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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은 조선 왕릉 9기가 모여있는 최대 왕릉군이다.
▲ 동구릉의 가을 동구릉은 조선 왕릉 9기가 모여있는 최대 왕릉군이다.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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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에는 이미 첫눈이 내렸고 곳곳에서 서리가 내렸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아직 가을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했는데 가을은 저만치 달아나고 있다. 아쉽고 안타깝다. 어딘가 단풍이 깃든 소박한 곳에서 가을과의 이별의식이라도 치러야할 것 같다. 그래야 가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무덤이다. 잔디가 아닌 하얀 억새가 심겨 있는.

최고의 단풍 명소, 조선 왕릉
 
동구릉의 가을
 동구릉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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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주변의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오랜 세월이 빚은 명품 숲에 둘러싸여 있다. 붉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불쑥 솟은 붉은 홍살문과 길게 뻗은 신도길, 정자각이나 재실 같은 전통적인 목조 건축물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한편의 사극 같은 가을 풍경을 연출한다.

이곳은 500년간 이어진 조선 왕조의 왕과 왕비가 묻혀 있는 무덤이다. 그만큼 아무에게나 발걸음이 허락되지 않았던, 내밀하며 지엄한 왕실공간이었다. 또 조성부터 관리까지 철저하고 엄격한 통제 하에 이루어졌다.

국왕과 왕비 등 왕실의 무덤은 '궁궐에서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왕실의 규범집 <국조오례의>의 규정 덕에 조선 왕릉은 모두 현재의 서울 외곽지역과 고양, 남양주, 구리 등 경기도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단, 폐위돼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한 단종의 능인 장릉은 강원도 영월에 있다.

현존하는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이다. 태조 이성계의 원비 한씨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과 정종과 정인왕후의 능인 후릉 2기가 북한에 있을 뿐 나머지 40기는 모두 남한 땅에 있다.

조선 왕릉은 2009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교의 이념하에 조상숭배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조선왕조의 문화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며, 한 왕조의 왕과 왕비의 능이 훼손되지 않고 제자리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점과 지금도 500년 전 같이 제례를 올리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라는 점이 보편적인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신비하고 스산한, 과거로 가는 길
    
조선 왕릉 중 최대 규모의 왕묘군인 동구릉에서는 조선 왕릉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조선 왕릉 중 최대 규모의 왕묘군인 동구릉에서는 조선 왕릉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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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시 검안산 자락에 위치한 동구릉은 이름 그대로 아홉 개의 왕릉이 모여 있는 조선 왕릉 중 최대 규모의 왕묘군이다. 그 면적은 약 59만평에 달한다.

고려 공민왕의 능인 현정릉을 참고로 해서 만들어진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과 세종 때 완성된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만들어진 현릉, 선조가 묻혀 있는 목릉에 이르기까지 조선 왕릉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동구릉 숲.
 아름다운 동구릉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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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 공간이 주는 고요함과 고즈넉함은 차분하게 가을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제격이다. 울긋불긋 나뭇잎들과 성성한 나뭇가지,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숲길은 마치 과거 500년 전 조선 왕실로 들어가는 길목처럼 신비하면서도 조금은 스산하다.

9기의 왕릉들은 일순 똑같아 보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능 주인의 모습과 닮았다. 그래서인가 계절마다 찾고 싶은 능이 다르다.

무덤 위에는 하얀 억새만 휘날리고...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에는 잔디대신 억새가 무성하다.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에는 잔디대신 억새가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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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위에 잔디 대신 무성하게 자란 억새가 이리저리 휘날린다. 봉분 꼭대기에 갈 곳 잃은 늙은이가 긴 흰머리를 풀어헤치고 앉아 있는 것 같다. 생경하고 기괴하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이다. 가을만 되면 그의 무덤이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왕릉과는 어울리지 않는 억새 때문이리라.

건원릉은 동구릉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아들 태종이 파주, 고양, 구리 등지를 물색하여 능지로 정한 곳이다. 길지 중의 길지, 명당자리다. 과연 능침을 둘러싼 송림과 시야가 탁 트인 경관이 아름답다. 조석왕조 500년의 영화는 그 덕일까. 물론 끝은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태조의 능 조성에는 전국에서 6000여 명이 장정이 동원되었고, 공사 기간은 두 달이나 걸렸다. 능 옆에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개경사'라는 원찰을 세우고, 스님 100여 명을 배속시켰다.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태조 이성계의 능에는 잔디대신 억새가 무성하다
 태조 이성계의 능에는 잔디대신 억새가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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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임종할 때 고향인 함흥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태종은 유언을 무시하고 지금의 구리시 검안산 서쪽에 태조를 묻었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조선 개국의 시조인 아버지 이성계를 궁에서 너무 먼 함흥에 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위하여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 심었다. 건원릉에 잔디가 아닌 억새가 심어진 연유이다.

그러나 호사가들은 다른 이유를 찾는다. 아버지 태조가 멀쩡히 살아 있는 생모 한씨(신의왕후)를 버리고 강씨(신덕왕후)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매사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 태조가 좋아보일리가 있겠는가. 또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태조의 능을 저 멀리 함흥에 조성할 수 없었으리란 것이다.

원래 태조의 수릉(살아서 조성해 놓은 능)은 강씨가 묻힌 정릉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능 앞 160미터 앞에까지 집을 지을 수 있게 하는 등 정릉을 철저하게 파괴하였고 태조가 죽자 강씨의 능인 정릉을 파헤치고 지금의 정릉 자리로 이장했다. 그때 정릉의 병풍석은 광통교의 기단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야산에 버려졌다. 목재는 중국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또 정릉을 묘로 격하시켜 강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 이성계가 묻힌 건원릉의 홍살문
 태조 이성계가 묻힌 건원릉의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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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태조는 사랑하는 여인과도 함께 묻히지 못하고 검안산 자락에 혼자 외로히 묻혀 있다. 봉분을 덮은 억새가 이성계의 한 맺힌 혼령인 듯, 방원의 마지막 복수인 듯 무심하게 휘날린다.

건원릉 홍살문 옆의 단풍이 붉다 못해 검붉다.  
 

태그:#동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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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한국여행작가협회정회원, NGPA회원 저서: 조지아 인문여행서 <소울풀조지아>, 포토 에세이 <사할린의 한인들>, 번역서<후디니솔루션>, <마이크로메세징> - 맥그로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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