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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책이 있습니다. 이 시리즈가 나오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좀만 늑장 부리면 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명 브랜드에서 한정판이 나오면 줄 서서 사는 현상 같기도 하네요.

'올재 클래식스' 얘기입니다. 비영리 사단법인 올재에서 동서양의 다양한 '고전'의 번역본을 출판하는 시리즈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28차가 발매되었죠. 그동안 나온 책을 보면 <사기>, <한비자>, <수호전> 등 중국의 경전과 소설, <징비록>, <지봉유설>, <삼국사기> 등 한국의 저술이 있습니다. 물론 <국부론>, <종의 기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등 유럽 고전들도 있습니다. 28차까지 120권의 책을 낸 겁니다.

올재 클래식스는 발행 부수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매 시리즈는 권당 5000부만 인쇄해 4000부는 일반에 판매하고 1000부는 복지시설 등에 기부합니다. 완판되더라도 다시 찍지 않습니다. 구하기 힘드니 인기 있는 건가요?

이 책들은 저렴합니다. 한 권에 2900원입니다. 한 시리즈가 네 권이니 웬만한 책 한 권보다 저렴한 거죠. 저작권 해결된 책들과 재능 기부, 후원 등으로 가격을 낮춘다고 합니다.

제작비 때문인지 이 책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조금 촌스럽습니다. 오렌지 색의 표지가 눈에 확 띄죠. 게다가 그 표지와 내지는 얇고, 작은 활자가 한 페이지를 가득 메워 읽기에도 불편하죠. 그래도 저렴하니까 인기가 있는 걸까요?
 
지난 10월 26일 금요일 오전 11시 올재 클래식스 28차가 풀리자 광화문 대형서점 매장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책을 집는다. 1인당 3 세트만 구매 가능하다.
▲ 올재 클래식스 28차 지난 10월 26일 금요일 오전 11시 올재 클래식스 28차가 풀리자 광화문 대형서점 매장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책을 집는다. 1인당 3 세트만 구매 가능하다.
ⓒ 올재 페이스북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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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재 클래식스의 새 시리즈는 매번 금요일 오전에 한 대형서점의 인터넷 사이트와 광화문 매장에서 먼저 판매됩니다. 나머지 물량으로 토요일 오전부터 전국의 지점으로 풀리고요. 내 경험에 의하면 보통은 사이트 열리고 얼마 후 인터넷 물량이 소진되기 마련입니다. 일하다 보면 놓치기 일쑤죠.

그래도 2년 전까지는 직장이 광화문이라 점심시간에 들러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기 있었던 시리즈의 경우는 점심시간에 가도 '매진되어 죄송합니다'라는 안내문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토요일 아침 집 근처 그 서점 지점이 문 열 때 달려가야 합니다.

이번 28차 시리즈도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며칠 전부터 페이스북 페이지에 새로운 시리즈가 발매된다고 예고되었죠. 설렜는데 '조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묵자>가 포함되어 더욱 기다려졌습니다. 읽고 싶었거든요.

지난 금요일 오전 11시에 시작되는 인터넷 구매를 위해 알람을 미리 맞춰 놓았습니다. 아침부터 바쁜 일은 오후로 미루고 준비했죠. 그런데 하던 일에 살짝 몰입해서 깜빡, 평소 조용하던 전화까지 울리는 바람에 깜빡. 그만 인터넷 사이트 입장 시간을 놓쳐버렸습니다. 역시나 11:00가 넘으니 사이트가 버벅댔죠. 고작 몇 분 늦었는데요. 그래도 연결이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구매 버튼을 눌렀죠.
 
  인터넷 구매 페이지 화면. 11시에 오픈되자마자 클릭했으나 이미 1500명이 넘게 대기하고 있었다.
▲ 올재 클래식스 28차  인터넷 구매 페이지 화면. 11시에 오픈되자마자 클릭했으나 이미 1500명이 넘게 대기하고 있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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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벌써 "현재 동시 주문량이 많아 장바구니 접속 대기 중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떴습니다. 내 앞에 1500명이 넘게 있었죠. 여기서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면 순서가 더 밀리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초조한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구매 페이지로 넘어갔죠. 떨리는 손으로 정보를 입력하고 그다음 단계로 가려는데 이미 "한정 물량 소진"이라는 메시지가 떴습니다. 아직 11시 30분이 안 된 시간이었는데 말이죠.

어쩔 수 없습니다. 토요일 오전에 집에서 제일 가까운 지점으로 달려갈 수밖에요. 불금 모임이 있었지만, 평소처럼 달리진 못하겠더라고요. 긴장했는지 잠도 깊게 들지 못했습니다. 오픈 시간보다 일찍 서점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앞서 들어가는 차들이 보였습니다. 오피스 건물이라 토요일에 출근할 리가 없는데 말이죠.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역시나 모두 서점이 있는 지하 1층에서 내렸습니다. 서로를 의식하는 게 느껴졌죠. 다행히 이 지점에 할당된 물량은 충분했습니다. 괜히 뛰었다가 어색하게 웃고 말았습니다. "지난번 '삼국지'는 눈앞에서 놓쳤거든요" 나보다 빨리 달린 남자는 묻지도 않은 말을 하더군요.

토요일 오전 늦잠은 못 잤지만 소중한 아이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뿐만이 아닌 거 같네요. 지인들 SNS에 이 시리즈를 구했다는 인증샷이 주말 내내 올라옵니다. 그런데 왜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을까요?
 
올재 클래식스 28차
 올재 클래식스 28차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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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어떤 친구는 소장가치가 있다고 솔직하게 얘기합니다. 중고시장에 나온 가격을 얘기하면서요. 그런데 되팔려는 사람도 있지만, 그 물량이 많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재단과 서점 측에서 크게 신경 쓰는 거 같지는 않거든요.

제 경우를 생각해보면 책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파고든 거 같습니다. 저는 책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책'이라는 상품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이 시리즈를 구매하는 지인들도 그렇고요.

저는 책꽂이에 꽂힌 '책등'을 바라보면 맘이 편해집니다. 가끔 순서를 바꾸기도 하면서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요. 다양한 색깔, 크기, 디자인의 책 그 자체가 주는 외적 아름다움이 내적 아름다움 못지않거든요.

특히 출판사들이 내는 시리즈를 순서대로 꽂아보면 그 외적 통일감과 안정감은 대단합니다. 그 내용이 주는 아름다움을 더해주죠. '문학과 지성사'의 시집과 '민음사'나 '열린책들'의 소설이 그런 책들이죠. 올재 클래식스도 제게는 같은 맥락입니다. 책꽂이와 집 안 구석구석에 놓인 오렌지 책들을 보면 묘하게 위로가 됩니다.

이 시리즈를 제가 좋아하는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함께 읽을 수 있거든요. 며칠 있으면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함께 읽는 캠페인이 진행될 겁니다. 하루에 30페이지 정도 읽다 보면 두꺼운 책도 어느새 맨 뒷장이죠. 종이가 얇아 너덜너덜해지고, 활자가 작아 한 페이지에 많은 문장이 들어가는 바람에 눈은 아프지만 읽는 재미는 비싼 책 못지않습니다.

'올재 클래식스'를 보면 오래전 '계림문고'나 '삼중당문고'가 생각납니다. 어릴 적 용돈 받을 때마다 어떤 걸 살까 설레던 기억이요. 그렇게 한 권씩 사서 읽고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체성이 확실한 책이었죠. 책꽂이에서 자기의 영역을 확실히 차지했으니까요. 전집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위용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집을 옮기는 과정에서는 제일 먼저 버림받기 마련이었습니다. 값싼 책은 먼지 날리는 무거운 짐일 뿐이었으니까요. 이래저래 사라진 그 책들이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에 맘을 주고 있는 것도 같네요. 어떤 시리즈가 새로 나올지 설레게 하는 책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강대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오피니언뉴스에도 게재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올재 클래식스 28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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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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