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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가 열렸던 그날, 친구들과 호프집에서 놀다가 잠깐 밖으로 나왔다. 전화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프집에서 약간 떨어진 역 근처 공중전화에서 돌아왔을 때, 조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호프집으로 가는 좁은 통로가 연기로 자욱했다. 그날, 그 화재로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 대부분이 죽고 말았다. 뭣보다 절망적인 것은 특별한 친구 E도 죽었다는 것이다.

'사고 그 후의 삶'이 쉽지 않다. 하마터면 나도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찔한 상상과, E와 함께 했던 순간들과, 시도 때도 없이 잔득 헝클어져 떠오르곤 하는 그날 그 현장과 상황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불이 났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왜 역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박스로 뛰었을까.

옆 가게로 뛰어가 119에 전화했다면, 그랬다면 친구들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랬다면 E도 죽지 않았을 텐데. 경애는 자기가 빨리 신고하지 못해 E를 비롯한 친구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곤 한다.
 
<경애의 마음> 책표지.
 <경애의 마음> 책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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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창비 펴냄)은 1999년 10월 30일에 실제 있었던, 50여 명의 사망자와 70여 명의 부상자가 난 '인천 호프집화재사고'를 겪은 '경애'와 '상수'의 이야기다. 이들을 통해 타인 혹은 사회적 문제로 큰 사고를 겪은 사람이 '사고, 그 후'를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처럼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장편 소설이다.  

저녁 7시가 채 안 된 시각에 발생한 화재. 그런데도 이처럼 많은 사상자가 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호프집은 비상구가 없는 데다가, 비상시 탈출할 수 있는 창문마저 베니어합판을 덧대 탈출 자체가 힘든 구조였다. 더욱 어이없는 사실은 살인이나 다름없는 호프집 주인의 행위다.

그는 청소년들이 탈출하려고 하자 문을 잠그고 "돈을 내고 나가라"며 막아섰다가 불길이 거세지자 자신만 알고 있던 통로로 혼자 탈출해 버렸다고 한다. 당구장과 노래방 등,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4층 상가였다. 이중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2층에 위치한 호프집은 미성년자 출입으로 신고를 여러 차례 받아 영업정지처분을 받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사고 당일 50여 평에 120여 명이 들어 차 있었을 정도로 성황의 영업을 계속했다고 한다. 호프집 주인이 평소 경찰과 깊은 유착 관계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재 발생으로 이와 같은 사실들이 비로소 알려지면서 우리 사회를 분노케 했다.

그런데 '56명 사망자 대부분이 호프집에 있던 중·고등학생'이란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말이 오갔다. 심지어 "그런 학생들은 죽어도…"와 같은 막말을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경애는 비행, 불량, 노는 애들이라는 말들을 곱씹어보다가 맥주를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56명의 아이들이 왜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생각했다. 그런 이유가 어떤 존재의 죽음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로 대단한가. 그런 이유가 어떻게 죽음을 덮고 그것이 지니는 슬픔을 하찮게 만들 수 있는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경애는 물론이고 많은 애들이 교복을 입고 있었다. 너네 교복 입고 창피하지도 않냐, 하고 경찰이 말했다. 경애는 자신이 무엇을 부끄러워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렇게 말하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다.  경애가 잠을 자다가 발딱 일어나 소리를 지르거나 신음하면서 악몽에 시달리고 있으면 엄마는 경애를 붙들어 안으면서 기도하자, 기도해, 경애야, 자 기도해, 라고 했지만 경애는 기도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죽게 하는 창조주라면, 그런 비극을 기꺼이 만들어내는 창조주라면 그에게 기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엄마는 기도를 했고….
(…)때론 그 모든 것을 느끼는 마음 따위는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애가 있었다. 거기에 경애가 있었고 그리고 2002년 어떻게 길을 통과해야 그 호프집이 있던 골목을 보지 않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경애가 있었다. 하지만 경애는 결국 어느 길로 가든 그 골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71~73쪽

화재로부터 한참이 지났다. 이십대 후반의 경애는 남들 보기에 아무렇지 않지만 누군가와 어떤 관계로 발전할 것 같으면 스스로 도망쳐버린 후 아파하며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등 매사 결코 순조롭지 못한 삶을 살아간다. 얼마 전에도 경애는 큰이별을 했고 씻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온 여름을 집안에 처박혀 지냈다.

이런 경애에게 유일한 위로는 연애상담 페이스북 '언니는 죄가 없다'에 상담하는 것. 그리고 운영자인 '(다정한) 언니'에게 메시지로나마 위로를 받는 일이다. 소설은 이런 경애가 직장 상사인 상수의 차를 우연히 타는 것으로 시작한다.

상수는 사실 경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그 인천 호프집 화재 현장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자였다. 존재감 없던 자신을 친구로 삼아준 유일한 친구 '은총'은 화재로 죽었지만. 그런 상수가 정성을 쏟는 일은 경애가 힘들 때마다 유일하게 위로를 받곤 하는 '언니는 죄가 없다'를 운영하며 상담을 해오는 여성들을 다정한 말로 위로해주는 것이었다.

경애에게 특별한 친구였던 E가 상수의 친구 은총이었던 것. 그러니까 같은 날 화재 현장에 있었고, 같은 친구를 잃어버렸으며, 비슷한 사고 후유증을 겪고 있었음에도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둘이 만나게 된 것이다.

회사로서는 실적도 변변찮은 데다가 물 위에 뜬 몇 방울의 기름처럼 흡수되지 못하고 겉도는 듯한 존재인 상수와 경애가 개운치 못한 존재들이다. 상수는 낙하산이고, 경애는 파업 당시 누구보다 앞에 나섰던 전력 때문에 쉽게 자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회사는 이런 둘을 한 팀으로 묶어 변방(베트남)으로 보내는 것으로 처리해 버리려 하는데…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 27쪽.  
마음을 어떻게 폐기하느냐고 물었지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태워주겠다는 그 사람 차에 타지 않고 택시로 강변북로를 달려 돌아오는데 자신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잖아요. (…)폐기 안 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지 않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야채를, 아니 그냥 잘 지내세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 176쪽에서.

누구나 수많은 세상들과,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살아간다. 관계는 즉 세상, 관계 맺기에 불안정하고 서툰 그만큼 세상살이에 불리할 수밖에 없겠다. 사춘기라는 그 자체만으로 여러모로 힘든 청소년기에 화재로 각각 가장 소중하고 특별한 친구를 잃은 경애와 상수. 이들은 뭣보다 누군가를 다시 알아간다는 것, 마음을 나눈다는 것, 그렇게 어떤 관계가 된다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이런 두 사람은 누군가와의 관계만큼 힘든 회사라는 숙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미처 치유 받지 못한 상태로 마음 속 깊이 웅크리고 있다가 걸핏하면 삶을 흔들곤 하는 오랜 상처를 어떻게 위로 받을까? 상수는 왜 하필 여자 행세를 하며 '언니는 죄가 없다'를 운영하는 걸까? 소설을 읽는 내내 측은하고 안타깝다. 그런데 씁쓸하게도 어른들의 잘못으로 어린 삶들이 꺾이는 사고들이 잊을 만하면 발생하곤 한다.

이런 현실 때문에 가볍게만 읽지 못한 소설이다. 화재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분노했으나 까맣게 잊고 있던 인천 호프집 화재사고.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아 공중파 뉴스로만 접해야만 했던, 그래서 그들의 보도로만 받아들였던 사고. 때문인지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사망자 숫자마저 저마다 다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어쩌면 잘못 알려졌거나 잊히고 있는 사고. 이런 사고에 대해 보다 깊이 알아보게 하고, 계기로 당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돌아보게 한 소설로도 기억할 <경애의 마음>이다.

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창비(2018)


태그:#경애의 마음, #인천호프집화재사고, #김금희(작가), #장편소설, #세월호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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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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