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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보석, 두브로브니크(Dubrovnik)에는 발길 닿는 곳마다 중세로의 호기심을 심하게 불러 일으키는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 가장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이야기는 '성 블라이세(Saint Blaise)'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성 블라이세의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면 두브로브니크 여행은 수박 겉핥기가 되고 만다.

그의 조각상은 필레 문(Vrata Pile)과 플로체 문(Vrata Ploce) 등 두브로브니크 구시가로 들어가는 성문 위에도 세워져 있고, 구시가 주요 건축물의 맨 꼭대기에도 그의 조각상이 우뚝 서 있다. 두브로브니크인들의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절대적인 것이다. 두브로니크인들은 성 블라이세가 자신들의 도시를 지켜준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성 블라이세는 두브로브니크에서 수호성인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인 성 블라이세를 기리는 성당이다.
▲ 성 블라이세 성당.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인 성 블라이세를 기리는 성당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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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찾으러 성 블라이세 성당(Church of Saint Blaise)으로 가 보았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성당은 두브로브니크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성당이다. 구시가의 한복판인 성 블라이세 성당 앞에는 수많은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주교였던 성 블라이세는 로마의 박해로 316년에 참수형을 당했던 인물이다. 4세기 인물인 그는 놀랍게도 6백년의 세월이 지난 10세기에 두브로브니크의 한 신부의 꿈에 나타난다.

당시 베네치아의 대형선박이 두브로브니크를 정탐하러 온 위장선박인 것을 알아차린 성 블라이세는 두브로브니크 성 스테판 대성당(St. Stephen's Basilica) 신부의 꿈 속에 나타나 베네치아의 공격 계획을 알렸다. 성 블라이세가 베네치아의 침략을 알리면서 도시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고, 그는 이 지역의 진정한 수호자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두브로브니크인들의 사랑은 전통이 되었고, 결국 그는 12세기에 도시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1368년, 시가지 중심에 로마네스크 형식으로 성 블라이세를 기념하는, 성 블라이세 성당이 건축되었다. 대지진과 화재로 소실되었던 성 블라이세 성당은 18세기 초에 베네치아 건축가 마리노 그로펠리(Marino Gropelli)에 의해 바로크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주교봉을 끼고 두브로브니크 성의 모형을 들고 있다.
▲ 성 블라이세 조각상. 주교봉을 끼고 두브로브니크 성의 모형을 들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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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외부 정면의 가장 높은 곳에는 금빛 주교관을 쓴 성 블라이세 조각상이 찬란하게 서 있다. 이 조각상은 10세기 당시 성 블라이세를 꿈에서 만났던 신부가 묘사했던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꿈 속에서 만났던 모습을 형상화하여 조각해 놓은 신화적인 조각상인 것이다. 성 블라이세는 꿈 속에서처럼 '주교의 관을 쓰고 주교의 지팡이를 든 긴 수염의 노인'으로 조각되어 있다. 

성당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성 블라이세는 천년 전부터 변함없이 두브로브니크를 지키고 있다. 그는 왼쪽 어깨에 금빛 주교봉을 기댄 채로 지진이 나기 전의 두브로브니크 성 모형을 들고 서 있다. 그가 두브로브니크 성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바로 수호성인이 도시를 지켜준다는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가 들고 있는 두브로브니크 성의 모습은 1667년 대지진 이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지진 당시 두브로브니크는 소중한 건축물들의 반 이상이 파괴되고 완전히 재건되었다. 그래서 그가 들고 있는 성의 모형은 다름 아닌 두브로브니크 건축역사 사전인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그가 들고 있는 건물들의 옛 모습을 보면서 역사 고증을 할 정도로 그의 두브로브니크 성 모형은 중요한 유물이다.
 
바로크 양식의 성당 내부는 화려하고 깔끔하다.
▲ 성 블라이세 성당 내부. 바로크 양식의 성당 내부는 화려하고 깔끔하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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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블라이세 성당 출입문은 닫혀 있는 시간이 많은데 다행히 오늘은 밖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왜 이곳이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좋은 결혼식 장소인지는 성당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다. 호화로운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된 성당 내부는 분위기가 환상적이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화재에도 살아남은 조각상이 제단 중앙에 모셔져 있다.
▲ 성 블라이세 조각상. 화재에도 살아남은 조각상이 제단 중앙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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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 제대의 한 중앙에는 은제(銀製) 성 블라이세 조각상이 있다. 1706년 블라이세 성당에 대형화재가 발생했을 때에 성당의 모든 금속물질이 녹아 없어졌지만 성당 외부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이 조각상만은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당 건물과 조각들이 모두 사라졌지만 끝까지 남아 사라지지 않는 성 블라이세 조각상. 수호성인의 전설적인 이야기에 또 하나의 신화가 추가된 것이다. 당시에 이 조각상은 성당 외부에 있었지만 이제는 모조품이 세워져 있고, 금박까지 입혀진 이 진품은 현재 성당 제단 안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있다.

성당 내부에는 무려 4세기의 순교 성인이라고 전해지는 성 실반 마르티르(St. Silvan Martyr)의 유해가 제단 밑에 모셔져 있다. 그는 죽은 지 16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결코 부패하지 않았다고 주장되고 있다. 4세기의 유해라는 설명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지만, 과거부터 전해져 온, 부패하지 않는 순교성인의 유해인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부패하지 않고 있다는 순교성인의 시신이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 성 실반의 유해. 부패하지 않고 있다는 순교성인의 시신이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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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성인인 성 실반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유해는 어제 순교한 사람인 것처럼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순교자의 몸은 방부 처리용 왁스가 발라진 듯 탄력까지 남아 있고, 얼굴은 밀랍으로 만든 듯 부드러워 보인다.

나는 순교성인의 유해를 유심히 보다가 경악하고 말았다.

"저 베개 위에 놓인 그의 머리를 자세히 봐봐. 목에 상처가 드러나 보이지 않아? 칼로 그은 듯한, 피 묻은 깊은 상처 말이야."
"이 상처는 줄을 이용해 목을 졸려 죽은 흔적이거나 참수당한 후 머리를 다시 붙여놓은 흔적인 것 같아. 순교성인의 상처를 그대로 보존한 것은 그가 어떻게 순교했는지, 순교의 수단을 나타내고 있는 거지. 그의 벌어진 입에서, 그가 죽어가며 느낀 순교의 고통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아."


나는 충격 속에 제단 주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온통 백색인 제단 주변은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성당 안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한낮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현대적인 스테인드글라스가 전통의 성당내부와 잘 어울린다.
▲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현대적인 스테인드글라스가 전통의 성당내부와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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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너무나도 생명력이 넘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1971년에 두브로브니크 지역 예술가들이 만든 걸작이다. 창문을 최신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미면서 전통과 조화되는, 신개념의 현대적인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든 것이다. 마치 SF영화 속의 미래 영웅들이 스테인드글라스 속에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걸고 있는 듯 했다.

한동안 성당 안 예배석에 앉아있던 나는 아내와 함께 성 블라이세 성당 앞, 루자 광장(Trg Luža)으로 나와 보았다. 이곳에는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기둥이 서 있다. 이 기둥은 프랑스의 전설적 기사인 롤랑(Roland)이 조각되어 있는 '롤랑의 기둥(Roland Column)'이다. 루자 광장에 조각을 세웠을 만큼 롤랑은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던 한 인물이다.

롤랑은 8세기말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가 이슬람과의 스페인 원정에서 치렀던 론스보(Roncevaux) 전투에서 대제를 구하고 전사했던 수석 기사였다. 이 전투로 인해 롤랑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기독교 세력을 보호하는 상징이 되었다.
 
영웅적인 무용담을 담고 있는 기둥이다.
▲ 롤랑의 기둥. 영웅적인 무용담을 담고 있는 기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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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와의 싸움에서 주군을 보좌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롤랑을 기려 프랑스 최초의 서사시인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가 만들어졌다. 롤랑의 영웅적 무용담을 담은 이 서사시는 11세기 무렵에 유럽 전체로 퍼져 애송되었고, 이 프랑스의 영웅 서사시는 15세기에 두브로브니크에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롤랑의 독립정신이 높게 평가되어 1417년에는 이곳에 롤랑의 기둥이 세워졌다.

롤랑의 기둥은 품위 있는 중세 조각상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롤랑의 오른손에는 칼이, 왼손에는 방패가 들려있다. 롤랑이 들고 있는 검, '뒤랑달(Durandal)'은 천사가 하사했다고 알려진 명검이다. 실제로 롤랑은 샤를마뉴 대제가 하사한 이 전설의 칼 뒤랑달을 전장에서 사용하였다. 뒤랑달은 강하고 예리해서 적의 투구를 쪼개고도 그 몸통과 말까지 토막낼 정도였다고 하는 과장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뒤랑달 칼을 들고 있는 롤랑의 팔은 이 도시의 척도이다.
▲ 롤랑의 오른팔. 뒤랑달 칼을 들고 있는 롤랑의 팔은 이 도시의 척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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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 사람들에게 이 롤랑의 기둥이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롤랑의 기둥에서 그가 칼을 쥔 손부터 팔꿈치까지의 길이가 이 도시의 표준척도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는 51.2cm. 동상 아래에도 이 길이만큼 선이 그어져 있고, 동상의 육각형 모양 받침대의 한 변의 길이도 51.2cm이다. 이는 두브로브니크의 표준 길이 단위인 1엘(ell)에 해당된다.

"왜 팔의 길이가 도시의 기준이 되는 거지?"
"당시 유럽 사람들은 '피트' 같이 사람 몸의 신체 길이를 기준으로 많이 삼았지. 두브로브니크에서 팔 길이의 반을 기준으로 삼은 것은 이 단위가 주로 의류 등의 치수를 잴 때 사용되었기 때문이야. 옷감은 팔로 접으면서 치수를 재거든.

"이곳에 롤랑의 기둥을 세운 것은 이곳이 시내의 한 중심이기 때문인가?"
"롤랑의 기둥이 이곳에 세워져서 도시의 기준이 된 것은 롤랑의 기둥 근처에서 중세시대 시장이 열렸기 때문이야. 그리고 두브로브니크가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 번성하던 당시에 이 동상 앞의 스폰자 궁전(Sponza Palace)은 당시에 세관이었어. 세관과 시장이 연결되는 지점에 동상을 세우고 동상의 팔 길이를 도시의 표준 척도로 삼은 거지."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모여 두브로브니크의 옛이야기를 듣고 있다.
▲ 루자 광장.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모여 두브로브니크의 옛이야기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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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의 조각상 앞에는 오늘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여행자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여행자들은 롤랑과 관련된 옛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듣고 있다. 그들은 옛 중세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의 묘미를 느끼고 있다.
 
바람막이 파라솔 아래의 야외식당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 저녁이 되어가는 루자 광장. 바람막이 파라솔 아래의 야외식당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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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자 광장에 서서히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스트라둔(Stradun) 대로에 면한 식당들 앞에 순식간에 야외 테이블들이 전개되었다. 야외테이블 위에는 바람과 비를 막아주는 튼튼한 파라솔이 펼쳐졌다. 잠깐 사이에 광장 주변은 여행자들이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천국이 되어버렸다. 두브로브니크는 참으로 변화무쌍한 도시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태그:#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여행, #두브로브니크, #두브로브니크여행, #성블라이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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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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