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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노벨상 많이 받는데, 우리 한국은 왜...'라는 말은 매년 10월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한국의 학계·언론계가 짚는 원인의 허구성, 일본 현황, 그리고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11월 1일과 2일 이틀 4회에 걸쳐 모색해 봅니다. [편집자말]
[이전 기사]
①'한국이 노벨상 못받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환상
②노벨상 많은 일본, 왜냐면
③일본의 노벨상 빅뱅의 세 가지 수수께끼

드디어 마지막 편이다. 지금까지 일본의 노벨상 빅뱅의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로 분석해 봤다. 이 분석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세 가지다.

[첫 번째 교훈] 복수의 클러스터를 만들어라

첫째, 노벨상을 원한다면 복수의 고등 연구 클러스터(집적지)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우리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과학연구 기반을 만들어 냈다. 2016년 기준으로 한국의 SCI등재 논문 건수는 6만 건 정도로 세계 12위. 스페인에 필적하며, 호주와 인도를 바짝 뒤쫓고 있다.

(* SCI란 : SCI란 Science Citation Index의 약자로서 미국에서 1960년에 만들어진 과학분야 인용 색인이다. 이 SCI(과학분야 인용색인)에 등재된 학술지를 SCI 등재지라고 하고 여기에 실린 논문을 SCI논문이라고 한다. SCI논문의 숫자는 보통 한 대학 혹은 한 나라의 종합적인 연구 역량을 측정하는 지표로 자주 사용된다.)

2006년에서 2016년간 피인용 상위 1% 논문 건수는 약 4000건으로 세계 15위다. 2012년에서 2016년간 3대 과학저널에 실린 논문은 562건으로 세계 16위. 우리 경제 규모가 세계 12위권 내외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의 경제력에 비해 그다지 떨어지는 성적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한국은 또한 높은 수준의 고등연구기관들도 만들어 냈다. 2018년도 QS평가에 따르면 일본 노벨상의 양대 산실인 도쿄대가 28위, 교토대가 36위이다. 그런데 같은 평가에서 서울대는 36위, KAIST가 41위, 포항공대가 71위를 차지했다. 2018년도 THE 평가에서도 도쿄대가 46위, 교토대가 74위인데, 서울대가 74위, KAIST가 95위, 포항공대가 137위를 차지했다. 개별 연구기관의 수월성만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의 고등연구기관들이 특히 일본의 대학들에 비해 많이 뒤쳐진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번 더 질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복수의 고등연구 클러스터를 만들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서울대학교 정문.
 서울대학교 정문.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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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의 과학연구 역량은 지나치게 서울대를 중심으로 하는 서울 클러스터에 집중돼 있다. 2016년 기준 SCI 등재 논문건수를 보자면, 서울대를 비롯한 서울지역 9개 대학이 전체의 52%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모든 대학의 논문 건수를 합해도 이 9개 대학을 능가하지 못한다. 영남권에 위치한 부산대가 3.8%, 경북대가 3.6%, 울산대 3.4%, 포항공대 2.8%로, 이들 경남북 소재 주요 4개 대학 총합이 13.6% 밖에 안된다. 서울 지역 9개 대학 논문건수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충청권은 어떤가? 충청권의 상위 랭커인 한국과학기술원이 4.6%, 충남대가 2.4%이다. 도합 7% 밖에 안된다.

서울 클러스터 이외에 그와 독립돼 그에 필적할만한 대규모 고등연구 클러스터가 최소한 하나 더 필요하다. 일본에서 관동, 관서, 중부 클러스터가 상호 협력하고 경쟁하는 것처럼, 이 2개 이상의 클러스터가 서로 경쟁, 협력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 갖추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교훈] 독자적인 연구자 충원 시스템을 건설하라

두 번째 교훈은 독자적인 연구자 충원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에서 '서울 클러스터'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서울대를 필두로 하는 서울 클러스터를 과연 독자적인 하나의 클러스터로 볼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서울 지역 주요 대학 거의 모두가 자신의 교수 요원들을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아직 학문적으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는 식의 학문 민족주의 관점에서 볼 일이 아니다. 독자적인 충원 체계없이 노벨상을 다수 배출하는 나라가 없었다. 독자적인 충원 체계가 없는 한 우리는 언제나 서방 강대국들이 생산한 과학기술 지식의 소비자일 뿐이다. 이제는 독자적인 생산자가 돼야 한다. 독자적인 충원 체계는 장기적으로 창의성을 제고하고 연구 업적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우리로서는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대부분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한 나라에서 박사를 받고, 연구를 하고, 노벨상을 받았다. 더 중요한 것은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부분이 박사를 받고 나서 자기에게 박사를 준 연구기관에 취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기를 낳아준 학교가 아니라 일단 다른 시각과 연구 경험을 가진 연구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다른 연구기관으로 떠난 것이다.

이렇게 높은 이동성을 갖되 나라를 잘 바꾸지는 않는다는 것이 노벨상 수상자들의 학문적 배경 조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이다. 그리고 이 교훈은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학문적 성장 배경을 봐도 대략 들어맞고 있다. 대부분의 수상자들이 국내파이지만 여러 연구기관들에서 연구를 수행했고, 그러한 와중에도 주로 일본을 근거지로 했다.

노벨상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는 서구의 연구자들이 정한다. 그러나 서구의 연구자들이 동양인의 연구 결과라고 해서 차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벨상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서구의 연구자들은 자기들에게서 배워간 것을 변주하는 정도로는 업적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양인에게 노벨상을 줄 정도가 되려면 자기들이 보기에도 뭔가 새로운 업적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동경대가 1877년에 설립됐으니 이제 대략 140년이다. 일본의 근대 고등연구기관들도 처음에는 거액을 들여 외국인들을 초빙하고, 해외에 대규모로 유학도 보내고 하면서 서구의 과학기술을 열심히 베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수준이 되자 일본인들은 스스로의 독자적인 학문 연구의 사이클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스로 박사를 만들어내고 이들 간에 경쟁시켜 교수를 임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국내에서 산출된 교수들이 다시 새로운 박사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렇게 몇 세대가 지나고 나서부터 일본의 노벨상 '빅뱅'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의 교훈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처럼 대부분의 주요 대학 교수들이 해외유학파로 채워지는 현실이 계속되는 한 노벨상 수상의 소식은 요원할지 모른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복수의 연구 클러스터를 만들고 각 클러스터들이 독자적으로 박사를 배출해 그 박사들이 다른 클러스터에 가서 교수로 취직하는 전통이 만들어질 때, 우리가 노벨상을 받게 될 확률 역시 상승할 것이다.
 
노벨상.
 노벨상.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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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교훈] 기존 거점 중 하나를 집중 육성하여 해외 클러스터와 직결시켜라

세 번째, 단기적인 대안을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까지의 분석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복수의 고등연구 클러스터를 만드는 것은 막대한 투자와 장기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한국이 많이 크긴 했지만 현재 한국 경제의 규모는 영국이나 프랑스 경제의 대략 60% 정도에 불과하다. 일본 경제의 4분의 1이 조금 넘는 수준. 지난 100여 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 일본이 쌓아온 연구 자원과 역량 등 제도적 유산을 감안한다면 그 격차는 훨씬 더 클 것이다.

우리의 제한된 경제적 능력과 과학기술 자원을 놓고 봤을 때 과연 우리에게 서울 클러스터의 독자적 충원 시스템을 완성하고 그 이외에 최소 하나 이상의 클러스터를 더 만들만한 역량이 있을지 미지수이다. 수십년이 걸릴지 1백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손놓고 있을 수는 없다. 단기적으로 하나의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막스 피셔는 과거 1960, 70, 80년대에 동유럽의 일부 소국들이 노벨상 수상자들을 대거 배출했던 시기를 지적했다. 그 당시 이들 국가들은 자체적인 대규모 고등 연구 클러스터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업적을 이뤄냈다. 피셔는 그것은 이들이 당시 소련이라고 하는 냉전 시기의 대규모 고등연구 클러스터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단기적으로는 타국의 성공적인 연구 클러스터와 다방면에 걸친 대규모 공동연구를 통해 일종의 '노벨상 점프'를 노려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 마치 일본이 패전 후 전쟁 전의 제국대학 구조를 과학연구 투자의 기반으로 활용했듯이 우리측의 파트너가 될 클러스터는 서울 클러스터 이외에 기존의 여러 클러스터 후보들 중 그래도 연구의 경험과 유산이 가장 많이 축적된 곳으로 골라, 이를 집중적으로 성장시키는 전략을 선택해볼 수 있다.

동시에 해외의 클러스터들 중 지리적으로 가깝고 원활한 소통과 공동연구가 가능한 곳을 한 군데 선정해 우리 측 파트너 클러스터와 긴밀히 연계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산경남권의 연구기관들을 하나로 묶어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이를 일본 중부지방이나 관서 지방의 연구 클러스터와 단단히 결합하는 것이다. 양 클러스터 간에 대규모로 연구자를 상호 파견하고 대규모 공동연구를 실시해 보는 것이다.

필자의 예상으로는 상당한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여전히 국경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지리적 제약, 긴밀한 의사소통에 장애가 될 언어 장벽, 또한 일본에 대한 현재의 국민 감정 등을 생각해 봤을 때 그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다. 창의적인 정책 대안과 우리 정치 지도자들 및 국민들의 커다란 결단이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도된 분석에서 올바른 해법은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일본의 과학연구가 강한 이유를 분석하거나 우리 과학계의 약점을 분석할 때, '오도된 분석'에 휘둘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현재 한국 사회와 언론에 횡행하고 있는 일본이 노벨상을 많이 받는 이유에 대한 분석은 근거가 취약하고 분석이 정밀하지 못하다. 이러한 분석에서 올바른 해법이 나오기 어렵다.

신문 지상만 훑어 보아도 현재 한국의 과학계에 대한 비판은 매우 다양하다. 위계를 강조하는 도제식 연구, 교육 시스템이 혁신을 가로막는다. 박사과정 학생들이 교수에게 너무 의존적이고 독립성이 없어서 개인의 창의성이 마비된다. 산업 수요 위주의 연구개발 투자가 기초 연구를 질식시킨다. 연구지원을 위한 정부의 지원 시스템이 전문성이 없고, 연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운용되고 있다.

그뿐인가. 연구비에 대한 통제가 너무 강해서 교수들이나 대학원생들이 연구과제를 자유롭게 선정하지 못한다. 대학생들이 전공을 너무 일찍 선택하다보니 시야가 좁고 학제적 접근을 못한다.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너무 암기위주 교육만 시키다보니 학생들이 창의성이 떨어진다. 학계의 풍토가 외국인 연구자들에게 폐쇄적이다.

이와 아주 똑같은 비판들을 2000년대 초반까지 노벨상을 배출하지 못한다며 일본의 과학기술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논문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관련 자료). 당시 일본은 국내는 물론 해외로부터도 커다란 경제 규모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수상자를 너무 적게 배출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었다. 당시 일본 국내외의 비판가들은 위에 든 것과 같이 바로 지금 한국 과학계에 가해지는 비판을 일본 과학계에 제기하면서, 그런 이유 때문에 일본이 노벨상을 못 받고 있고 그래서 일본의 연구와 교육 시스템을 싹 뜯어 고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의 노벨상 빅뱅이 시작되면서 일본 과학계에 대한 그 신랄한 비판들은 어느 새 칭찬으로 바뀌어 버렸다. 2016년 10월 중국 <환구시보> 영문판이 내놓은 논평을 보면 아주 일본 과학계에 대한 칭찬으로 도배가 돼 있다. 

일본의 연구환경은 개방적이고 혁신을 장려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일본 학생들은 자유롭고 사고가 독립적이다. 일본은 학계의 풍토 자체가 자유로운 사고 표현에 관대하다. 일본은 전략적으로 학술연구의 우선순위 선정을 잘 하고 있다. 일본은 서방 학술 선진국들과 인적 교류를 잘하고 있다. 일본은 기초 연구에 우선순위를 두는 데 중국은 응용연구만 하고 있다 등등.

그러나 사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면, 일본 국내외의 비판가들이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하던 그 낡아빠진 교육 시스템 하에서 교육을 받고, 혁신과 창의성을 질식시킨다는 그 잘못된 연구 시스템 속에서 수십년간 묵묵히 연구를 해온 사람들이다. 1980년대를 전후해 일본의 과학 교육과 연구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 일본 국내에서 연구하던 수많은 토종 일본 과학자들이 세계가 인정하는 과학적 업적을 산출했다.

이것은 일본 과학계에 대한 과거의 비판들이나 현재의 칭찬들 모두 상당수가 피상적인 관찰과 분석의 결과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오도된 분석에서 올바른 방향 설정이 나올 리 만무하다. 올바른 방향 설정은 오로지 올바른 현실 인식과 분석에서만 나올 수 있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노벨상이 아니라 첨단의 과학적 업적을 산출할 수 있는 역량이다. 노벨상을 부러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노벨상이 아니라 첨단의 과학적 업적을 산출할 수 있는 역량이다. 노벨상을 부러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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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과 투지를 다지고 새로운 길로 도전하자

우리가 일본의 노벨상 빅뱅에 대해 부러워할 필요도 질투할 필요도 과공할 필요도 경시할 필요도 없다. 노벨상을 떠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첨단의 과학 업적을 산출할 수 있는 역량이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독자적인 연구자 충원 시스템을 갖춘 복수의 고등 연구 클러스터가 필요하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과학기술을 여기서 한 단계 더 도약시키자면 이것은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소망과 투지를 다지고 새로운 길을 향해 도전하자.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장부승 교수는 현재 일본 오사카시와 교토부 중간에 위치한 간사이외국어대에서 국제정치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글쓴이가 2018년 10월 26일 내일신문에 기고한 칼럼, "일본의 노벨상 빅뱅의 미스터리"를 확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노벨상,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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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스탠포드대학교 쇼렌스틴 펠로우, 랜드연구소 스탠턴 펠로우를 거쳐 현재는 일본 오사카 소재 관서외국어대 교수 재직중. 일본 및 미국, 유럽,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다양한 학생들을 상대로 정치학을 강의하고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booseung.chang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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