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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나는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했다. 내 무한한 욕심을 채워줄 만큼 끝없는 이야기를 펼쳐줄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 종착지는 결국 책이 되었다. 얼마나 행복한가.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읽고 싶은 책 목록은 줄어들 일이 없다.

지금이야 장르를 불문하고 사방팔방 더듬이를 뻗치고 있지만, 나를 책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그러니까 '이야기'였다. 가족이 등장하고, 금기가 있고, 꼭 그 금기를 깨는 사람이 나오는, 위험천만하지만 대개는 권선징악으로 끝났던 국내외 전래동화들. 그 이야기들이 나를 홀렸다. 
 
'오정희의 기담' 책표지
 "오정희의 기담" 책표지
ⓒ 책읽는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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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기담>은 그때 그 이야기들을 떠오르게 한다. 저자는 어른, 아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책을 써보고 싶었다고 한다. 생각만으로 그칠 수 있었지만 강원도 곳곳의 이야기를 채록한 <강원설화집>을 만나게 됐고, 이 책이 나오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니 완벽하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뻔한 이야기 또한 아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옛 이야기들이 작가의 상상력을 만나 재구성되었고, 또 다른 독특한 이야기가 되어 생명을 입었다. 또한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그림들이 더해져 이야기에 색을 더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어느 봄날에>다. 쌍둥이처럼 닮은 남매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단 둘이 살았다. 세 살 위의 누나는 동생을 정성껏 돌봤고, 동생은 누나를 어머니처럼 믿고 의지했다. 열세 살이 된 동생은 서당에 다니게 되는데, 착하고 성실했으며 그 누구보다 뛰어나기까지 했다.

아뿔싸. 서당의 형들은 질투에 눈이 멀어 동생을 죽이기로 작당한다. 누나는 화를 피할 수 있는 묘책을 알려주지만, 방심한 동생은 형들에 의해 죽고 만다. 슬픔에 젖은 누나는 삼 년 뒤 동생을 살려내겠다는 묘한 다짐을 하고, 남장을 한 채 집을 나서 떠돌이 생활을 한다. 

남자 행세를 한 누나는 온갖 일을 하며 살다가, 어느 대감집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대감은 성실하고 사리사욕 없는 사위를 믿고 집안의 열쇠꾸러미를 맡긴다. 누나는 대감집에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보물인 죽은 사람을 살리는 꽃가지를 발견하고, 다 썩어 뼈만 남아 있던 동생을 살려낸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누나는 살아 돌아온 동생에게 대감집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고, 동생은 그 집에 들어가 누나를 대신해 진짜 사위가 되어 살아간다. 누나는 행복하게 살되 자신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건만, 동생은 행복에 젖어 누나를 깡그리 잊고 만다. 동생은 약속한 날짜를 넘기고 누나를 찾아가는데… 

저자는 서문에서 밝힌 바 있다.
 
"이야기들을 교훈이나 풍자, 해학, 한 등의 단어로 분석하고 풀이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고 그다지 의미있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명은 유한해도 이야기는 끝이 없다. 인생은 저마다 고유하게 빚어가는 자신만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승해지는 이즈음 앞서 살아간 사람들, 그들의 시대와 세상이 한결 애틋하고 가깝게 다가온다. 삶을 찬가로 만드는 것은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p8)

그렇다. 이야기의 힘만으로도 책을 신명나게 넘길 수 있다.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던 어린 시절의 내가 그대로라는 것이 기껍다. 동시에, 옛 이야기들을 보는 또 다른 재미는 책을 읽는 내가 달라졌다는 데서도 오지 않을까. 어린 시절이라면 생각지 못했을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어린 남매가 오직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야 했을 지난한 시간들에 눈물겹고, 겨우 세 살 많은 어린 것이 누나랍시고 동생을 돌봐야 했던 나날들이 안타깝다. 옛 어른들은 질투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리고 싶었을까. 서당의 형들은 어쩌다 살인까지 불사했나. 

무엇보다 동생은 제 목숨을 살려낸 누나를 어쩜 그리 깡그리 잊을 수 있나. 작가는 간결하게 이야기를 펼쳐가는데, 내 감정은 도저히 간결해지지 않는다. 이게 바로 이야기의 힘 아니겠나. 

어쩐지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 <누가 제일 빠른가>도 있다. 어찌나 일손이 빠른지 누에씨를 받아 키워서 고치를 짓고, 그 고치를 삶아 명주실을 잣고, 명주실로 옷감을 짜 물을 들이고 말려, 그 옷감으로 옷을 완성하기까지 고작 반나절인 처녀가 있었다. 

처녀의 부모는 눈에 차는 신랑감이 없어 수소문을 하고, 대단한 재주를 지닌 세 총각이 모이게 된다. 하루만에 집터를 닦고 여덟 칸자리 집을 짓는 총각, 반나절 안에 삼천 평 논에 모를 심는 총각, 벼룩 세 말을 모아 그 벼룩 모두에 굴레를 씌우는 총각. 과연 이 처녀에게 걸맞는 총각은 누가 될 것인가. 

결말은 나를 웃게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그 아비가 딸 덕분에 공짜로 기와집을 얻고, 모내기를 하고, 벼룩까지 소탕했다고 좋아하는 장면은 얄밉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앵두야, 앵두같이 예쁜 내 딸아>에는 극악하고 잔인한 캐릭터의 단골인 계모가 등장해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다. <고씨네>의 남편은 아내의 헌신을 받기만 하더니 성공한 뒤의 모습은 몰인정해 다소 뻔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 모든 이야기를 일부러 분석하고 풀이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힘에 한껏 빠져들어갔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절로 드는 생각들이 있다면, 그 생각 따라가보지 않을 이유 또한 없지 않은가.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옛이야기'(부제)는 여러가지 면에서 나를 사로잡았다.

옛이야기들을 어떻게 읽을지는 독자에게 달려 있다.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나로선 이 기묘한 옛이야기들이, 손 닿기 쉬운 곳에 늘 있어주길 바랄 뿐이다. 달라진 세상을 보여주는 옛이야기는, 바로 그 이유로 더욱 가치 있을 것이다. 잠자고 있던 이야기들을 깨워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시킨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오정희의 기담 -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옛이야기

오정희 지음, 이보름 그림, 책읽는섬(2018)


태그:#오정희의 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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