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엄마는 주부라는 직업을 제외하고 평생 다른 직업이 없었다.

직업대신 부업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집 한켠에는 무언가가 잔뜩 쌓여 있었고, 엄마는 똑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내가 학교에 갈 때도, 집에 와도, 밥을 먹어도, 심지어 잠이 들 때도 엄마는 쪼그려 앉아 똑같은 팔놀림을 하고 또 하고 계속 했다.
 
 어린 내가 부품에 무언가를 끼는 것을 가만히 쪼그려 앉아 보고 있으면 엄마는 나에게 "해볼 거야?"라고 물었다.
 어린 내가 부품에 무언가를 끼는 것을 가만히 쪼그려 앉아 보고 있으면 엄마는 나에게 "해볼 거야?"라고 물었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좁디 좁은 우리 집에는 그때의 나는 알 수 없는 이상한 부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그것들은 내가 큰 방에서 작은 방을 지나갈 때, 작은 방에서 화장실을 향할 때 자꾸만 발에 치어 많이 따가웠다.

"엄마 뭐해?"
"응. 부업해."


부업이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똑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것임을 어린 나는 일찍이 눈치 챘다. 내가 커갈수록 엄마의 부담도 커져 갔을 것이다.

아빠는 동트기 전에 집을 나가 해가 지면 집에 왔다. 주말도 휴일도 없이 일을 했지만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엄마는 뭐라도 해야겠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엄마의 상황과 배경 속에서 '직업'이라 불릴 만한 일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엄마가 부업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어릴 적 나는 빈혈이 심해 앉았다 일어나면 머리가 항상 핑 돌았다. 일요일 아침, 잠에서 깬 나는 내 방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는데 순간 앞이 하얘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쿵' 하는 충격과 함께 바닥에 엎어진 채로 있었다.

왼쪽 턱에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놀란 엄마가 방에서 뛰쳐나왔다. 왼쪽 턱이 좀 찢어졌고 내 옆에는 엄마의 부업 부품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내가 그 위로 쓰러쳐 턱에 부품이 박혀 찢어진 것이었다. 그때 찢어진 건 내 얼굴만이 아니었다. 엄마는 아직도 내 왼쪽 턱에 찢어진 상처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내가 그때 부업만 안 했어도 우리 딸 예쁜 얼굴에 상처가 없었을 텐데..."

내 상처는 엄마의 부업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찢어진 턱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어린 내가 부품에 무언가를 끼는 것을 가만히 쪼그려 앉아 보고 있으면 엄마는 나에게 "해볼 거야?"라고 물었다. 나는 "응!"이라 대답하고 그 부품을 만지작거리며 엄마 옆에서 놀았다.

장난감 대신 부업 거리를 가지고 노는 어린 자식을 보며 그때의 엄마는 무슨 마음 이셨을까. 그렇게 엄마가 하루 종일 부업을 해서 받은 돈은 겨우 몇 만 원이었고, 아빠가 하루 종일 노동을 해서 받은 돈도 겨우 몇 만 원이었다. 왜 엄마와 아빠는 하루 종일 일을 하고도 '겨우' 였을까.

아빠의 직업과 엄마의 부업이 지금의 나를 키웠는데 나는 그 직업과 부업이 참 서러웠다. 아빠는 매일 노동을 반복했고, 엄마는 계속 동작을 반복해 몇 만 원을 받았는데, 나는 그 몇 만 원의 수당이 참 서글펐다.

'뭐라도' 해야 했던 엄마의 지난 시간들이 그저 애처롭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잘 정돈된 말과 글에는 세상을 정의하고 정돈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