 방증인 듯하여 부끄러워진다. 영화는 영화로만 보는 게 옳은 것은 아닐까. 아니면 무언가 삶의 의미를 얻는 게 옳은 감상법일까. 그런 화두가 <안녕하세요>에서 던져진다. 
영화 오즈 야스지로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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