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1 월드그랑프리 무대는 신장, 체중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때문에 전형적인 헤비급 파이터도 많았으나 라이트헤비급 정도가 적당한 선수들도 다수 경기를 가진 바있다. 교타로(32·일본), 타이론 스퐁(33·수리남), 구칸 사키(34·터키), 하리드 디 파우스트(43·독일), 루슬란 카라에프(35·러시아), 자밋 사메도프(34·벨로루시), 멜빈 마누프(42·네덜란드)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사이즈의 불리함을 스피드와 테크닉으로 커버한 케이스였으나 전형적인 헤비급 파이터들과 경쟁하기에는 여러모로 불리함이 많았다는 평가도 있다. 라이트헤비급의 존재가 두고두고 아쉬웠던 이유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본체급보다 헤비급에서 더 존재감을 보였던 카오클라이 카엔노르싱(35·태국)의 사례도 있지만 이는 지극히 예외에 가까웠다.

역대 그랑프리 우승자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최종 무대에서 마지막에 웃는 것은 기량과 사이즈를 겸비한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K-1에서도 신장 2m 이상의 거인 파이터는 흔치 않았다. 역대 최강자 중 한명으로 악명을 날렸던 세미 슐트(218cm·네덜란드)를 필두로 얀 '더 자이언트' 노르키아(211cm·남아공), 비욘 브레기(202cm·스위스) 등 극소수였다.

재미있는 것은 숫적으로 많지 않았던 코리안 파이터 가운데 거인과 파이터가 둘이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체 조건부터 범상치 않았던 최홍만(218cm·160kg)과 김영현(2m17·147kg)은 데뷔 당시부터 많은 관심을 받으며 K-1 무대에 거대한 한국인의 파워를 과시했다.
 
 전성기 시절 최홍만은 부족한 경험과 기술을 힘과 맷집으로 커버했다.

전성기 시절 최홍만은 부족한 경험과 기술을 힘과 맷집으로 커버했다. ⓒ 로드FC

 
끼가 넘쳤던 최홍만, 조용했던 김영현
 
씨름 선수 출신 두 코리안 거인의 명암은 K-1에서 극단적으로 갈렸다. 한때 최홍만은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K-1 내 인기캐릭터로 명성을 누린 반면 김영현은 아쉽게도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조용히 퇴장하고 말았다.

제일 큰 이유는 역시 성적이다. 최홍만은 레미 본야스키, 제롬 르 밴너, 바다 하리, 레이 세포 등 아시아권 선수들 입장에서는 쉽게 넘보기 힘들었던 세계적 헤비급 거물들과 줄줄이 일합을 겨룬 바 있다. 같은 거인과 중 가장 성공한 슐트를 맞아 승리를 거두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반면 김영현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으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간 케이스다.

성격적인 부분도 영향을 끼쳤다. 음반을 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홍만은 연예인 기질이 풍부한 엔터테이너였다. 한창 파이터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에도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자주 얼굴을 비치며 넘치는 끼를 자랑했다.

거기에 비해 김영현은 묵묵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성격을 비롯해 그 외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에서 조용한 행보를 보였던 김영현은 그 때문에 최홍만처럼 안티 팬들이 극성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쏟아지는 관심도 적었다.

당시 높은 인기를 누렸던 코리안 파이터들은 각자 팬들과 언론에게 어필할 수 있는 캐릭터와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최홍만은 말할 것도 없고 윤동식은 '비운의 유도왕'이라는 사연과 필살기인 암바로 각인됐다. 추성훈은 유도계 파벌 문제의 아픔을 가진 화끈한 스타일의 파이터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김영현 또한 개성이 될 만한 요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직 씨름 천하장사라는 타이틀에 모든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서도 보기 드문 신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개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요소는 먼저 격투무대에 진출했던 최홍만으로 인해 이른바 '원조성'이 사라진 상태였던 지라 좀 더 차별화 된 무언가가 필요했다.

단순히 키만 컸던 김영현, 거인의 장점이 적었다
 
격투 무대에서 남들보다 신장과 리치가 길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더욱이 그라운드 플레이가 배제된 입식에서는 그 차이가 무척 크게 작용한다. 작은 선수가 때리기 힘든 거리에서 타격을 낼 수 있고 움직임도 덜 가져가면서 자신의 플레이가 가능하다. 작은 선수가 거리를 좁히기 위해 무리해서 파고드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짧은 공격으로 카운터도 낼 수 있다.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슐트다.

한창때의 최홍만은 슐트 만한 테크닉과 풍부한 입식 경험을 갖추고 있지 못했음에도 K-1 내 정상급 테크니션들도 쉽게 공략하기 힘든 파이터였다. 단순히 키만 큰 게 아니라 거기에 걸맞는 맷집과 파워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타격은 견디어내고 공격을 낼 수 있는 지라 상대 선수들 역시 마음 놓고 플레이하기가 힘들었다.

워낙 힘이 센 지라 어설픈 펀치 하나에도 큰 충격을 입을 수 있었다. 비슷한 신장에 테크닉에서 월등하게 앞섰던 슐트마저도 최홍만의 압박에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을 정도다. 안타깝게도 김영현은 최홍만 만큼의 파워와 맷집이 없었다. 말단 비대증 수술을 이미 받았던 상태였던 지라 최홍만 같이 선천적 괴력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K-1 중위권 이상 선수들에게 김영현은 위협적인 선수가 되지 못했다. 단순히 키만 컸지 기술도 부족하고 경험도 짧았으며 힘과 내구성도 좋지 못했던 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샌드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로우킥으로 먼저 다리를 공격하고 중심이 무너지거나 허리가 숙여지며 안면이 낮춰졌을 때 파고들어 펀치나 킥을 내면 속수무책이었다.
 
 김영현의 데뷔전은 좋았다.

김영현의 데뷔전은 좋았다. ⓒ K-1

 
그저 그런 거인에게는 너무도 높았던 K-1의 벽
 
정면대결을 피하고 뒤로 밀리는 상대를 맞아서는 김영현 같은 어설픈 거인 파이터도 할 게 많다. 거리가 멀어진 상태에서 긴 신장과 리치를 이용해서 공격하기 용의하기 때문이다. 반면 거리를 깨고 파워풀하게 들어오게 되면 김영현은 어려운 상황에 봉착되기 일쑤였다. 상대적으로 느리고 기술이 떨어졌던 지라 유일한 무기인 신장을 살릴 수가 없었다.

이같은 극과 극 사례를 제대로 보여줬던 경기가 야나기사와 류우시(46·190cm·일본)와 니콜라스 페티스(45·180cm·그리스)전이다. 객관적 기량의 차이가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류우시는 김영현의 압도적 신장 앞에서 도망다니며 소극적으로 경기에 임했던 반면 페티스는 37cm의 신장 차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정면 돌파로 손쉽게 승리를 가져갔다.

김영현은 2007년 9월 29일 'K-1 월드그랑프리 2007 개막전'에서 데뷔전을 가졌고 결과 역시 좋았다. 경험 많은 베테랑 류우시를 상대로 3라운드를 모두 소화한 끝에 3-0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둔 것. 첫 경기답게 어설픈 모습도 있었으나 어쨌거나 승리를 거둔 지라 '제2의 최홍만'에 대한 기대 역시 높았다.

태국 본토로 전지훈련을 떠나 강훈련을 소화한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전형적인 무에타이 선수 복장으로 링에 입장한 김영현은 첫 경기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다소 상기된 표정이었으나 막상 경기에 들어가자 침착함을 잃지 않으며 하나하나 훈련한 성과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김영현의 큰 체구에 위축된 듯 류우시는 1라운드 초반부터 외곽으로 돌며 정면승부를 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김영현은 체력 안배를 생각한 듯 무리하게 쫓아가는 대신 가드를 올린 채 천천히 구석으로 상대를 몰아가기 시작했고 가벼운 미들킥을 터트리며 포문을 열었다.

이후 로우킥, 미들킥, 펀치로 이어지는 콤비네이션을 자유로이 구사하며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을 놀라게 했다. 예상치 못한 거인 파이터의 계속된 로우킥 공격에 류우시의 얼굴에도 당황한 표정이 그려졌다.

달리 공격 방법을 못 찾은 류우시는 궤적이 큰 펀치로 대항해봤지만 타이밍은 물론 거리 싸움에서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김영현은 서두르지 않고 연타공격을 냈다. 류우시는 고개를 바싹 낮춘 채 김영현의 복부를 노려봤지만 이마저도 김영현의 뺨 클린치에 이은 니킥에 무산되기 일쑤였다.

일방적인 김영현의 압박은 3라운드까지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류우시는 슬립 성으로 3번이나 바닥에 넘어졌다. 3라운드 막판 김영현의 펀치러시가 들어가자 충격이 쌓인 듯 류우시는 다리가 풀리며 결국 다운을 허용했고 힘겹게 다시 일어났으나 그대로 종료 공이 울리고 말았다. 김영현의 3-0 판정승이었다.

적어도 데뷔전만 보면 김영현은 향후 행보를 기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최홍만만큼 파워풀하지는 않았으나 무에타이를 기본으로 한 다양한 킥 공격 등 기본기에서만큼은 더 착실해 보였다. 높은 타점에서 터져 나오는 연타는 작은 선수들 입장에서 대응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옵션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음 경기에서 금세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김영현은 장신이지만 느리고 기술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다. 무엇보다 그것을 커버할 만한 맷집과 힘이 없었다. 김영현은 'K-1 다이너마이트(Dynamite!!)'에서 극진가라데 고(故) 최영의 총재의 제자로 유명한 페타스와 경기를 펼쳤다.

비록 당시 패수가 많아지고 있는 상태이기는 했으나 동양권에서는 당할 선수가 거의 없는 선수라는 점에 비춰봤을 때 2전째 상대로는 다소 벅찼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팬들 사이에서는 217cm vs. 180cm라는 압도적인 사이즈 등 유리한 조건도 있어 승패를 떠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기대를 하는 분위기였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김영현은 패타스의 로우킥에 금세 움직임을 잃어버렸고, 코너에 몰린 상태에서 맹공을 당해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지더라도 뭔가 가능성을 보기를 원하던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큰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기술이라는 부분은 단기간에 습득이 불가능하며 그렇다고 자칫 잘못 몸을 불렸다가는 플러스보다는 마이너스가 될 공산도 크다. 이를 입증하듯 이후 김영현은 그저 그런 모습으로 쓸쓸히 K-1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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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현 최홍만 골리앗 천하장사 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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