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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통신사가 묵었던 숙소를 찾아
 
도쿄의 히가시혼간지
 도쿄의 히가시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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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 통신사 부사로 온 임수간(任守幹)은 『동사일기(東槎日記)』를 썼다. 그에 따르면 사신 일행은 10월 18일 에도에 도착해 히가시혼간지에 머문다. 당시 절의 규모가 수천 칸이나 된다고 적고 있다. 1719년 통신사 제술관으로 따라간 신유한(申維翰)은 『해유록(海游錄)』을 썼다. 그곳에 보면 사신 일행은 9월 27일 에도에 입성한다.

"무릇 판교(板橋)를 지난 것이 셋이요, 이문(里門)을 지난 것이 백여 개인데, 한 큰 문에는 '금룡산(金龍山)'이란 방(牓)이 걸려 있었다. 또 수백 보를 가서 사관(使館)에 당도하였다. 이집은 실상사(實相寺)인데 일명(一名)은 본서(本誓)요, 옛날에는 동본원사(東本願寺)라 하였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사신이 여기에 관(館)을 정하였는데, 이해 봄에 화재가 나서 잿더미가 되었고 새로 수천 칸을 지은 것이다."
 
금룡산 관음사
 금룡산 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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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사신 일행이 아사쿠사의 센소지를 지나갔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센소지의 산호(山號)가 금룡산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용은 조엄(趙曮)이 쓴 『해사일기(海槎日記)』에도 나온다. 사신 일행은 1764년 2월 16일 에도에 입성해 금룡산 관음사를 지나간다. 그리고 이 절이 에도의 사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관음사가 센소지다. 통신사 일행은 센소지를 지나 관소(館所)인 실상사에 머문다. 실상사가 바로 히가시혼간지다.

"세 판교(板橋)를 건너서 한 대문(大門)을 지나는데 금물 글씨로 금룡산(金龍山)이라는 패(牌)를 내걸고 앞에다 마치 문지기처럼 소상(塑像)을 세워 놓은 것이 있었다. 이는 바로 관음사(觀音寺)인데 강호의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 오후에 관소에 닿았는데, 관소는 곧 실상사(實相寺)로서 전후 통신사들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다."

히가시혼간지는 어떤 곳인가?
 
동도 천초 본원사
 동도 천초 본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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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히가시혼간지는 교토에 있는 히가시혼간지의 별원 겸 어방으로 1651년 에도의 간다(神田)지역에 개창되었다. 1657년 절이 화재로 불타 아사쿠사로 이전해 아사쿠사 혼간지(浅草本願寺)라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절은 확장을 거듭해 15,000평에 35개의 당우가 있는 대가람으로 성장했다. 1700년대 전성기를 누린 히가시혼간지는 조선통신사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히가시혼간지의 모습을 가츠시가 호쿠사이(葛飾北斎)가 부악(富嶽) 36경의 하나로 그려냈다. 제목은 '동도(東都) 천초 본원사'다.

이곳 히가시혼간지의 모습을 가장 잘 기록한 사람은 신유한과 조엄이다. 신유한은 『해유록』에서 숙소의 방과 부엌 그리고 측간이 넓어 한 구내에서 수백 명이 기거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절 앞에는 정원이 있고 연못이 있으며, 섬과 다리까지 만들어놨음을 밝히고 있다. 조엄은 『해사일기』에서 관소로 사용된 절의 크기와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관소의 제도는 극히 크고 넓어서 대판(大阪)과 서경(西京)에 있는 본원사(本願寺)에 뒤지지 않는다. 4백 명 가까운 일행 상하가 다 같이 한 절 안에 머물렀는데도 오히려 남은 자리가 있었다. 거처하는 대청 앞 동남쪽에는 작은 못이 있어, 물은 맑지 않으나 고기는 더러 뛰었다. 못 남쪽에는 짧은 다리를 가로 설치하여 오가는 길을 통하고, 못 동쪽에는 물 가운데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판자를 깔고 그 위에 모래흙(沙土)을 펴서 동쪽 정원을 만들었다. 정원 동쪽에는 자그마한 언덕을 만들어서 아름다운 꽃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매화가 이미 만발하였다."

히가시혼간지에 정토진종의 맥이 흐른다.
 
정토진종의 종조 신란상인
 정토진종의 종조 신란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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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본원사 즉 혼간지가 여러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혼간지의 본산은 교토의 혼간지다. 이곳에서 신란(親鸞: 1173-1262)에 의해 정토진종이 생겨났다. 정토진종은 염불에 전념(專修念佛)하는 호넨(法然)의 정토종에 신란의 『교행신증(敎行信證)』이 더해져 생겨났다. 교행신증은 정토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가르침, 행동, 믿음, 증거를 말한다. 이를 통해 진정한 정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토진종이 커다란 종파가 된 것은 중흥조 렌뇨(蓮如: 1415-1499, 정토진종의 8대 종주)에 의해서다. 그가 혼간지를 정토진종의 본산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를 거치며 정토진실이 민중해방과 사회개혁 사상의 원동력으로 인식되어 교세가 커지고 대형교단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1554년 겐뇨(顯如)가 쇼뇨(證如)의 뒤를 이어 11대 종주가 된다. 그러나 그는 전국시대 말기 무장들의 권력투쟁에 휘말린다.
 
중흥조 렌뇨
 중흥조 렌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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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8년 실권을 장악해 교토에 입성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천하통일을 위해 1570년 전략적 요충인 이시야마(石山)를 차지하려고 한다. 이시야마는 정토진종의 본산으로 혼간지가 차지하고 있었다. 겐뇨는 장남인 교뇨(敎如)와 함께 노부나가와 결사 항전하며 10년간 이시야마를 지킨다. 그러나 전쟁 말기 교단이 노부나가와 강화를 주장하는 온건세력과 항전을 주장하는 강경세력으로 나누어진다. 이것이 전후 교단분열의 원인이 된다.

1580년 천황의 중개로 노부나가와 겐뇨 사이에 강화가 이루어져, 겐뇨는 이시야마 혼간지를 떠나 와카야마(和歌山) 혼간지로 옮겨간다. 그러나 교뇨는 노부나가를 믿지 못해 이시야마에 남아 항전을 계속한다. 교뇨는 5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노부나가에 항복했고, 절은 완전히 불타게 되었다. 그렇지만 1582년 노부나가가 암살되고, 교뇨가 사면되어 겐뇨 밑에서 절의 일을 보좌하게 된다.
 
교토 히가시혼간지
 교토 히가시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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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5년에는 도요토미가 오사카의 텐만(天滿)에 사지를 기증해 아미타당이 지어졌고, 이듬해 어영당이 지어져 텐만혼간지 시대가 열린다. 1591년에는 교토에 사지를 기증받아 텐만혼간지의 어영당을 옮기고, 이듬해 7월 아미타당을 신축한다. 이를 통해 혼간지의 교토시대가 다시 열린다. 그리고 그해 11월 겐뇨가 입적하자, 교뇨는 혼간지의 12대 종주가 된다.

그는 이시야마 전쟁을 이끈 강경파를 중용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온건파는 겐뇨가 교뇨가 아닌 동생 쥰뇨(准如)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양장(譲状)을 1593년 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제출한다. 이에 도요토미는 10년 후 교뇨가 쥰뇨에게 종주를 양보할 것을 제안한다. 교뇨는 이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나, 강경파 보좌관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문서를 제출한다. 도요토미는 이에 분노해 교뇨의 사퇴와 쥰뇨의 법주 계승을 명령한다.
 
정토진종의 종파
 정토진종의 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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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에서 사퇴한 교뇨는 말사를 세우는 등 포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1598년 도요토미가 죽고, 세력은 점진적으로 도쿠가와에게로 넘어간다. 1600년 9월 세키가하라 전투 후 교뇨는 도쿠가와와 친분을 이용해 혼간지 동쪽에 당우를 마련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입지가 커진 교뇨는 1603년 우에노쿠니에 묘안사(妙安寺)를 짓고, 그곳에 신란상인의 목상(木像)을 안치한다. 이때부터 혼간지에서 히가시혼간지가 공식적으로 독립한 것으로 본다. 히가시혼간지는 그 후 진종오타니파(眞宗大谷派)로 법맥이 이어진다.

도쿄 히가시혼간지의 현재
 
주택, 빌딩과 공존하는 도쿄 히가시혼간지
 주택, 빌딩과 공존하는 도쿄 히가시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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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아사쿠사에 있는 히가시혼간지는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파괴되었고, 1939년 본당이 재건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내부가 파괴되었고, 1953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1965년에는 절 이름을 도쿄혼간지로 바꾼다. 1969년에는 히가시혼간지 내에서 교리 해석과 교단 운영에 대한 갈등이 발생한다. 도쿄혼간지는 1981년 진종오타니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독립한다. 그리고 1988년 도쿄혼간지의 입장에 찬성하는 사원을 중심으로 정토진종 히가시혼간지파를 결성하고 본산이 된다.

우리가 첫날 나리타공항에서 우츠노미야로 가는 고속도로상에서 만난 우시쿠 대불도 1992년 정토진종 히가시혼간지파에서 세운 불상이다. 현재 정토진종 히가시혼간지파의 법주는 26대인 분교(聞如)다. 그의 속명은 오타니 고켄(大谷光見)으로, 뉴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를 수료했다. 1999년 법주가 되었고, 2001년 정토진종 히가시혼간지파 본산 히가시혼간지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인정된다. 그는 2004년 서울 출신의 한국인 김영란(金英蘭)과 결혼했다.
 
조선통신사 안내판
 조선통신사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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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혼간지에서 우리는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흔적은 조선통신사 연고지를 찾아다니며 스탬프를 찍는 팜플렛에서 겨우 찾을 수 있었다. 18개 연고지가 있는데, 그 중 17번째가 도쿄 아사쿠사에 있는 히가시혼간지였다. 그리고 절 앞에 세워진 '히가시혼가지와 조선통신사' 안내판을 통해서도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금년 10월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을 말한다. 2017년 10월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17세기-19세기 한일간 평화구축과 문화교류의 역사)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히가시혼간지 절은 조선통신사가 에도(도쿄의 옛 이름)를 방문했을 때 숙소로 네 번 사용되었다. 당시 건물은 간토대지진으로 인해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태그:#도쿄 히가시혼간지, #통신사 숙소, #신유한의 <해유록>, #조엄의 <해사일기>, #정토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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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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