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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사진. 전통의상을 입고 춤추는 볼리비아 수크레의 댄서
▲ 메인사진. 전통의상을 입고 춤추는 볼리비아 수크레의 댄서 메인사진. 전통의상을 입고 춤추는 볼리비아 수크레의 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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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 문명의 시원, 티티카카

해발 3810미터, 지구에서 가장 높은 호수 티티카카 위에는 철망 없는 국경이 그어져 있다. 호수 서쪽은 페루, 동쪽은 볼리비아. 두 나라는 16세기 스페인 침략 이전에는 모두 잉카 제국에 속한 지역이었다. 식민지 시대 볼리비아 지역은 '알토 페루 Alto Peru 높은 페루'로 불렸다. 1879년부터 1884년까지 광물 초석(질산나트륨)이 풍부한 남미 서부 연안을 둘러싸고 페루, 볼리비아 동맹군과 미국과 유럽의 지원을 받은 칠레 사이에서 남미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아타카마 사막 지역은 칠레 땅이 되었다. 해안 지역을 잃은 볼리비아에게 티티카카는 바다 같은 존재로, 약 오천 명의 볼리비아 해군이 호수를 관리한다.

지구에서 가장 긴 산맥 안데스. 길이 7000킬로미터, 평균 고도 4000미터, 북쪽으로 베네수엘라에서 남쪽으로 아르헨티나까지 남미 7개국에 걸쳐 있는 거대한 산맥 가운데 자리한 호수 티티카카는 남미 문명의 시원으로 여겨진다. 잉카 시대 이전에는 '파카리나 pakarina', '모든 것이 태어난 장소'라고 불리기도 했다. 잉카를 창건한 망코 카팍과 마마 오크요의 시신이 호수의 한 섬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미라로 추정된다. 지구 반대편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의 올혼 섬에는 징기스칸의 무덤으로 불리는 바위가 있다. 오래도록 인류는 거대한 호수에서, 그 호수들을 신령스럽게 여기며 살아왔나보다. 사방이 널리 보이는 섬의 산봉우리들마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쌓은 돌무더기는, 남한의 북한산이나 히말라야나 바이칼이나 티티카카나, 모두가 비슷한 모습으로, 조용히 서 있다.

바다처럼 넓은 티티카카 호수는 핍박 받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도 하다. 옛날 잉카 제국의 지배를 피해 '토토라'라는 갈대로, 이동 가능한 인공섬을 만들어 수상 생활을 시작한 아이마라 우루족은
지금껏 갈대섬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물 속의 토토라가 계속 썩어 없어지기 때문에 보름 주기로 새로운 토토라를 쌓는다. 관광객들의 섬 입장료와 갈대배 운임, 수공예품 판매와 송어(트루차) 양식이 주된 수입원이다. 이십만 명이 사는 페루의 티티카카 중심 도시 푸노에서 흘러나오는 폐수는 매일 오후 두시가 되면 악취를 풍긴다고 한다. 환경오염은 우로스 사람들과 티티카카의 오래된 삶을 위협하고 있다.
 
우로스 갈대섬에서 관광객을 맞이하는 원주민들
▲ 우로스 갈대섬에서 관광객을 맞이하는 원주민들 우로스 갈대섬에서 관광객을 맞이하는 원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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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스섬에서 배로 두 시간을 더 가면 타킬레섬이 나온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20세기까지 교도소로 사용되었던 섬으로, 지금은 이천 명의 케추아족이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고 베를 짜며, 잉카시대처럼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간다. 바이칼 올혼섬을 여행할 때 교도소와 수감자들이 일하던 생선 통조림 공장의 흔적을 본 적이 있다. 오래 전, 중심지로부터 머나먼 오지여서 감옥과 유배지로 사용되었던 세계 곳곳의 섬들이 이제는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로 붐빈다. 전통의상을 즐겨 입는 섬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관광객 대상의 식당을 운영하고 기념품을 만들어 팔지만, 매일 몇 차례씩 배를 타고 들어와 섬의 고요함을 깨고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타킬레섬 식당에서 일하는 청년 월터 마차카 Walter Machaca 씨
▲ 타킬레섬 식당에서 일하는 청년 월터 마차카 Walter Machaca 씨 타킬레섬 식당에서 일하는 청년 월터 마차카 Walter Machaca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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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야영

한반도로부터 비행기로, 또 버스로, 몇 시간 거리인지, 평생 다시 올 일이 있을까. 티티카카를 이쪽 저쪽 바라보려고, 페루의 푸노에서 웅구요 국경을 너머 볼리비아의 티티카카 마을 코파카바나에도 며칠을 머물렀다. 푸노는 큰 도시로 관광업은 아주 일부였는데 코파카바나는 작은 마을 전체가 티티카카 관광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며칠 동안 볼리비아의 화폐, 음식, 물가, 인심에 적응하고, 코파카바나에서 유람선으로 두 시간 거리의 '달의 섬'과 '태양의 섬'에 닿았다. 잉카 창건자 망코 카팍이 태어났다고 알려진 곳. 조용한 페루 타킬레섬과 달리 관광객용 숙소와 레스토랑이 섬 곳곳에 넘쳐났다.

섬 중심지를 벗어나 제단이 있는 섬 봉우리로 가서 오랜만에 텐트를 쳤다. 사람들의 분주함에서 멀어져 혼자 조용히 티티카카의 대자연 속에서 서쪽 동쪽, 노을과 일출을 보고 싶었다. 콜롬비아 버스 강도가 텐트도 가져가버려서 새로 구입한 이십 달러짜리 비닐 텐트를 처음 펴보았다. 노랗게 호수를 물들이며 노을이 지고, 멀리 주변 산맥에는 번쩍번쩍 번개가 치는데, 거대한 호수 가운데는 하나둘씩 별들이 빛났다.

몇 번을 반복해도 낯선 자연 속에서 혼자 하는 야영은 조금 무섭다. 저렴한 텐트는 여름용인지 술술술 바람이 새어 추웠지만, 밤새 번개가 치는 안데스 산맥 가운데에서 비가 오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했다. 추위와 무서움에 좀 떨긴 했지만 고요하고 거대한 티티카카의 밤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잉카 창시자 망코 카팍의 고향으로 알려진 태양의 섬 봉우리에서의 야영
▲ 잉카 창시자 망코 카팍의 고향으로 알려진 태양의 섬 봉우리에서의 야영 잉카 창시자 망코 카팍의 고향으로 알려진 태양의 섬 봉우리에서의 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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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라는 이름의 도시, 라파즈 La Paz

여행에서 만난 많은 여행자들은 대도시를 피해 가거나 오래 머물지 않았다. 물론, 부에노스아이레스나 리우데자네이루 같은, 유서 깊고 아름답다고 알려진 대도시라면 다르겠지만, 라파즈는 명성보다는 악명 높은 도시에 가까웠다. 돌아보면 내가 지나온 남미의 다른 수도들, 코스타리카의 산호세, 콜롬비아의 보고타, 에콰도르의 키토, 페루의 리마도 비슷한 인식이 있었다.

물론 한 나라의 수도이니만큼 볼거리가 많겠지만 사람과 매연이 가득하고 복잡하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지나온 모든 도시들이 소문만큼 위험하지는 않았고, 오랜만에 만나는 분주한 도시의 활력이 흥미롭고 반갑기도 했다.

티티카카 코파카바나에서 버스로 네 시간, 라 파즈에 도착하니 비가 쏟아졌다. 금세 신발이 다 젖을 정도라 처음으로 택시를 탈까 잠시 고민하다가 지붕이 있는 시장으로 뛰어들어갔다. 배가 고파 두리번거리고 있는 나에게 들려온 한 아주머니의 목소리.

"어이, 여기로 와서 이거 먹어! 이 집이 맛있어! 뜨거운 음료도 마시고!"

시장에 들어온 낯선 아시아인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는 사람이 많았는데, 아주머니의 반가운 환대가 참 고마웠다. 망설일 것 없이 좁은 탁자 한 켠에 앉아 점심 메뉴를 골랐다. 페루처럼 볼리비아도 현지인 식당의 점심 '메뉴 Menu(기본 정식을 메뉴라고 부른다)'는 그날의 스프와 정식, 음료까지 나오고 가격도 10볼리비아노스(한화 1600원) 정도로 저렴했다. 음식은 맛있었고 곧 비도 그쳤고, 물어물어 숙소 방향으로 가는 저렴한 콜렉티보 승합차도 발견했다. 라파즈, 평화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에 도착했다.

1548년 스페인의 알론소 데 멘도사 선장이 침략해 도시로 개발을 시작한 라파스는 안데스 산맥에 둘러싸인 3600미터 고원에 자리해 있다. 1898년 사법수도 수크레에서 행정부가 이전해왔고 현재 20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 도시는 가파른 언덕과 구불구불한 골목이 많아 매우 복잡했다. 낮고 평탄한 지역에는 부자 동네가, 가파른 언덕에는 빈민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도시의 공중에는 특이하게도 케이블카가 지하철처럼 대중교통으로 운행되고 있는데, 2014년 개통되어 현재 여섯 개 노선이 운영 중이고 이제 라파즈의 명물이 되었다. 건설 당시, 빈민가와 부자 동네의 경계가 줄어드는 게 싫어서 도시 부유층이 반대했고, 이에 대해 볼리비아 최초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 사회주의운동당 에보 모랄레스는 인종차별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한번 타는 요금이 3볼리비아노스(500원)로 비싸지 않고 환승도 가능해서 공중을 누비며 도시의 동서남북을 두루 구경했다.

공항이 있는 위성도시 4905미터 엘알토 El alto 역에는 전망대가 있는데 유리창 때문에 경치가 잘 보이지 않아 인근 고속도로변 언덕을 찾아갔다. 멀리 눈덮인 산맥이 보이고 하나둘 불빛이 켜지며 도시에 밤이 찾아왔다. 도로는 서둘러 귀가하는 차와 사람들로 분주했다.

라파즈 도심의 또다른 명물 '마녀시장'은 라마 미라 등의 특이한 전통 제례용품을 파는 대신 평범한 기념품 거리로 바뀌어 있었는데, 원래의 마녀시장 상인들이 변두리 엘알토 거리로 밀려와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며 밀려난 서울 아현동 포차거리가 떠올랐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도시화는 남한이나 볼리비아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 씁쓸했다.

한 평 남짓 크기로 다닥다닥 붙은 가게에서 사람들은 장사도 하고 잠도 잤다. 커다란 돌두꺼비 앞에 모닥불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집 없는 노숙인들과 알콜중독자들이 배회하는 도시의 밤이 무서워서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설산에 둘러싸인 복잡한 도시 라파즈. 그 도시 위로 색색의 케이블카가 시민들의 출퇴근 이동을 담당하고 있다. 건설 당시, 빈민들이 부자 동네로 오는 게 싫어서 부유층이 반대했다고 한다. 사진 왼쪽 아래에 케이블카가 보인다
▲ 설산에 둘러싸인 복잡한 도시 라파즈.  설산에 둘러싸인 복잡한 도시 라파즈. 그 도시 위로 색색의 케이블카가 시민들의 출퇴근 이동을 담당하고 있다. 건설 당시, 빈민들이 부자 동네로 오는 게 싫어서 부유층이 반대했다고 한다. 사진 왼쪽 아래에 케이블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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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과 안전 사이, 포포호수를 지나 수크레로

지구에서 티베트 고원 다음으로 높고 넓은 거대한 고원 '알티플라노 Alti plano' 는 스페인어로 '높은 평원'을 뜻한다. 알티플라노의 북쪽에는 티티카카 호수가, 남쪽에는 우유니 소금사막이 있고 중간에는 오루로 주에 속한 포포 poopo 호수가 있다. 포포 호수는 심각한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2015년에 말라버렸고 호수 주변 인구도 절반 이상이 떠난 황량한 땅이 되었다고 한다.

라파즈에서 포포호수로 가서 그 황량함을 마주하며 걸어볼까 고민하다가, 숙소도 비싸고 교통도 불편해서 포기하고 곧바로 열세 시간 거리의 도시 수크레로 이동했다.

가끔은 여행자들이 많이 가지 않고 정보도 별로 없는, 오지나 좀더 특별한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모험에는 대부분 위험도 따르는 법이라 아쉬움을 안고 안전한 길을 선택할 때가 더 많다. 모험과 안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내 여행길의 중요한 고민거리이자 화두가 되었다. 8년 동안 자전거 세계 여행 중인 차원민 씨의 말이 떠올랐다.

자전거 여행자들은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는, 한비야 씨의 책 제목처럼 그야말로 '지도 밖의' 마을과 길을 마주하고 숙소도 없는 곳에서 잠들어야 할 때가 많을 것이다. 여행 중에 종종 지치고 힘들 때면 그들을 떠올린다. 아메리카 여행이 끝나면 서아프리카부터 동아프리카로 여행을 할 거라는 내 계획을 듣고, 이미 아프리카 여행을 마친 원민 씨 얘기했다.

"서아프리카는 여행할 수 있는 나라가 별로 없어. 입국 자체가 불가능한 나라도 많고, 버스도 길도 없는 지역이 많아서 힘들 거야. 그래서 여행자들 대부분 동아프리카를 여행하지. 그래도 생각해보면, 정보도 인프라도 아직 없는 곳을 여행하는 게 어쩌면 진짜 여행이 아닐까. 내 이야기를 듣고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친구도 있는데, 너도 자전거 여행을 해보는 게 어때?"

끝없이 이어진 오르막 산길과 비포장도로를 달릴 튼튼한 자전거와 자전거용 가방들을 구할 곳을 당장 찾기 어려워서, 무엇보다 하루에 약 80킬로미터에서 120킬로미터까지 달려야하는 체력에 자신이 없어서, 이번 여행에서도 자전거 여행자는 되지 못할 것 같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라비아로 계획한 이번 세계 여행 준비를 길게 하지는 않았다. 미국 횡단을 그린 소설 한 권,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책 한 권, 여행학교 학생들의 남미 여행기 한 권을 읽었고, 도서관에 있는 가이드북들과 인터넷 여행 블로그들을 대충 훑으며 중요 정보를 휴대폰 사진으로 저장해둔 게 전부였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에 대한 정보와 계획은 아직 전혀 없다. 큰 경로만 정해져 있고, 머물고 이동하는 것은 그때 그때 마음이 가는 대로 달라진다. 볼리비아까지 왔으니 당연히 소금사막 우유니는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수크레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하지만 길에서 만난 몇몇 여행자들이 추천한 곳이라 우유니 가는 길에서 방향을 틀어 이틀을 머물렀다.

1538년 스페인 침략자들이 건설했고 1839년 독립과 더불어 수도가 된 수크레는 현재까지 볼리비아의 사법 수도이고 30만 명이 살고 있다. 중심지에 흰색 건물이 많아 '하얀 도시'라고도 불리고, 1991년 인근의 은광 도시 포토시와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분주한 대도시 라파즈보다 확연히 한적하고 상쾌했지만 특별한 볼거리는 적어서 조금 심심하기도 했다. 수크레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한국 친구가 추천해준 중앙시장의 과일샐러드를 맛보고, 공원을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전통 춤 공연을 한참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메리카를 6개월 동안 여행하며 워낙 '스페인 식민지풍 콜로니얼 colonial' 도시와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 도시에 자주 머물러서, 그 수많은 아르마스 광장과 중앙 대성당과 아기자기한 공원들이 더이상 놀랍거나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동안 거쳐온 열세 개 아메리카 나라들이 미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스페인 식민지였으니 비슷비슷할만도 하다. 마침내 지구를 한 바퀴 다 돌고 나면, 낯선 곳에 대한 새로움도 놀라움도 점점 줄어들까. 에콰도르 쿠엥카에서 만난 독일 아주머니의 낭만적인 한 마디가 생각난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보기에는 단 한 번의 인생은 너무 짧아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 넓고 놀랍고 아름다워요. 그렇지 않나요?"

식민지 300년이 지나간 대륙

20세기 35년 동안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를 겪은 한국 사람들은 식민지의 흔적을 절대 자랑스러워하거나 보존하려고 하지 않는다. 빼앗기고 고통받은 멀지 않은 역사이기에, 그 아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쿠바에서 볼리비아까지, 300년 동안 스페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를 겪은 라틴 아메리카 열두 개 나라를 여행하면서, 이상하게도 스페인에 대한 아픔이나 피해를 받았다는 감정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식민지 시절의 흔적을 자랑스러워하고 보존하고 홍보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이미 식민지 이전의 독립적인 사회로 되돌아갈 수 없을만큼 많은 원주민들이 죽었고, 1492년 콜럼버스 침략 이후 5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인종과 문화가 다양하게 뒤섞였으며, 또한 1800년대 독립 이후에도 여전히 끄리오요(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인, 식민지 경제 주체), 까우디요(군벌과 토지를 기반으로한 권력층) 등의 식민지 권력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일 것이다. 제국주의, 식민주의는 세계 어디에서나 비슷하게, 끔찍한 폭력과 고통의 역사였지만, 그 영향은 지역과 나라마다 다르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스페인이 물러간 독립 라틴 아메리카에, 이번에는 새로운 강대국 미국이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구 반대편 남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식민주의 역사가 만들어낸 '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에 반대한다. 하지만 이 대륙을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는 알지 못한다. '아메리카'라는 지명은 1503년 <신세계>라는 책에서 이 대륙을 공동생산 공동소유의 무정부주의 유토피아로 설명한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왜 이 거대한 대륙의 이름이 한 유럽인의 이름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가. '라틴 아메리카'의 '라틴'은 라틴계 유럽인들의 이름이고, '앵글로 아메리카'의 '앵글로' 역시 앵글로계 유럽인들의 이름이다. 15세기 말 유럽인들이 침략하기 전까지 이 땅의 토박이로 살던 원주민들의 존재와 역사는 그 지명 어디에도 담겨있지 않다. 땅의 이름에는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언어는 권력이다.

약한 나라,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식민주의에 반대하면서도,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 그 식민주의의 엄청난 침략과 개척의 힘에는 혀를 내두를 때가 많았다. 6개월 동안 둘러본 라틴 아메리카는 사람이 살기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아주 덥고 비가 많이 오고 벌레가 많거나, 고산지대라 호흡이 어렵거나, 혹은 사막이거나 밀림이거나 얼음에 덮힌 땅이 많았다. 이런 열악한 지역을, 21세기에 버스와 배와 비행기를 타고 여행 다니기에도 아주 멀고 지치는 거대한 땅을, 16세기에 말을 타고 다니며 침략하고 개척했다니. 황금을 향한 식민주의자들의 욕망,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향해 떠났을 유럽 이민자들의 열망이 놀라웠다.

작물이 자라 수익이 날만한 거의 모든 곳에 대농장을 지어 밀과 목화와 사탕수수, 커피와 바나나를 심고, 풀이 나는 모든 들에 울타리를 세워 가축을 치고, 금과 은, 돈이 되는 광물이 나는 모든 산에 광산을 짓고, 유럽으로 물류를 이동할 길목마다 도시를 세우고, 도시의 중심에는 교회를 세우고, 그렇게 유럽인들은 지금의 아메리카를 만들었다.

하지만 식민주의자들과 모험가들이 말을 타고 다닐 때 그들의 짐을 든 채 걸어야 했고, 농장과 광산에서 일하다 수없이 죽어야 했으며, 도시를 이루는 도로와 건물들을 지어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오래 전부터 이 땅에 살던 원주민들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었다. 그렇게,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 흑인들은 지금의 아메리카를 만들었다.
 
포토시. 1545년 은 광산이 발견된 뒤 건설된 도시이며 신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광산도시로 알려져 있다. 지명은 '시끄러운 곳'이라는 뜻의 인디언 어에서 유래한다. 전성기에는 15만 명의 주민이 살았으나 은 고갈로 쇠퇴하였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주석과 텅스텐이 채굴되면서 공업도시로 발전했다
▲ 포토시.  포토시. 1545년 은 광산이 발견된 뒤 건설된 도시이며 신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광산도시로 알려져 있다. 지명은 "시끄러운 곳"이라는 뜻의 인디언 어에서 유래한다. 전성기에는 15만 명의 주민이 살았으나 은 고갈로 쇠퇴하였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주석과 텅스텐이 채굴되면서 공업도시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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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통의 스페인 식민지를 겪었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인종 분포는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르다. 안데스 산맥이 주 영토인 에콰도르와 페루, 볼리비아에는 케추아족과 아이마라족이, 멕시코와 과테말라에는 아즈텍족과 마야족이 많이 남아 있고, 칠레와 아르헨티나에는 유럽 이민자가 많으며, 브라질과 쿠바 등 카리브 지역에는 아프리카 흑인 후손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 물라토 등 수많은 혼혈이 존재한다. 오랜 시간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다양함이 공존하는 라틴 아메리카지만, 대부분의 나라가 스페인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하고 가톨릭이 주된 종교이다. 식민지 시대는 끝났지만 그 문화는 거대한 흐름으로 지속되고 있다.

"우리들은 인디오도 아니고 유럽인도 아니다. 우리들은 원주민과 스페인 사람들 사이의 중간 인종이다."

스페인으로부터 1819년 콜롬비아를, 1821년 베네수엘라를 차례로 해방시킨 시몬 볼리바르의 말이다. 그는 인종적인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공화국을 꿈꿨으나,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은 독립 이후 민주적인 사회가 아닌 독재 정치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멕시코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아메리카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1992)에서, '신세계의 문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창조'했던 스페인은 '인디오와 흑인과 유럽인의 자손'들이 사는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최소한 절반'을 형성했다고 말하며 '스페인계 아메리카' 공통의 역사를 돌아보고, 나아갈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인디오이고, 흑인이고, 유럽인이고, 무엇보다도 혼혈인 메스티소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베리아인이고, 그리스인이고, 로마인이며, 아랍인이고 집시이다. 다시 말해서 스페인계 신세계는 모든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중심이고, 배제가 아닌 통합의 중심지이다. 스페인계 아메리카인이 타자를 배제한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배신하는 것이고, 더욱 빈곤해질 것이다. 만약 그들이 통합을 한다면그들은 풍성해지고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중략)

우리들은 타자를 포용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확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문화는 고립되면 소멸하지만, 타인들과의 만남, 다른 문화, 타인종과의 접촉 속에서 탄생하거나 다시 태어난다. 우리가 타인 속에서 인간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들 자신의 인간성도 결코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문화를 지속시키는 시민사회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하층부에서 상층부로, 정치, 경제적인 행위를 강화시키게 될 때 스페인계 세계의 오래된 수직적 중앙집권적 체제는 수평적 민주체제로 대체될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수반한 경제발전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부터라도 그것을 실천할 기회를 가지는 것, 그것이 우리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사라지지 않고 자리해 있을 오랜 식민지의 상처가 치유되어가기를, 독재 정권 시기의 아픔도 세계체제 속에서의 불공정한 착취도 부디 사라져가기를, 혼혈과 다양성의 역사를 공유한 전체 라틴 아메리카가 꿈꾸는 평등과 민주주의의 사회가, 라틴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지구별 전체를 포용할 수 있기를, 볼리비아의 '스페인 식민지풍 도시'라 불리는 곳, 수크레에서 상상해 본다.

'인스타의 성지', 소금사막 우유니

수크레에서 버스로 반나절, 야마와 과나코들이 사는 황량하고 고요한 안데스 고원을 휘휘돌아 소금사막이 있는 소도시 우유니에 닿았다. 아, 우유니.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소금의 땅. 책에서 텔레비전에서, 특히나 소셜네트워크의 사진으로 자주 봐서, 마치 직접 가본 적이 있는 듯 익숙했던 풍경의 그곳. 한 친구는 우유니를 '인스타그램의 성지'라고 표현했다. '해시태그 우유니 #uyuni' 로 검색하니 38만 개의 사진이 검색된다. '요세미티'는 240만 개, '도쿄타워'는 78만 개가 검색된다. 우유니가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손꼽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지형의 독보적인 특별함에 있을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사막과 푸른 하늘, 그리고 물에 반사된 밤하늘의 은하수.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숨막히는 풍경. 마치 어느 다른 행성 같은, 지구 같지 않은 지구, 완전히 낯선 아름다움이 있는 곳.

마침내 버스가 들어선 우유니 읍내는 상상과 달리 먼지가 풀풀 날리고 가게들 절반은 문을 닫은 황량한 모습이었다. 허름한 숙소 다인실방에는 수도가 고장나 있었고, 저렴하고 맛있는 식당은 찾기 어려웠다. 광장에는 철도노동자의 동상이 있고 '기차들의 공동묘지'로 불리는 곳에는 오래 전 폐차된 기차들이 잠들어 있었다. 전쟁으로 칠레에게 아타카마 해안 지역을 빼앗기기 전에 우유니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기차가 다니는 교통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광산업도 철도업도 저물고, 지금은 세계에서 모여드는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업이 이 사막마을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소금사막으로 가는 대중교통은 없고 사막을 걸어다니는 건 몹시 위험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여행사 투어를 통해 소금사막에 들어간다. 투어는 여러 사람과 일정에 맞추어야하니 부자유스럽고 혼자 다니는 것보다 비싸기도해서 나는 투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곳들이 있다. 하루 코스는 일출, 일몰, 야경 투어 등이 있고, 우유니를 거쳐 알티플라노의 화산과 호수들을 여행하는 2박 3일, 3박 4일 코스도 있다. 우유니에 쏟아지는 별이 보고 싶어서 달이 차기 전에 서둘러 야경 투어를 예약했다. 새벽 세 시에 모여 장화를 신고 지프차를 타고 사막으로 향했다. 달이 밝지 않아도 구름이 끼는 날이 많아 여러번 야경 투어를 하는 여행자가 많았는데, 나는 운좋게 한번만에 은하수를 보았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추위에 떨고 있자니 금방 날이 밝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별을 본, 신비로운 밤이었다. 아마 다른 여행자들에게도 우유니의 별밤은 그러하리라.
 
우유니 소금 사막의 은하수 아래에서
▲ 우유니 소금 사막의 은하수 아래에서 우유니 소금 사막의 은하수 아래에서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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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니 별밤도 봤고 기차들의 무덤에도 다녀왔고 마을도 다 둘러봤으니, 이제 한낮의 소금사막과 알티플라노 고원으로 갈 때가 왔다. 종종 인터넷 전화로 한반도 바닷가 고향에 전화를 하면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그 먼 곳, 또 언제 가보긋나. 이왕 거기까지 갔으니 할 수 있는 거는 다 해봐라. 다 해보고 온나..."

뭐하러 여행을 그렇게 길게 하느냐, 언제 돌아오느냐, 하고 말할 법도 한데,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오라니, 참 힘이 된다. 하지만 여행 경비가 많지 않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언제나 뭘 선택하고 포기할지를 고민한다. 어떤 여행자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21세기 자본주의 지구에서의 여행에는 모든 것에 돈이 든다. 돈이 많으면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많고 좀더 편안하겠지만, 반면에 가난한 여행이라서 할 수 있는 것, 만날 수 있는 것들도 있다고 믿는다.

우유니 여행사 여덟 군데를 돌고 돌아, 가장 변두리에 위치한, 개중에 가장 저렴한 투어를 예약했다. 2박 3일 알티플라노를 여행하고 국경을 넘어 칠레까지 가는 비용은 숙식 포함 680볼리비아노스(11만 원). 평소 여행 경비에 비해 무척 큰 돈이었지만, 초록호수, 노랑호수, 붉은호수와 화산, 기이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는 알티플라노에 평생 다시 오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지프차에는 가이드 겸 운전사 한 명과 여섯 명의 여행자가 탑승할 수 있었다. 함께한 다섯 명은 모두 이스라엘 청년들. 3일 동안 전혀 못 알아듣는 이스라엘어 폭풍 수다 속에서 조금 심심하고 힘들었지만, 호수와 화산을 볼 때는 아무런 말이 필요 없었다.

거대한 호수 중앙의 소금물이 솟는 샘과 수백 년 동안 자란 거대한 선인장들이 있는 잉카와시섬, 물 속의 생물과 침전물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내는 호수들, 호수의 조류(藻類)를 먹고살며 고원의 추위에 적응한 플라밍고 홍학, 뜨거운 암석층의 증기로 인해 지하수가 솟아오르는 간헐천, 세찬 바람에 깎여 특이한 모양이 된 바위, 사막 위에 불쑥 솟은 화산들을 보았다. 춥고 황량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땅. 고요하고 신비로운 고원 알티플라노 수백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남미의 남쪽 나라, 칠레 국경에 도착했다.
 
원근감을 이용해 재밌는 사진을 찍는데 열중하고 있는 이스라엘 여행자 친구들
▲ 원근감을 이용해 재밌는 사진을 찍는데 열중하고 있는 이스라엘 여행자 친구들 원근감을 이용해 재밌는 사진을 찍는데 열중하고 있는 이스라엘 여행자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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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호수 Laguna Colorada 라구나 콜로라다. 1990년 람사르 습지 국제협약에 의해 자연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 붉은 호수 Laguna Colorada 라구나 콜로라다.  붉은 호수 Laguna Colorada 라구나 콜로라다. 1990년 람사르 습지 국제협약에 의해 자연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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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착한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 드디어 도착한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드디어 도착한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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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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