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계 특성화고등학교인 선일이비즈니스고등학교 지하 1층.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30여 명의 학생이 아이캔(I can) 창업센터에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학교협동조합 학생조합원 30여 명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함께 풀어가야 할 의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입니다. 지난달 오픈한 온라인 쇼핑몰 '올고딩' (www.allgoding.com) 홍보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각 반에 전단을 비치해 놓으면 어떨까요?" 
"반별 단톡방을 활용하면 좋겠어요!" 
"각자의 SNS를 활용해 쇼핑몰 홈페이지 링크 걸기를 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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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업센터에 둥지를 튼 학교협동조합 회의실에서 안건을 논의 중인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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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일이비즈니스고등학교는 학생들에게 기업가 정신과 사회공동체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무한창업 선일이비즈니스고등학교 사회적협동조합'을 지난 5월 설립했습니다. 사업 모델은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교과목을 접목할 수 있도록 온라인 쇼핑몰로 정했습니다. 이곳에선 중고물품과 학생들이 직접 만든 제품을 판매합니다.

"어린 나이에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해볼 기회가 흔한 건 아니잖아요? 기본기를 다질 수 있어 좋아요." -김규리 학생(1학년)

CEO 대리 경험... 협업의 가치를 배우다

온라인 쇼핑몰의 이름은 '올고딩'입니다. 슬로건은 고등학생들의 공유경제입니다. 환경을 생각하며 경제 순기능에 앞장서는 올바른 고등학생들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발기인대회 때 어떤 사업을 할까 고민하는데 한 학부모가 '운동회 때 입는 반소매 티셔츠를 1년에 딱 한 번 입고 마는데 이를 후배들에게 물려줄 방법이 없을까?'라고 제안해주셨어요. 쓸모없는 물건이지만 새것 같은 중고물품을 공유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아예 소유권 이전까지 해보자는 모델로 발전했습니다." -이지숙 선일이비즈니스고등학교 창업 창작 부장 

학생들은 5개 조로 나뉘어 팀별 이름을 정했습니다. 이후 필요한 업무를 분담해 한 회사가 굴러가는 듯한 모양새를 갖췄습니다. 판매할 물건을 정한 후 모델이 되어 사진 촬영을 합니다. 사진 보정, 쇼핑몰 업로드, 마케팅, 회계, 포장·배송 등까지 전 과정에서 주체적으로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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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토샵으로 사진을 보정 중인 학생. 학교협동조합은 학생들의 활동을 분업화해 자신의 소질을 개발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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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는 일찌감치 학교 기업을 운영해왔습니다. 학생들이 1인 기업으로 온라인 쇼핑몰을 창업해 성공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이 점점 포화상태에 이르고 학업과 병행하면서 하기엔 벅찬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협동조합은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는 훌륭한 모델이라 생각합니다." 

협동조합은 일반 법인과 설립 과정이 똑같습니다. 법인을 설립하는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워 책으로만 익히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지숙 교사는 "학생들은 법인 설립 과정을 몸소 체험하면서 창업이란 쉽게 덤벼들 게 아니라 치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면서 "업무 분담을 통해 혼자 앞으로 뛰어나간다고 일이 진행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도움이 받쳐줘야 비로소 한발씩 나가는 걸 깨우쳐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서울의 학교협동조합은 현재 24곳. 전국적으로는 68개에 이르지만 대부분 매점 형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온라인 쇼핑몰 형태의 학교협동조합으로는 선일이비즈니스고등학교가 유일합니다.

학교·학생·학부모가 삼위일체

학교협동조합의 조합원은 학생을 포함해 총 40명입니다. 학교 측에서는 법인 이사장을 비롯해 교장·교감·교사 등 총 7명이 참여했습니다. 

"학교협동조합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힘으로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는 데 아주 좋은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학생, 학부모, 교사, 지역주민들이 어우러져 공동체 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등 이점이 많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습니다." -이선남 선일이비즈니스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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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남 선일이비즈니스고등학교 교장(오른쪽)과 이지숙 창업창직부장(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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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지하 1층 창업센터에 학교협동조합 사무실을 내주었습니다. 학생들은 수시로 모여 회의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이 사무실에는 중고물품을 쌓아둘 수 있는 창고형 선반과 촬영 장비, 컴퓨터, 3D 프린터 등이 갖춰져 있습니다. 학생들이 창업경진대회에 나가 상을 받은 제품을 비롯해 반짝이는 아이디어 상품을 상업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3D 프린팅 교육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상업과 체육 교과를 맡은 선생님 조합원들은 학생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 중심을 잡아주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김현경 마케팅 담당교사는 "이곳에선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과 똑같은 조합원 신분"이라며 "서로 배워가는 즐거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 교사는 학생들로부터 포토샵을 배웠다고 귀띔했습니다. 

학부모 조합원은 3명입니다. 학부모들은 학생들이 가져온 물품들이 중고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는 수준인지를 평가해줍니다. 

이지숙 교사는 "너무 헌것은 돌려보내고 간단한 수선이 필요한 물품은 학부모 조합원들이 손수 고쳐준다"고 설명했습니다. 특성화고에서 학부모 조합원이 있는 경우는 현재 선일이비즈니스고등학교가 유일합니다. 

"은평구에는 맞벌이 부부들이 많아 물리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분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가정 형편상 학교 일에 발 벗고 나서기 힘든 학부모님도 많은 편입니다. 정말 어렵게 모셨고 열심히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이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는 것이 교사로서 최고의 기쁨"

선일이비즈니스고등학교 전체 학생 수는 650명입니다. 이 가운데 조합원은 30명으로 1, 2학년 학생입니다. 이 교사는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라 올해는 추가로 조합원을 모집하지 않고 내년부터 연 2회 정도 신입 조합원을 모집해 그 수를 점차 늘려갈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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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은 팀별로 이름을 짓고 각자의 역할을 나누어 활동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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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 희망이나 꿈 없이 오는 학생이 많습니다. 저희는 학교협동조합 안에서 학생들이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기의 적성과 소질을 찾아가길 바랍니다. 그게 창업이 될 수도 있고 취업을 위한 기술 습득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이런 활동이야말로 교육기관이 만들어낼 수 있는 중요한 가치 아닐까요?" 

올해 입학한 새내기 박수경 학생은 협동조합의 일원이 되면서 온라인 쇼핑몰 창업에 부쩍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제 역할은 상세페이지를 만들고 글을 쓰는 일입니다. 제가 올린 상품이 홈페이지에 올라갈 때면 뿌듯함을 느낍니다. 아무래도 제겐 창업이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선생님들은 "타 교과 선생님들로부터 애들 표정이 밝아지고 학업에 흥미를 보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며 "그 모습들을 바라보는 것이 교사로서 최고의 기쁨이다"고 덧붙였습니다.
  
수익금은 공익 목적으로 사용

선일이비즈니스고등학교 협동조합은 사회적협동조합입니다. 출자금은 1좌당 1만 원. 학생들은 알뜰하게 모은 용돈을 형편껏 출자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출자금은 총 180만 원입니다. 교사이자 학교협동조합 이사장을 맡은 이지숙 선생님은 "온라인 솔루션 구축비가 가장 많이 드는데 학교와 인연을 맺고 있는 기업체에서 무료로 제공해줘 출자금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습니다. 

학교협동조합은 수익이 발생하면 전액 학생들 교육에 재투자하거나 기부를 통해 사회에 환원하는 등 공공의 목적으로 활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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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델로 선 친구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고 학생 뒤로 선생님 조합원이 구도를 잡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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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수 학교협동지원센터 학교협동조합전문가는 "컨설팅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취업 또는 창업을 위해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아이들은 이보다 더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얻고 사회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며 사회적협동조합의 틀을 갖추게 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기업 현장 실습 대체재로 학교협동조합 부상

정부는 2016년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제주 음료 회사 기계 사고 등 특성화고 산업체 파견형 현장 실습 과정에서 사고가 잇따르자 올해 조기 취업 형태의 현장 실습을 전면 폐지했습니다.

이어 지난 9월 교육부가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위한 학교 내 협동조합 지원계획'을 발표하자 학생 대상 진로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는 학교협동조합이 현장 실습을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지숙 교사는 "대안으로 부상하고는 있지만 이를 위해선 반드시 해결돼야 할 선결 과제들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현장 실습에서 배울 수 있는 전문 기술과 지식을 전수할 멘토가 협동조합 안에 존재해야 합니다. 또 학교라는 공간은 폐쇄적이어서 단순히 시설 설비뿐 아니라 외부와의 접근성이 쉬운 기업과는 환경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 조금씩 해결해나간다면 협동조합이 언젠가는 현장 실습의 대체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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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먹을 불끈 쥐고 학교협동조합의 성공을 다짐하는 교직원과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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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에 인가를 받아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이 학교협동조합은 쇼핑몰이 자리를 잡는 대로 재학생뿐만 아니라 지역주민, 해외로까지 확장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글로벌 무역학과 학생과 이미 해외에 진출한 선배들을 주축으로 영어와 일어 사이트를 만들어 중고물품이나 학생들이 만든 아이디어 상품을 수출하겠다는 당찬 포부도 있습니다. 

인기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처럼 실패를 두려워 말고, 창업이든 취업이든 도전을 멈추지 말자는 뜻에서 학교협동조합의 이름 맨 앞에 '무한창업'이란 글자를 넣었다고 합니다. 

"지금 아이들은 뭔가 해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어요. 그 열기가 식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이어지길 희망합니다. 자신의 꿈을 향해 아이들이 끝까지 달려갈 수 있도록 말이죠."

*올고딩: http://www.allgodi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