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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기업에 다니던 친구가 대기업 이직에 성공했다. 일단 급여가 올랐다며 기뻐했다. 술 한 잔 얻어 마시며 나도 함께 기뻐하고 축하했다. 몇 달 뒤 만난 친구가 말했다. 

"대기업 가면 똑똑한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어. 대부분 공채 시험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니까. 얼마나 빡빡하냐. 나도 몇 번이나 떨어졌잖아. 그런데 웬 걸? '무능이'들이 널리고 널렸어. 작은 회사나 여기나 똑같아. 그들끼리도 서로 욕해. 무능한 인간이 사내 정치나 한다고."

우리는 공채 시험이 무용한 걸까, 입사하고 세월이 흐르며 그들이 변한 걸까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웃겨. 나 같은 인재를 왜 몰라보냐고, 대체 뭘 보고 사람을 뽑는 거냐며 답답해 했는데 나도 한치도 다름없이 편견에 갇혀 있던 거잖아. 거기라고 똑똑한 사람만 있기는. 그런 게 어딨어. 다 그냥 운이지."

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 출제된 문제들이 적절했는지는 물론, 수학능력시험을 비롯한 입시 제도가 과연 정당한지 의구심을 표하는 기사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올해 처음 보는 장면들은 아니다. 수능, 공채, 문학공모전. 모두가 닮은 꼴이다. 
 
<당선, 합격, 계급> 책표지
 <당선, 합격, 계급> 책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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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은 한국 사회만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로 볼 수 있는 문학공모전과 공채제도에 주목하는 르포다. 부제로 내용을 예상해 본다. '문학상과 공채는 어떻게 좌절의 시스템이 되었나'.
 
"대학 입시와 기업의 공채 제도, 각종 고시나 전문직 자격증 시험도 모두 본질적으로 같다.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획일적이고, 지독히 한국적이다. (중략) 소수의 합격자와 다수의 불합격자가 생긴다. 불합격자들이 좌절로 괴로워하는 동안 합격자들은 불합격자들과 멀어진다. 그들은 합격자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규칙을 배운다.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p17)

저자는 문학공모전과 공채제도의 기원, 선발 메커니즘, 영향력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고 밝힌다. 이는 자신의 뿌리와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설명이다. 또한, 공모전을 준비하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저자 자신이 바로 그런 정보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이었으므로. 

이에 더해, 공모전과 공채제도의 부작용이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 순기능을 유지하면서 단점을 보완할 방법은 무엇인지, 취재 중 얻은 아이디어를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스스로 문학공모전의 수혜자임을 인정하는 작가, 그가 조명하는 공모전이라니. 호기심이 일었다. 

부제 덕분에 공채제도와 문학공모전의 부정적 요소와 폐해에 집중할 것이라 예상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두 제도 모두 공정하고 신뢰성이 높다고 본다. 단점이 없는 완벽한 제도는 아니지만 업계의 안정적인 발전에도 기여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합격(또는 당선)한 사람들은 제도의 공정함과 효율성을 믿는다. 체제 밖의 사람들과 유리되며 내부 결속력은 강해지고 그 결속력은 내부 경쟁을 저해한다. 능력주의는 유명무실, 실력이 아닌 인맥이 중시되며 관료 집단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가령,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무시무시한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그런데 한 번 교사가 된 사람들의 실력을 검증하는 시스템은 갖춰지지 않았다. 책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한 영어 교사의 토익 점수는 무려 370점. 이게 말이 되는가. 좁은 문을 통과하는 다른 직업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책의 키워드는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패자부활전. 저자는 공모전과 공채라는 기존의 시스템을 효율적이고 신뢰할 만한 제도로 보지만, 신인이 데뷔하는 방법이 오직 이것밖에 없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보다 넓고 다양한 관문이 존재해야 하고, 인재들이 성 안팎을 보다 빈번하게 오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편의상 패자부활전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저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저자는 문학공모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지만, 자신이 <율리시스>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보석을 놓쳤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우려를 가졌다고 고백한다.

그 인재들은 패자가 아니고, 패자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관문만 있다면, 그 관문이 그들의 모험과 실험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들은 영영 신인으로서 자리매김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저자는 공채와 별개로 이른바 '또라이들'이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의는 두 번째 키워드, 독자들의 문예 운동으로 이어진다. 기존의 장편소설공모전이 공급자, 즉 출판인과 평론가가 주도하는 계몽적·엘리트주의적 문예운동이었다면, 수요자 중심의 새로운 운동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종류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문예운동과 새로운 운동이 동시에 각각 다른 종류의 작가들을 발견하고 작품을 응원하면서 우리 문학장을 풍요롭게 만드는 모습을 꿈꾼다. 거기에서 전에 보지 못한 다양한 혼종이 탄생하고, 소설가들이 동료들의 문학에 자극을 받으며 혼자서는 돌파하지 못할 방향으로 도전하고 도약하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 새로운 운동을 '독자들의 문예 운동'이라고 부르고 싶다."(373-374p)

저자는 독자들의 문예 운동이 신인을 발굴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어딘가 모르게 설레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부족하기 이루 말할 데 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책을 읽고 서평을 남기는 사람이니까. 내 지극히 사적인 즐거움이 작게나마 공적인 기능도 할 수 있다면 기쁜 일일 테다.

내가 부족한 탓이겠지만, 납득이 잘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가령, 저자는 문학 권력 출판사나 언론 등의 문학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고 이들이 누군가를 띄우거나 배제한다는 의심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다. 나로선 진실을 알지 못하지만, 그 논리가 빈약하게 느껴졌다.

조 단위를 오가는 매출의 대형 영화사도 관객들의 반응은 좌지우지 할 수 없는데, 중소기업 수준인 출판사로서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설명이다. 그러나 시장 자체가 작다면, 그리고 그 시장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저자의 제언은 분명 우리 사회에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공채와 공모전, 이것만이 최선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의 제언이 기존의 시스템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단 하나의 열쇠는 되지 않을지라도, 문제에 주목하게 하고, 또 다른 길을 상상하게 한다. 퍽 반가운 일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독자들을 설레게 할 듯하다. 나를 포함해 이 책의 독자들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일 가망성이 높지 않겠는가. 읽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읽은 것을 함께 대화할 사람이 보다 많아졌으면 하고 바라본다. 

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민음사(2018)


태그:#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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