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안화>의 한 장면

영화 <피안화>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기시감

일본 영화의 3대 거장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 많은 관객들은 오즈의 영화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실제로 오즈의 영화는 늘 비슷한 느낌의 장면이 있는데, 대체로 가족과 집안의 모습이 반복되고는 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두고 오즈의 자기복제라고도 했다. 그러나 오즈의 카메라가 한 시대를 품으려 했다는 점에서, 그런 반복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가두어 놓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말하자면 오즈의 카메라는 현실을 보는 하나의 틀로서, 자신이 포착한 순간을 끊임없이 되돌려 보는 비디오였다. 

오즈는 세 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가족의 해체를 목격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떠나거나 피하는 과정에서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전쟁이 끝나자 피난을 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인들에게 고향이란 돌아와야만 하는 곳이었다. 오즈는 원폭을 맞았던 나라가 재건되는 모습에서 경외심을 느꼈다. 사람들이 떠났던 장소가 다시금 사람으로 채워지는 모습은 마치, 메마른 땅에서 솟아나는 풀잎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언젠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이 설사 방사능처럼 최악의 결말을 맞았을지라도 말이다. 

오즈는 생명의 순간을 자꾸만 되뇌어 보았다. 오즈의 후기 영화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연보는 이런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후기 영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계절을 제목으로 삼은 것도 그런 이유이다. <이른 봄> <초여름> <가을햇살>로 이어지는 계절의 흐름은 사람의 인생을 표현한다. 지금 떠나가는 이들(죽음)과, 지금 떠나가야 하는 이들(결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즈는 그들이 떠나가는 게 필연적이라 보았으며, 그러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원폭을 맞은 땅에서 새 생명이 피어나듯이, 그곳에는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던 생명력이 고개를 들어 빈자리를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오즈는 사람 간의 관계를 '생명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듯, 겨울처럼 차가운 단절에도 끝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 끝은 마지막이 아니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찾아온다. 이 사계는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처럼 오즈가 말하는 사람 간의 관계란 독립적이면서도 영속성을 띤다. 한 생명의 죽음이 슬플 수는 있어도, 눈을 돌리면 어느 순간 새 생명이 태어나 있다. 사람은 죽지만 사람이 죽어도 세계는 흘러간다. 다시 말해 관계의 단절이란 망자와 직접 연관된 이들,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거대하지만, 가족 전체로 본다면 어느 순간 새 관계가 태어나 있다. 벤야민의 말처럼 과거로부터 뿌려진 씨앗이 현재를 구한다는 이 관점은 오즈의 후기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좋은 해답이다. 
 
 영화 <피안화>의 한 장면

영화 <피안화>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타자 

일반적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감독은 여러 각도로 하나의 문제를 들여다본다. 반면 오즈는 하나의 각도로 하나의 문제를 되새긴다. 마치 우직한 소처럼 가족이라는 테마를 여러 차례에 걸쳐 소화해낸다. 대략 필모그래피의 중반부터 시작된 관심은 사망 직전까지 꺼지지 않았다. 어쩌면 오즈가 처음부터 가족에 관심을 두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즈는 데뷔 이례로 늘 시나리오에 재량권이 있었으므로, 만약 처음부터 관심을 두었다면 처음부터 가족 영화를 찍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오즈는 사람들의 일상에 관심을 두었다. 유랑극단을 다룬 <부초 이야기>(1934)나 대학생을 다룬 <낙제는 했지만>(1930)이 대표적이다. <부초 이야기>는 사라져 가는 일본의 전통을 보여준다. <낙제는 했지만>은 일본 청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두 영화는 무성 시대의 오즈가 아직은 가족이라는 개념을 확립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두 영화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이라는 키워드를 뽑아낼 수 있다. 전통극단은 손님이 줄어 멸절의 위기에 처한다. 대학교의 청춘들은 전쟁에 징집될 것이다. 말하자면 후기 오즈의 씨앗은 초기부터 있었다. 이 씨앗이 가족에게로 옮겨가는 것은 그리 멀지 않았다. 

후기의 오즈가 집과 직장이라는 구도로 가족의 범위를 한정했던 것과는 달리, 이 시기의 오즈가 말하는 가족이란 좀 더 포괄적이다. <그날 밤의 아내>(1930)와 <나가야의 신사록>(1947)에서 오즈는 빈곤한 가족에게 타인을 끌어들인다. <그날 밤>에서는 자식의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도둑질한 아버지와 그런 딱한 사정을 듣고 검거를 망설이는 형사가 있다. <나가야>에서는 갑자기 찾아온 고아를 떠맡게 된 여인도 있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원치 않은 이의 방문으로 갈등을 겪던 이들이, 바로 그 불청객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때의 오즈는 외부적인 것을 통해 치유되는 관계, 혹은 타인의 도움이 없다면 관계는 회복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아마도 오즈는 전쟁의 파괴력을 눈으로 목격했기에, 그들 스스로는 반성할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는 이에게, 누군가 손길을 내밀어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만 비로소 치유된다고 말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찾아온 타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갑작스러운 삶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이 가족에게로 옮겨가는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전통적인 가족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과거를 상징하는 부모세대와 현재를 상징하는 자식 세대는 갈등을 겪는다. 이때 갈등은 외부적인 것이어서 타인의 도움이 없다면 해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동경이야기>(1953)에서 늙은 부모는 자식을 찾아 동경으로 온다. 그러나 자식은 늙은 부모의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부모에게서 독립해 가정을 꾸린 자식에게 부모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즉 부모는 가족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의 갈등은 가족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그날 밤>과 <나가야>에서 주인공에게 갑작스러운 타인처럼, 자식에게 부모란 그런 존재이다. 

가족의 외부에서 내부로 침입해오는 부모에 반감을 품는 자녀들의 모습은 흡사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신체의 면역기관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를 거부하는 자식을 보면서 화를 내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이들을 갈라놓은 것은 전통적인 사회의 붕괴 즉 외부적인 요인이므로, 그들이 대항하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사회라는 맥락에서 말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해를 넘어서 슬픔과 동정심을 느낄 수도 있다. 이 감정은 표면적인 플롯이 아니라 그것이 세워진 기단부를 직시할 때 비로소 떠오른다. 가장 파괴적인 타자인 원폭이 그들 사회, 그들 가족에게 떨어졌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삶의 터전에서 밝은 섬광으로 시간이 고정되어 버린다는 사실, 오즈의 시계는 바로 그 '순간'에 멈춰있는 것이다. 
 
 영화 <피안화>의 한 장면

영화 <피안화>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어색함

오즈 영화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은 플롯과 쇼트의 반복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 반복은 오즈가 의도한 것으로, 영화를 순간에 가두어 놓기 위함이다. 정지된 순간에는 선택이 없다. 떠나가는 이들과 떠나야만 하는 이들, 만약 우리가 한 가지를 택해야만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선택하지 않은 채로 있으면 죽음과 결혼이라는 헤어짐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즈는 시간이 흘러가야만 한다는 사실, 파괴는 창조를 동반한다는 믿음 아래에 영화를 찍는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는 외부로부터 날아든 파멸을 무덤덤하게 받아든다. <동경이야기>에서 노인은 죽고, <가을햇살>에서 딸은 시집간다. 이때 가족들은 일시적으로 분열된다. 그러나 <동경>에서 배우자를 잃은 류 치슈는 며느리에게 망자의 시계를 쥐여줌으로써 새로운 가족을 만들라고 말한다. <가을>에서 하라 세츠코도 딸을 시집보내 가정을 꾸리게 하고 자신 또한 재혼한다. 파괴는 창조를 동반한다는 오즈의 믿음은 이렇게 실현된다. 

요컨대 파괴는 창조를 동반한다는 말을 뒤집을 수도 있다. 창조는 파괴를 동반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오즈는 자신에 세운 명제를 뒤집지 않는다. 단지 그는 창조의 전제에 파괴를 깔아둔다. 에너지의 총량이 보존되지만 거꾸로 흐르지는 않는 것처럼, 오즈의 영화에서 시간과 관계는 선형적이다. 말하자면 파괴 없이는 창조도 없다는 것이며, 겨울이 없다면 봄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에는 겨울이 없다. 겨울은 파괴의 정수를 담은 계절이기에 등장해서는 안 된다.

오즈가 차선으로 택한 건 비슷한 순간과 풍경의 반복을 통해 인물을 특정 시간에 가두어 두는 것이었다. 봄이 계속된다는 무릉도원처럼 오즈의 영화 속 날씨는 늘 화창하고 늘 따사롭다. 그러나 그곳이 무릉도원이기에 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안다. 다시 말해서, 오즈의 영화가 현실을 다루면서도 전혀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오즈는 화목해 보이는 인물을 내세우면서 분열의 자리를 롱 쇼트로 봉합한다. 겨울이 내다보이던 창은 롱 쇼트로 봉합된다. 표면적으로 갈등이 없어 보이는 것은 단지 눈속임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 카메라가 롱 쇼트로 인물의 모습을 잡을 때, 그들은 보통 어색한 미소를 줄곧 유지한다. 그래서 부자연스러운 미소가 수 초간 계속된다. 그러나 현실의 누구도 이런 미소를 짓지 않는다. 하라 세츠코는 그런 면에서 탁월한 배우였다. 하라 세츠코의 일본인답지 않은 외모와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미소는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신여성을 연기하던 하라 세츠코를 데려와 정숙한 처녀 연기를 맡긴 것도 한몫한다.)

 
 영화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의 한 장면

영화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현실성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걸 모른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무릉도원 속은 늘 한결같은데, 그 밖에서는 격변이 일어나고 있다. 세상은 빠르게 흘러가는데 오즈는 여전히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오즈의 영화가 그리는 모습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었다. 오시마 나기사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그런 비판은 시간이 흐른 현재에도 유효하다. 무릉도원은 마냥 행복한 곳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오즈 영화 속 세계는 발전이 없는 세계이다. 발전이 없는 세계에서는 늘 같은 고뇌와 갈등이 반복된다. 그런 반복 속에서 인물들은 마땅한 해답을 찾지는 못한다. 다만 반대로, 해답이 인물에게 찾아온다. 이때 그 해답은 대체로 인물들이 평소에 생각해왔던 것을 행동으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그들을 구원하는 건 과거로부터 온 자신이었다. 

오즈의 인물들은 발전하지 않는다. 발전하려는 생각보다는 현재에 머무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재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해답이 도착한다. 과거가 현재를 현실로 떠민다. 발전하지 않는 현재가 발전하지 않은 과거로부터 답을 얻는다는 사실은, 자기 삶을 되돌아보며 과거의 무지에서 교훈을 얻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꽤 자주 있는 일이다. 일종의 자기 성찰인 셈이다. 하지만 오즈는 자신의 영화를 의도적으로 현실과 분리함으로써 비현실성을 만들어 내는데, 그런 비현실성 속에서 우리는 이 영화에 이입하지 않게 된다. 오즈 영화의 아이러니가 바로 이것이다. 영화 속에서 인물은 해답이 없는 현재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게 해답을 준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비현실적인 것 다시 말해 부정하고 싶은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보던 우리는 이 영화에서 불현듯 깨달음을 얻는다. 

오즈의 영화를 우리는 자연스럽게 부정한다. 우리는 일본인도 아니고 당시 사람도 아니기에 당연하다. 요컨대 우리는 오즈가 그리는 영화 속 풍경에 대해 무지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무지는 우리가 자신의 과거에 품는 통찰과 유사하다.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이고,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바르게' 묘사될 수 없다. 시간이 흘러간 이상 이미 현재에 의해 왜곡된다. 바로 주관이 삽입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뒤돌아본 과거는 객관적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지함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것이라는 확신으로 덮어버린다. 과거는 줄곧 현재에 의해 왜곡되는데, 현재는 과거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말하자면 이들의 관계는 상보적이다. 확신이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데, 무지는 확신을 준다. 
 
 영화 <동경 이야기>의 한 장면

영화 <동경 이야기>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반복

오즈의 카메라는 바닥 위 120cm에서 지긋하게 눈을 마주치고, 응시하고, 대화한다. 이런 대화는 인물들이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된다. 그렇지만 오즈는 이런 일상을 바탕으로 쇼트와 플롯을 변주한다. 같은 인물이 같은 구도로 대화하는 장면을 같은 쇼트로 찍는데, 이런 쇼트가 전반부에도 있고 후반부에도 있다. 영화 초반에 삽입되었던 도심의 풍경은 중간이나 마지막에 가서 다시 한 번 나온다. 그러나 이런 반복은 완전하게 같지가 않고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동경이야기>의 도입부에는 물 위에 배가 떠가는데, 결말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배는 도입부보다 조금 더 흘러가 있고, 배우자를 잃은 류 치슈의 옆은 공허하기만 하다. 말하자면 공간으로나 심리로나 순간은 변주되었다. 

인물의 일상의 보여주던 필로우 쇼트가 같은 사물을 다른 구도로 보여주는 것이 영화에서 반복될수록, 우리는 이들의 삶이 일상에서 이탈하고 있음을 느낀다. 계절이 한 바퀴를 돌아오면 같은 모습이라도 다른 느낌의 식물이 그 자리에 있듯이, 미묘한 변화에서 그들의 삶이 어느새 흘러가 버렸음을 직감하게 된다. 오즈가 순간에 머물렀던 것은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차이에 주목하게 되고, 시작과 끝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 오즈가 포착한 일상은 더는 일상이 아니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 더는 일상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야기라는 것은 무엇을 주목하느냐를 통해 만들어진다. 라고 오즈는 말했다. 결국 오즈가 그리는 일상 속에서 무엇을 보고 느낄지는 우리의 몫이다. 

오즈의 영화에는 비슷한 장면과 풍경이 반복되는데, 이러한 반복을 따라가다 보면 이것들이 일종의 입구와 출구로 작용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마치 계절이 반복되듯이, 봄이 입구라면 겨울이 출구인 것처럼, 한 곳에 고정된 카메라가 다큐멘터리처럼 시간을 빠르게 흘려 넣을 때 우리는 그러한 변화를 체감한다. 이것은 어쩌면 삶이라는 시퀀스의 시작과 종료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오즈의 영화에는 그런 출구와 입구가 많다. 인물의 대화가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일 분여의 시간부터, 집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십 분여의 시간까지. 삶의 매순간이 선택의 연속인 것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 싶은 이 반복은, 하나의 영화뿐만 아니라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전개되기도 한다. 
 
 영화 <동경 이야기>의 한 장면

영화 <동경 이야기>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오브제

이를테면 비슷한 오브제의 활용이 필모그래피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의 중간에 자리 잡은 연등이 <동경이야기>에서 류 치슈의 옆자리에도 있다. <안녕하세요>에서 아이들이 들여다보던 티브이는 <꽁치의 맛>에서도 세상을 비춘다. <안녕하세요>와 <가을햇살>의 도입부는 공통적으로 전신주를 보여주며, <피안화>는 기차역에서 시작해서 <부초>는 기차역으로 끝이 난다. 말하자면 오즈에게 오브제는 단지 오브제일 뿐이다. 그는 화면 속에 포착된 것으로 무언가 의미를 피력하려고 하지 않았다. 구도가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로 화면 속의 오브제를 전 쇼트와 다르게 배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일화는 화면 속의 구도, 미쟝센을 중요시했던 오즈의 예술관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오브제는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는 점도 말해준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를 회화에 비유한다면 인상파에 가깝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에 대한 본질이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있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자연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오즈는 카메라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혹은 그런 것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카메라의 첫 번째 기능이 현실의 포착이라면, 두 번째 기능은 그 속에서 보는 이가 무엇을 찾아낼 수 있느냐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즈가 포착한 것은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은 우리가 볼 때마다 매번 달라져 있다는 점에서 정답은 없다. 가족이 찢어지던 당시의 순간은 요즘 사회에도, 어느 맥락에도 여전히 들어맞는다. 단지 작가가 보고 그리는 느낌, 색채, 더 나아가서는 영화이기에 시간을 담을 뿐이다. 아마도 오즈가 포착한 순간이란 그런 느낌일 것이라고 그의 영화가 말해준다. 반복되는 순간, 미묘한 차이, 흘러가는 시간, 아마도 차연일 것인데, 오즈는 그러한 순간의 변형, 기시감을 보여주기 위해 비슷한 쇼트를 삽입했다. 그러나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즈는 그런 사람이다. 
영화 오즈 야스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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