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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드는' 천은사가 미안했던 이유

'오늘은 애들이랑 어디 가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토요일 아침. 강아지만 나타나면 꺅꺅 거리는 동물 애호가 둘째를 위해 동물농장으로 갈까? 아니면 초미세먼지 수치도 안 좋은데 맑은 공기 마실 수 있는 두타산 천은사로 갈까? 거리는 내가 사는 강원도 동해에서 차를 타고 20분 정도로 비슷하다.

아이들은 울타리 안에서 얌전히 먹이를 받아먹는 귀여운 아기 양을 훨씬 좋아할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한 번 가면 써야 할 돈이 만만치 않다. 입장료에 사료, 놀이기구까지 타고 오면 못 해도 3만~4만 원 쉽게 쓰고 오는 곳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실컷 뛰놀 수 있는 산책도 무진장 좋아한다. 결국 동물농장의 '동'자도 입 밖에 내지 않고 킥보드와 유모차를 실어 산으로 출발했다.
 
천은사
 천은사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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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까지 오르는 산책길에 킥보드도 타고, 계곡 물에 낙엽도 한참 흘려보냈다. 250년 산 느티나무와 하늘을 찌르는 낙엽송 아래에서 이국적 신비로움도 만끽했다. 낙엽을 공중으로 던져 흩뿌리는 낙엽비 놀이, 돌탑 쌓기, 도토리 계곡 물에 던지기, 그리고 천은사 경내 걷기까지. 푹신하게 젖은 낙엽 사이로 상쾌한 흙냄새가 올라왔다. 

"엄마, 내일 또 와요."

아이는 활짝 웃으며 절 산책을 즐겼다. 드디어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돈 안 드는' 천은사 나들이는 내심 미안한 걸음이었기 때문이다.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동물농장, 직업체험장, 로봇박물관 등으로 아이 시간을 채워주면, 왠지 부모 노릇을 제대로 했다고 여겼다. 지갑을 꾹 닫아버리는 반대의 경우, 두 딸을 부족하게 키우는건가 하는 과장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이토록 아름다운 두타산 자락 고요한 절에 '돈 안 드는 천은사'라는 접두어를 붙인 속마음은 무엇일까? 전문가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이, 어설퍼도 부모가 아이와 낙엽 뿌리는 놀이보다 더 유익한 게 되어버린 걸까.

돈 들여 전문가가 꾸려놓은 프로그램에 따르는 게 더 좋다는 맹목적 소비가 우리 마음과 지갑을 허전하게 한다. 남들만큼 잘 키우려면 교육용 콘텐츠를 소비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동물농장이나 천은사가 고유하게 갖고 있는 본질을 들여다 볼 여유를 점점 잃어갔다.
 
낙엽비 뿌리기 놀이
 낙엽비 뿌리기 놀이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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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는 과연 뒤처지게 될까?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지갑을 열어야 할지, 닫아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은 비단 주말 나들이뿐만 아니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심심치 않게 마주치는 영유아 학습지 권유를 받을 때도 '돈 쓰는 부모가 아이를 잘 기른다'는 주장에 맞딱뜨린다.

4살 큰 아이 손을 잡고 다니면, 학습지 선생님은 "꼬마야, 하나 골라 봐" 하며 색색이 장난감 자동차를 들이민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큼직한 자동차를 집어들면, 꼼짝없이 학습지 권유를 들을 수밖에 없다.

"아이는 몇 살인가요? 발달 단계 검사를 받아보세요. 저희 학습지는 맞춤형이기 때문에 뒤처지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가르쳐 드립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하고 있어요. 지금 시작해도 늦어요."
"부모님들께서는 바쁘시니까 아무래도 아이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시긴 힘드실 거예요. 전문가 도움을 받으세요. 아동수당을 이런 데 쓰셔야죠."


"좀 더 생각해 보겠다"며, 아이가 집었던 장난감을 슬쩍 올려 놓고 상황에서 빠져나온다. 한 달 4만 5천원짜리 한글놀이 프로그램을 거절함으로써 전문가의 손길을 덜 받게 될 우리 딸은 과연 뒤처지게 될까?

영유아 학습지뿐만 아니다. 가족 나들이, 독서 프로그램, 오감놀이도 아이의 '정상적인' 성장을 위해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한다. 심지어 컵으로 물 마시기 위해 젖꼭지컵, 스파우트컵, 빨대컵으로 전문가가 고안한 단계별 연습을 권유받는다.

전문가들은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연구해 상품을 개발한 후 시장에 내놓는다. 여기에 의존하게 되는 순간 외벌이로는 도저히 아이를 길러내기 어려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직장에서 해고 당하면, 당장 삶은 곤두박질 칠 것이다. '상품'과 '전문가'에게 삶을 의존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해 왔기 때문이다.

돈으로 교환하지 않는 물건, 서비스, 경험은 무가치한 취급을 받는다. 그러므로 돈을 벌지 않는 사람은 무능력자가 된다. 아이를 기르는 일조차 전문가만 할 수 있다면, 부모가 경제적 능력을 잃는 순간, 순탄하던 육아도 무너진다. 우리 계속 이렇게 위태롭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삶의 방향키를 월급 주시는 사장님과 받은 월급 고스란히 바쳐야 할 전문가가 쥐고 있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상품 의존도를 낮추는 길은 시장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이 시대의 막을 내리는 길이다. 사회적으로 절제의 윤리를 키워 인간이 스스로 행동하고 이를 통해 필요를 만족시키는 시대를 여는 길이다.
- 이반 일리치, <누가 우리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누가 우리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의 저자, 이반 일리치는 이렇게 제안한다. 상품 의존도를 낮추고, 스스로 행동하여 만족을 구하라!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영유아 학습지를 하는 대신, 하루 10분 아이를 부모 무릎에 앉혀놓고 책을 읽어주자. 책 읽어주는 스마트 패드를 누르던 아이 손은 부모 손등을 어루만지고 있을 것이다.

오감놀이센터에 등록하지 말고, 쌀 씻기 전 아이 손에 쌀알을 쥐어줘 보자. 옆 친구와 똑같은 부직포 밀짚 모자 쓰고 스펀지 사과를 수확하는 농부 흉내를 낼 때보다 생생할 것이다.

놀이동산보다 동네 뒷산으로 아이를 데려가 낙엽비를 뿌려 보자. 철창 안에 갇히지 않은 건강한 청설모라도 마주치면 아이 눈은 더욱 반짝일 것이다.

우린 단지 아이를 기를 뿐이고,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할 뿐이다. 거기에 돈이 들 수도 있고, 안 들 수도 있다. 굳이 돈을 써야 할 필요도, 안 썼다고 속상해 할 필요도 없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부모도 그저 편안하게 살아가면 된다. 부모보다 전문가가 더 잘 할 거란 편협한 안목에서 벗어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전문가에게 길들여진 탓에, 돈을 써야 아이를 제대로 키운다고 생각한다. 필요하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부모 스스로 해 보지도 않고 덥썩 맡겨 버리지 말자. 

천천히 우리 손으로 아이를 길러 보자. 아이를 잘 기를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늘 것이다. 더불어 그동안 교육비를 감당하느라 얕아져만 가던 통장 잔고도 두둑해질 것이다. 전문가에게 덜 의존하는 부모가 경제적으로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다.

누가 부모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아니, 누가 '돈 안 쓰는' 부모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지갑 닫고 두 손, 두 다리를 건강하게 움직이는 부모들의 쓸모는 전문가 사회가 공고해질수록 더더욱 가치로워질 것이다.
 
낙엽길
 낙엽길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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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태그:#최소한의소비, #미니멀육아, #전문가의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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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고, 글 쓰고, 사랑합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을 꿈 꿉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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