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동글이(가명) 유치원 모래놀이 치료 선생님과 학부모 면담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가 무기력하고 자존감이 낮으며 불안도가 높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그림이 변하기 때문에 원래는 그림을 보여주지 않는데 아빠가 상담에 왔기 때문에 한 장만 보여준다며 조심스레 그림을 보여줬다. 창문과 문이 없는 집이었다. 이는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잘 웃고 잘 놀아서 아이들은 저마다 다르니까 우리 아이는 체력이 약한 소심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다른 남자 아이들보다 말로 노는 걸 좋아하고 몸으로 노는 걸 즐겨하지 않는 게 아이 기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우리 부부 문제와 양육태도에 따른 결과인 것 같아 미안함과 죄책감이 몰려왔다.

밤 늦게 잠들어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아이 옆에 누워서 자동차를 밀던 일, 취재간다고 주말에 아빠랑 아이만 두었던 일, 아이 앞에서 남편과 투닥 거렸던 일... 신나게 몸으로 놀아야 할 나이인데 엄마는 누워서 놀아주고, 아빠는 주말에만 그나마도 집에서 놀아주는 상황.

일에 지치고 삶에 지친 어른의 감정이 아이의 무기력으로 나타난 거 같다. 그동안 '어느 집이나 그럴 수 있지, 엄마가 힘들면 그럴 수 있지'라고 여겼던 일들이 그러면 안 되는 일이었다. 가끔이어야 하는 그럴 수 있지가 우리 집은 일상이었나 보다.

다행히 나는 힘들고 절망스럽다고 주저앉는 성격이 아니다. 시급한 일과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에 집중한다.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고, 체력을 아껴서 아이와 있을 때 지치지 않기를 최우선 과제로 선택했다. 마음의 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노력하면 될 거란 생각에 고통스럽진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 상담을 받고 있는데 상담사에게 아이 얘기를 할 때 평소처럼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보통 이런 경우 엄마들이 죄책감에 힘들어하는 데 웃으면서 이야기 하셔서 놀랐어요. 당시 감정이 어땠냐고 물었을 때 분명 미안하고 힘들었다고 하셨는데 표정은 그게 아니에요. 내면과 표면이 다른 거죠. 잘 웃는다는 건 좋은 거지만 자기 내면의 감정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먼저 의식한다는 걸 수 있어요. 내 감정을 억누르는 무언가 다른 더 큰 게 있다는 거죠. 웃음을 회피의 방법으로 쓰고 계실지도 모르고 이런 엄마의 감정처리 방법이 아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요."

상담사에게 웃으면서 얘기한 게 뭐가 잘못이냐고 항변하려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다. 같이 그림책 모임을 하던 친구가 지난 8월 하늘로 갔다. 작년에 희귀암이란 사실을 처음 발견했을 때 전화로 "언니 이거 얼마 못 산데요. 생존율이 0.5%래요"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다른 모임원들에게 말할 때였다. 마음은 참담한데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느껴졌다. '왜 그러지? 왜 난 슬픈 상황에서도 미소를 짓지?' 당시에 들었던 의문이 오늘 상담사 이야기와 연결됐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자기 감정을 들여다 보는 일, 내 감정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 문득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떠올랐다. 아이를 재우고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모리스 샌닥 <괴물들이 사는 나라> 겉표지
 모리스 샌닥 <괴물들이 사는 나라> 겉표지
ⓒ 시공주니어

관련사진보기

늑대 옷을 입은 남자 아이가 집안을 뛰어다니고 망치로 벽에 못질을 한다. 아이 엄마는 "이 괴물딱지야"라고 소리치며 저녁도 안 주고 아이를 아이방에 가둔다. 아이는 엄마를 잡아먹겠다고 으르렁 대고는 자기 방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등받이가 높은 침대가 놓있고 창으로 달빛이 들어오던 방이 점점 우거진 수풀로 변하더니 아이는 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한다. 하루, 이틀, 한 주, 한 달, 일 년을 항해한 끝에 아이가 닿은 곳은 괴물들이 사는 나라. 

괴물들은 아이를 보고 눈을 뒤룩뒤룩하고 이빨을 내보이며 위협했지만 아이는 단번에 괴물들을 제압하고 괴물들의 왕이 된다. 왕이 된 아이는 현실왕과 달리 괴물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한바탕 축제를 벌여 괴물들과 신나게 논다.

한참을 놀고 나니 아이는 이제 엄마 생각도 나고 배도 고프다. 괴물들을 뒤로 하고 다시 일 년, 한 달, 한 주, 하루를 거슬러 자기 방으로 돌아온 아이 방 테이블 위에 는 따뜻한 저녁이 놓여있다. 아이는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못된 짓하다 엄마한테 혼난 아이가 상상의 세계에서 괴물들과 잘 놀다 돌아온다는 이야기인 '괴물들이 사는'나라는 그림책의 고전이다. 출간 당시 '아이가 엄마에게 소리를 치고 버릇없는 모습이 나오는 게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고 금지해야 한다는 논란도 있었다.

시대가 변해 이정도 행동이 그림책에 나오는 건 허용하는 분위기지만 여전히 어른 독자는 이 책이 왜 좋은지, 36장의 그림책을 해석하고 연구한 책이 왜 몇 백 페이지나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어른은 모르는 아이만의 카타르시스가 있겠지, 좋은 책이라니 읽자' 싶은 마음에 읽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정진호 작가의 강의에서 이 그림책을 해석하는 여러 이야기 중 한 가지를 듣게 됐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 괴물이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많은데 그중 아이 안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견해가 있다는 거다. 엄마에게 혼난 뒤 화도 나고 죄책감도 드는 아이가 자기 마음 속 부정적인 마음을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이 괴물과 노는 과정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책을 보면 아이는 괴물들을 만나도 겁먹거나 주눅들지 않는다. 단번에 괴물들의 왕이 되고 괴물들과 한바탕 놀이를 벌인다. 그런 뒤 미련없이 괴물들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다.

괴물들이 아이 안에 있는 부정적 감정이라고 할 때 아이는 자기 안에 있는 공포, 두려움, 죄책감 같은 감정을 만났을 때 겁먹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들과 한바탕 놀이를 벌인다. 한참을 논 뒤에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아이 모습은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픔, 고통, 분노, 불안, 두려움 같은 감정을 만나면 도망가기 바쁘다. 그림책 속 아이처럼 내 마음 속으로 여행을 떠나 감정을 직면해야 하는 데 쉽지 않다. 감정이 발산될 수 있도록 판을 벌려 같이 놀아야 찌꺼기가 남지 않는데 쉽지 않다. 감정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다루어야 자기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 '괴물들이 사는 나라'다.

책을 보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내 안의 감정을 들여다 보는 일이 어렵게만 느껴졌는데 그냥 한바탕 노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웃음으로 감정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내 감정을 바라보고 스스로 치유할 수 있게 될 거고, 아이 마음도 잘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 - 1964년 칼데콧 상 수상작

모리스 샌닥 지음, 강무홍 옮김, 시공주니어(2002)


태그:#괴물들이 사는 나라, #아이육아힘들어요, #아이자존감, #내감정들여다보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