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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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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교실의 책꽂이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책이 있다. 사설 학원 로고가 찍힌 대학입시 자료집이 그것이다. 자리도 학급문고의 맨 위 칸을 차지하며, 종류도 다양한데다 분량이 1500쪽이나 되는 백과사전 크기의 것도 있다.

개중에는 닳고 닳아 표지는 물론 속지까지 너덜거리는 것도 있다. 그만큼 아이들이 많이 들여다봤다는 뜻이다. 잠깐 펼쳐 보니 빨간 밑줄을 그어놓은 부분도 보이고, 형광색 포스트잇을 군데군데 붙여 놓은 곳도 있다.

자료집을 낸 곳마다 학원 이름 뒤에 '연구소'라는 명함을 덧달았다. 저자도 어김없이 '입시 전문가'라는 직함이 붙어있다. 더러 현직 고등학교 교사임을 앞에 밝힌 경우도 있지만, 어떻든 맨 뒤는 '입시 전문가'로 끝난다.

진짜 연구가 필요한 과학기술 분야도 아니고, 경제나 정치 분야도 아닌, 고작 대학입시에 '연구소'라는 이름을 붙인 게 어째 좀 낯 뜨겁다. 성적에 맞는 대학과 학과를 찾아주는 게 '연구'일까 싶어서다. 하긴 '최소 성적에 최대 학벌을 얻게 해주는' 연구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시작되는 '대입 준비'

종류는 다양해도 내용은 똑같다. 전국의 모든 대학을 가나다 순으로 망라해 최근 몇 해 동안의 내신 등급과 수능 성적의 합격선을 제시해놓고 있다. 자연스럽게 등급과 점수의 순위가 매겨지는 까닭에, 말이 좋아 입시 자료집이지 기실 '학벌 서열 안내서'에 가깝다.

원서 접수 시즌이 되면, 그 두꺼운 책을 꼼꼼히 챙겨볼 겨를이 없는 바쁜 수험생을 위해서 전지 크기의 '대학 학과 배치표'를 학교에 배포한다. 자료집의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 요약본이다. 통상 앞면은 문과, 뒷면은 이과 관련 학과와 대학을 서열대로 표시하고 있다.

수능을 코앞에 둔 고3 교실이라면 그렇다 해도, 요즘엔 고1 교실의 학급문고에서도 입시 자료집은 이미 대세다. 입시 자료집은 성적이나 기호 등과 무관하게 고등학생들이 가장 즐겨보는 책이다. 고등학교 교육의 유일한 목적이 대학입시인 마당이니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입학과 동시에 토익, 토플과 공무원 시험 준비에 돌입하는 대학 새내기의 모습과 겹친다. 학년과 상관없이 모든 대학생이 '취준생'이 됐듯, 수험생이라는 말도 고3만을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다. 고등학교 입학식을 치르기 전부터 대학입시를 위한 선행학습이 시작되는 요즘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이든 수능이든 대학입시는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하는 분야다. 학교는 사설 학원에서 제공하는 입시 자료로 아이들과 진학 상담을 하는 게 보통이다. 단위 학교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베이스는 오로지 입시만을 전문으로 하는 그들에 견주면 '새 발의 피'다.

'교육 개혁이 곧 대학입시 개혁'이라고 여기는 현실이 지속되는 한, 날로 번창하는 사교육 시장을 막아낼 재간이 없다. '학교에선 잠을 자고, 공부는 학원에서 한다'는 말은 공교육을 향한 조롱에 다름 아니다. 만신창이가 된 공교육은 사교육을 보고 배워야하는 비참한 처지다.

멀쩡한 교과서가 EBS 교재로 대체될 때 이미 예견된 바지만, 이젠 교사들도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수업 준비를 한다. 강사의 목소리와 동작을 흉내내는가 하면, 복장까지도 그들의 패션을 따라간다. 인터넷 강의에 길들여진 아이들을 위한 자구책이라지만, 그래봐야 '짝퉁'이고 잘 해봐야 '2등'일 뿐인데도 그렇다.

아이들의 교사에 대한 최고의 칭찬은 '학교에 계시긴 아까운 분'이라는 말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인터넷 강의에 나서도 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이들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비전도 없는 학교에 있지 말고 강남의 유명 사교육 업체로 옮겨 대박을 치라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학교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곳으로 각인됐다. 매일 학교에서 만나는 교사는 '지질하고', 모니터 화면으로 만나는 강사는 '간지난다'고 여긴다. 수업시간마다 딴청피우고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도 야간자율학습 시간 때 인터넷 강의를 보면서는 눈이 초롱초롱하다.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가 많아 자녀가 학원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된다며 발끈하는 학부모들이 한둘 아니다. 학교 숙제는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여기는 셈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공교육이 아이들과 학부모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사교육처럼 하면 된다.

온존한 학벌 구조와 대학입시가 학교교육 전체를 흔드는 현실에서 공교육은 사교육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공교육이 사교육을 닮아갈수록 교사는 무기력해져만 간다. 고작 사교육과 '입시 전문가' 경쟁을 위해 임용고시에 목매단 게 아니라며 자괴감을 토로하는 교사가 적지 않다.

교실 바닥에는 온갖 보습학원의 홍보 전단이 나뒹굴고 있다. 적혀있는 거라곤 대학입시 실적을 자랑하는 내용뿐이다. '대학 학과 배치표'에 나온 서열 순으로 합격자 명단을 사진과 함께 올려놓았다. 후배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학원 광고에 동원된 사진 속 그들의 모습은 자못 당당하다.

"만약 사교육 금지시킨다면 청년 실업률 상상 초월할 걸요"

그 아이들은 지금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며칠 전 퇴근 길 우연히 제자 한 명을 만난 적이 있다. 이름이 선뜻 기억나진 않지만 재학 시절 성적이 좋았고, 특히 축구를 곧잘 했던 아이였다. 요즘 뭐하냐는 상투적인 질문에 일자리가 나서 낼모레 서울로 가게 됐노라고 대답했다.

강북에 자리한 중소 규모의 학원에 취직했단다. 졸업 후 동네 보습학원에서 알바를 하면서 임용고시를 준비했는데 번번이 낙방한 뒤 교사의 꿈을 접었다고 했다. 대체 강사라면 몰라도, 1년짜리 기간제 교사 자리도 하늘의 별 따기라며 씁쓸해했다.

그는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다'면서 다른 일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오로지 시험공부에만 매달려온 터라 다른 길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거다. '입시 기계'로 자란 그에게 허락된 자리라곤 학원 강사밖엔 없었던 셈이다.

두어 달 전에도 학원 강사로 일하는 몇몇 제자들을 술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몇 해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당장 밥벌이를 위해 학원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고 했다. 취업난이 심각한 요즘, 학원은 상대적으로 진입이 쉬운 곳이라고 푸념하듯 말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학원에는 교사 경험이 있는 중견 강사와 사실상 알바와 구별이 안 되는 신출내기 강사로 나뉜다고 한다. 수입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지만, 이마저도 없으면 갈 곳이 없다며 감사히 여긴단다. 그때 그들과 나눈 대화의 일부를 옮겨본다.

"사교육이 대학입시에 학교교육을 종속시키며 공교육을 황폐화시킨 주범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해도, '입시 기계'로 자란 저희 청년들의 일자리를 일정 부분 책임지고 있는 순기능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 리 없지만, 만약 사교육을 금지시킨다면 청년 실업률이 상상을 초월할 걸요."

"공교육이 바로 서면 저절로 사교육이 없어질 거라는 말은 사실 어불성설이에요. 공교육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기만술에 여론이 오랫동안 길들여진 결과라고 생각해요. 공생 관계인 대학입시와 사교육이 애먼 공교육을 따돌리는 형국이랄까요?"


대학입시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공교육은 영원히 '동네 북' 신세를 면할 수 없다는 지적도 버거운데, 사교육이 이미 취업시장의 한 축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게 된다. 난마처럼 얽힌 우리 교육의 현실을 증명하는 것 같다. 어느 누구도 풀 수 없는 매듭처럼 느껴지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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