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25 17:40최종 업데이트 18.10.25 17:40
   

상해의 국제조계지(1920년대) ⓒ 미상(저작권해제)

 
"동아시아 민족주의운동의 중심지"라 불리는 상하이는 1842년 '남경조약' 이후 통상항구로 개발되어 서구와 일본의 조계(租界)가 설치되었다. 

프랑스 조계, 영국 조계, 일본 조계와 기타 몇 개의 조계가 더 있었는데, 프랑스 조계만 그냥 남고 나머지는 합해서 공공조계라 했다. 프랑스 조계는 길쭉한 형태였고 공공조계는 넓었으며, 그 외곽으로 중국인 행정구역이 있었다. (주석 1)


상하이는 1920~1930년대에 이미 인구 약 300만 명의 거대한 국제도시로 발전하여 해상교통과 동양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시가지는 양자강 하구의 남만, 황포강이 양자강에 합류되는 지점에 있다. 

한국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프랑스 조계는 1866년에 개시되었고, 우리 뿐만 아니라 베트남, 인도, 말레이시아, 태국 등의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프랑스 조계는 프랑스의 건국이념대로 자유ㆍ평화가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1917년 6월말 현재 일본외무성 조사, 조선총독부 척식국 작성 자료에 따르면 1917년 중국 본토에 거주했던 한인 동포의 수는 다음과 같다. 

상해(300명), 천진(154명), 지부(13명), 남경(8명), 산두(19명), 하문(5명), 청도(61명), 기타(4명), 계 564명이었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무렵 상하이에 거주했던 동포의 수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여운형신문조서>와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의 <고등경찰요서>에는 각각 7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하이에는) 1910년대 초에 벌써 소규모의 동포사회가 구성되었다. 그렇지만 동포의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1910년대 후반인데, 1917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500여 명이었으며, 3ㆍ1혁명과 임시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는 1천 명 정도로 증가되었다. (주석 2)
 

상하이 망명 당시의 신채호, 신석우, 예관 신규식 선생 ⓒ 독립기념관

 
1910년대 한국독립운동가들이 상해로 망명했던 시기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1910년대 초 일제에 의해 합병된 직후로서 중국의 신해혁명 시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상해로 망명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신규식ㆍ이관구ㆍ김규식ㆍ문일평ㆍ정인보ㆍ신채호ㆍ박은식ㆍ홍명희ㆍ박찬익ㆍ민필호 등이었다. 

둘째는, 1910년대 중반기로서 105인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인물과 유학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했던 자들이 주류를 이룬 시기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김홍서ㆍ선우혁ㆍ한진교ㆍ여운형ㆍ이범석ㆍ노백린ㆍ장덕수 등이었다. 

셋째는, 3ㆍ1운동 무렵으로 특히 3월말부터 각지에서 대거 망명해 왔다. (주석 3)

1910년 8월 29일 국치와 더불어 '식민통치 아래 생존권까지 박탈당한' 한인들은 대거 해외로 망명하였다. 당시 한인들이 이주한 곳은 중국, 러시아의 연해주, 중남미ㆍ하와이 등이었는데, 중국쪽으로 이주한 한인이 제일 많았다. (주석 4)
 

상하이 두번째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곳. H&M 매장이 들어와 있다. ⓒ 김종훈

 
상하이로 이주한 한인들의 이주 경로는 크게 두 경로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해로로서, 주로 인천ㆍ부산 등 항구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직항하는 길이다. 또 하나는 육로로, 신의주를 거쳐 안봉선(安奉線)으로 봉천과 영구를 경유하여 천진에 이르고, 이곳에서 다시 세 갈래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천진에서 선편으로 상해로 가는 길이었고, 둘째는 천진에서 진포선 열차로 진포선의 종착역인 포구에 이르러, 다시 양자강을 건너 남경에서 수로로 상해에 도착한 길이었다. 셋째는 역시 진포선 열차를 이용하여 중간지점인 제남에서 내려 다시 청도를 거쳐 교주만에서 해상으로 청도에 가는 것이었다. (주석 5)

일제의 한국 병탄부터 3ㆍ1운동 직전까지 상해로 이주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주석 6) 

ⓒ 김삼웅



박재혁이 상하이와 싱가포르ㆍ홍콩을 오가며 무슨 일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나타난 기록은 찾기 어렵다. 명목은 회사일로 파견되었으니 곡물관련의 사업을 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도 은밀히 접촉하였을 것이다. 

당시 싱가포르와 홍콩에는 한국인 인삼장사들이 래왕할 뿐 교민이 거의 살지 않았다. 일찍부터 중국인들에게 고려인삼은 명약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래서 국내에서 가져온 인삼은 상하이나 싱가포르ㆍ홍콩에서 고가에 거래되었다. 
  

상하이 첫번째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김신부로(현재 서금이로) 지도. 이곳에서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이 탄생했다. ⓒ 김종훈

 
예외적인 일이 있었다. 
1913년 10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박은식이 중국인들의 초청을 받고 홍콩으로 건너갔다. 한ㆍ중인의 합작으로 <향강잡지((香江雜誌)>를 창간하기 위해서였다. '향강'은 홍콩의 한자 표기이다. 이 <향강잡지>는 중국혁명당 관계자들과 한국독립운동가들이 함께 낸 잡지였다. 

박은식이 1914년 1월 7일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홍콩에 도착한 뒤 교류한 사람은 대부분 민당(民黨)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당은 중국혁명당을 가르킨다. 홍콩은 당시 중국 동명회혁명당의 활동중심지로서 혁명당인들이 공동하여 발동한 혁명의 준비가 모두 이곳에서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향강잡지>는 중국혁명당인과 한국지사가 합작하고 경영한 선전잡지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원인으로 조소앙ㆍ신채호ㆍ정인보 등 한인지사들이 이 잡지에 투고했고, 이 잡지에는 한국문제에 관한 문장을 많이 등재했다. (주석 7)

<향강잡지>는 제4호에서 중국의 군벌 원세개의 독재통치를 비난하는 글을 실었다가 당국에 의해 정간되었다. 박은식은 <향강잡지>에 14편의 논설을 실었다.

「중국의 명실(名實)」,「민기(民氣)」,「민덕(民德)」,「제2차혁명 후 유감」,「민국헌법초안취송평의」,「애(哀) 광동(廣東)」,「오호 양국지말운(兩國之末運)」등이다. 박은식의 글이 논설난의 반 이상을 차지한 만큼 그는 많은 논설을 썼다. 

박은식은 이 외에도 예림난에 여러 편의 시문(詩文)을 쓰고, 조소앙의 논설과 신채호가 단생(丹生)이란 필명으로 쓴 수 편의 글도 실렸다. 

논설의 주제는 중국혁명과 한중공동항일을 고무하여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규탄하는데 집중된 느낌을 준다, '세계요문' 난에서는 세계정세의 동향을 각종 외지를 인용하여 비교적 상사히 보도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와 같은 다양한 편집을 하면서도 지면 행간에 적절하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실증사례를 제시하면서 광복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주석 8)

여기서 박은식과 <향강잡지>에 관해 소개한 것은 박재혁이 상하이와 싱가포르ㆍ홍콩을 다니며 사업을 했을 자료가 없어서, 그 '분위기'라도 헤아리기 위해서임을 밝힌다. 


주석
1> <한국 독립운동증언 자료집>(안병무지사 증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00쪽, 박영사, 1983. 
2> 김희곤,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 연구>, 38쪽, 지식산업사, 1995.
3> 앞의 책, 35~36쪽.
4> 손과지(孫科志, 중국인, 상해복단대 역사학 교수), <상해한인사회사:1910~1945)>, 46쪽, 한울, 2001. 
5> 앞의 책, 47쪽.
6> 앞의 책, 54쪽.
7>손과지(孫科志, 중국복단대교수), <박은식의 중국 망명시기활동>, <백암학보> 제1집, 345~346쪽. 
8> 윤병석, <향강잡지> 해제, <백암학보> 제2집, 219쪽, 2007.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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